[납북자 특집] ④ 파란 배지와 사라진 일본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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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반세기가 넘는 남북 분단의 비극 한가운데는 납북자들이 있습니다. 6.25전쟁 때 북으로 강제로 끌려간 사람들도 있지만, 전쟁 후에도 하늘과 바다, 해외에서 지속되었습니다. 북으로 끌려간 납북자들은 북한에서는 이방인으로 감시 받고, 남한에서는 잊혀진 존재로 살아가야 했습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은 분단의 아픔을 안고 사는 납북자 이야기를 네편에 거쳐 보내드립니다. 오늘은 마지막 순서로 “파란 배지와 사라진 일본인” 편으로 김진국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2023년 8월 18일 미국 메릴랜드주에 있는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서 미국, 한국, 일본 3국 정상들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미국 조 바이든 대통령과 한국 윤석열 대통령은 각자 자국 국기를 배지로 달고 나온 반면,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일장기가 아닌 ‘푸른 리본’ 배지를 상의에 달고 연설했습니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 제가 지난 1월 미국을 방문했고, 한국 윤 대통령이 3월에 일본을 방문한 후 4월 미국을 방문했고 5월에는 저 자신이 한국을 방문하며 3국의 관계를 강화해 왔습니다.

북한의 군사 위협에 대응하는 한미일 3국의 안보협력을 강화하기 위한 3국 정상의 첫 회의에서 일본 총리는 왜 일장기 대신 파란색 배지를 택했을까요?

파란 배지의 비밀은 45년 전 일본의 작은 해안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에서 시작됐다고

일본에서 20년간 프리랜서 언론인으로 활동한 김현 기자는 말합니다.

김현 기자: 일본 서부, 한국의 동해 쪽 해안지역 니가타 시에 살던 요코타 메구미는 당시 중학교 1학년이었습니다. 학교 배드민턴부로 활동했는데 수업 후 친구들과 연습을 하고 귀가했습니다. 11월이라 해가 빨리지고 어둑어둑 할때 연습을 끝내고 친구들과 집으로 향했습니다.

그날은 1977년 11월 15일이었습니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던 메구미의 엄마는 평소보다 늦은 딸의 귀가에 걱정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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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11월 13살의 나이로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 요코타 메구미 씨의 어머니 요코타 사키(왼쪽) 씨. /AP

메구미 어머니(BBC 방송 인터뷰): 시간이 늦었는데, 딸이 집에 오지 않아서 걱정이 됐습니다. 저녁식사 준비를 멈추고 학교로 달려갔습니다.

메구미 엄마는 체육관에 불이 켜져 있어서 마음이 놓였습니다. 아직 베트민턴 연습을 하는가 보다 생각하고 채육관에 들어갔지만 아무도 없었습니다.

메구미 어머니: 순간 싸늘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집으로 급히 와서 메구미의 두 남동생들과 손전등을 들고 밤거리를 찾아 나섰습니다. "메구미" 이름을 크게 부르며 찾았습니다.

사건사고가 별로 없던 조용하고 평화롭던 작은 해변 마을에서 여중생 실종 사건이 발생하자 대규모 경찰이 동원돼서 대대적인 수색을 했지만 1977년 11월 15일 사라진 13세 소녀 메구미는 45년이 지난 지금까지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시 김현 기자의 설명입니다.

김현 기자: 당시 기록을 보니까 한7-800명 경찰이 동원돼서 수색했다고 합니다. 초반에는 유괴로 의심했는데 전혀 단서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완전히 사리졌다가 1997년 산케이 신문이 요코다 메구미 씨가 북한에 납치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대서 특필을 하면서 메구미 실종 사건이 주목 받게 됐습니다.

메구미가 실종되던 무렵인 1970년대부터 80년대에 걸쳐 일본 서부해안을 중심으로 20-30대 젊은 일본인들이 흔적없이 사라진 실종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합니다.

1977년 9월 이시카와 현 우시쓰 해안에서 당시 52세 구메 유타카 씨가 사라진 것을 시작으로 10월 돗토리현의 29세 마쓰모토 교쿄 씨는 집 근처 뜨개질 수업에 가던 중 사라졌습니다. 1977년 11월 15일 13세 요코타 메구미가 실종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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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타 메구미의 남동생 타쿠야씨와 1살 때 어머니가 납북됐던 코이치루 이주카씨가 지난 5월 자유아시아방송(RFA)을 찾아 인터뷰를 진행했다. /RFA Photo

1978년 6월 유럽으로 출국했던 다나카 미노루 씨가 사라졌고 비슷한 시기 도쿄에서 세 살된 아들과 한 살된 딸과 함께 살고 있었던 당시 22세 다구치 야에코 씨(훗날 김현희 일본어 교사)도 탁아소에 아이들을 내려준 후 소식이 끊겼습니다.

1978년 결혼을 앞둔 연인관계였던 23세 지무라 야스시 씨와 하마모토 후키에 씨는 후쿠이현 해안가 식당에서 나온후 실종됐습니다. 부부였던 20세 하스이케 가우루 씨와 22세 히스이케 유키코 씨와 23세 이치카와 슈이치 씨, 24세 마스모토 루미코 씨도 연인이나 부부 실종 사건도 이어졌습니다.

모녀와 친구도 함께 실종되기도 했습니다.

