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북한인권법 20주년 기획]➀ 노스코리아메리칸, 그 시작

워싱턴-박수영 parkg@rfa.org
2024.07.01
[미 북한인권법 20주년 기획]➀ 노스코리아메리칸, 그 시작 사진은 2006년 5월 난민 자격으로 미국에 들어온 탈북자 6명이 워싱턴 DC를 방문한 모습.
/RFA PHOTO

[앵커] 올해는 미국 북한인권법이 제정된지 2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먹을 것을 찾아 중국 국경을 넘어 방황하던 탈북민들은 자신들을 난민으로 받아주는 미국으로 구름처럼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낯선 땅에 뿌리 내리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은 미국 북한인권법 제정과 미국 탈북민들의 정착이야기를 보내드립니다. 오늘은 첫번째 순서로 "노스코리아메리칸(North KoreAmerican), 그 시작”입니다. 보도에 박수영 기자입니다.

 

20년 전 10월 미국 의회 상·하원을 모두 통과한 ‘북한인권법’이 대통령의 서명만을 남겨놓고 있었습니다.

 

법안을 전달받은 조지 W 부시 당시 미 대통령은 18일 서명했습니다.

 

비로소 북한인권법이 ‘그 시작’을 맞이한 겁니다.

 

부시 미국 대통령은 오늘 북한 주민들을 위한 인도적 지원과 탈북자들의 미국 망명을 허용하는 내용을 주요 골자로 북한 인권법안에 서명해 효력을 발휘하게 됐습니다.

 

2004년 북한인권법 통과 당시 탈북민 김성민 자유북한대표는 희망에 찼습니다.

 

[김성민] 북한인권법안 통과로 북한 주민 또 탈북자들에 대해서 본격적인 활동적인 지원을 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지기 때문에 북한 인권을 위해 활동해 온 인권 단체들 또 탈북자단체들, 탈북자들에게 큰 희망이고 기쁨이라고 생각됩니다."

 

미국에 정착하는 탈북민들의 삶을 바꿔놓은 북한인권법. 이는 왜 중요한 걸까요? 북한인권법은 탈북민들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다주었을까요?

 

[Bridge]

 

2004년 10월 18일 북한인권법이 제정된 날 이후 탈북과 정착의 길이 달라졌습니다.

 

법안이 제정되기 전 북한을 떠나 미국에 정착하길 희망했던 탈북민들은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미국으로 건너가기 위해 밀입국을 시도해야 했습니다.

 

2001년 5월, 탈북민 김순희 씨는 미국으로 멕시코 국경을 통해 밀입국하려다가 미 연합이민국에 붙잡혀 체포됐습니다.

 

김 