1978년 8월 12일 46세 소가 미요시 씨와 딸 19세 소가 히토미 씨가 쇼핑을 함께 간다고 사라졌고 1980년 5월 경 22세 이시오커 도우루 씨와 26세 마쓰키 가오루 씨는 유럽에서 함께 실종됐습니다.

1980년 6월 43세 하라 다다아키 씨 실종 사건과 1983년 7월 23세 아리모토 게이코 씨가 유럽에서 사라졌습니다.

미씽 (Missing) 17' - 파란배지의 염원 "살아 돌아오라"

일본 정부는 17명의 일본인들이 북한 정권에 의해서 납치된 것으로 파악한다고 1997년 공식적으로 밝혔습니다.

김현 기자: 1997년 5월 중의원 회의에서 당시 경찰청 경비국장이 “종합적으로 검토를 한 결과 북한이 납치한 의혹이 있다.”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일본 정부를 17명을 납치피해자로 공식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후 일본 언론들은 이들을 실종자 17명이라는 의미로 ‘미씽(Missing) 17’으로 이름 붙이기도 했습니다.

북한은 왜 일본인들을 납치했을까요?

1987년 전세계를 경악하게 만든 대한항공 폭파 사건에서 납북 일본인들의 존재가 처음 드러났습니다.

대한항공 폭파범 김현희는 마유미라는 이름으로 일본인으로 위장해서 비행기에 탑승했습니다. 체포 후 자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한 김현희는 1978년 납북된 다구치 야에코 씨에게 일본어를 배웠다고 증언했습니다.

김현희 (YTN 인터뷰): (일본) 납치인들과 같이 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일본인화 교육을 시켜서 침투시키기 위한, 일본인화. 침투시키기 위한 그런 목적을 가지고 했다고 생각을 합니다.

1997년 일본 정부의 공식 확인 이후 일본인들은 북한 저지른 납치 사건에 공분합니다. 결국 북한은 일본인 납치 사실을 인정하고 공식 사과를 하게 이릅니다.

김현 기자: 2002년 고이즈미 총리가 북한을 방문해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납치 피해와 관련한 인정과 사과를 받습니다. 그리고 납북피해자 중 일부가 일본으로 돌아갑니다.

2002년 9월 일본과 북한의 정상회담 이후 같은 해 10월 5명의 납치 피해자가 24년만에 일본으로 귀국했습니다.

북한은 2004년 5월에 열린 2차 북일 정상회담에서 진상규명을 위한 철저한 조사를 약속했지만 지금까지도 북한 당국으로부터 납득할만한 설명이 없다고 일본정부 내각관방 산하 납치문제대책본부는 밝혔습니다.

결국 북한은 2016년 1월 핵실험과 2월 탄도미사일 발사 이후 일본과 공동을 추지하던 ‘납치자 문제 특별조사위원회’를 해체한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합니다.

납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북한과 일대일 대화를 통한 해결에 한계를 보이자 일본 정부는 국제사회에 호소하며 북한에 압박하는 방법을 택합니다.

유엔에서는 일본인 납치 문제에 대한 언급을 포함한 북한인권상황결의를 매년 채택하고 있습니다.

미국 정부와 여론의 관심을 촉구하는 활동에도 적극적입니다.

2023년 5월에는 요코타 메구미의 남동생인 타쿠야 씨도 납북피해자 가족 대표로 워싱턴을 방문했습니다.

요코타 타쿠야: 납치된 지 45년이 지나 지금 누나는 58세입니다. 그리고 딸을 기다리는 저희 어머니는 지금 87세입니다. 새로운 활동 방침을 특히 미국 정부와 연방의회에 전달하고자 미국에 찾아왔습니다.

일본 정부는 2013년 1월 납치 문제에 관한 대책을 협의하는 내각총리대신을 본부장으로 하는 ‘납치문제대책본부’를 설치했습니다.

일본 정부가 납치자문제 해결을 위해 만든 웹사이트에는 메구미 이야기를 만화로 만든 영상이 첫 화면에 소개되었습니다.

한국어로 제작된 영상에서 메구미의 아버지는 딸의 돌아오는 날만 기다리고 있다는 가족의 애틋한 심정을 말합니다.

김현 기자 :일본은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은 납치 피해자가 다 사망했다는 정보가 확실하게 확인되지 않는 한 자국 국민의 생명을 포기할 수는 없기 때문에 계속 이 문제(납북자)를 강조할 것입니다. 기시다 총리가 지난 미국 캠프 데이비드 한-미-일 정상회의에서 달았던 파란 배지도 납치자를 기리는 의미입니다.

푸른 리본은 일본에서 ‘블루 리본’이라고 불립니다.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을 구출하기 위한 전국협의회’인 ‘스쿠우카이(救う会)’라는 단체에서 지원금을 모으기 위해 판매하는 배지입니다.

푸른색은 북한에 납치된 일본 피해자와 가족, 일본 국민이 일본과 북한 사이를 잇는 푸른 하늘과 바다를 바라보며 ‘재회를 기다린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앵커 멘트] RFA 자유아시아방송 기획 특집, [분단의 희생양 납북자 이야기] 마지막 순서 "파란 배지와 사라진 일본인들"을 보내드렸습니다. 보도에는 워싱턴에서 김진국 기자였습니다.

에디터: 이진서, 웹당당: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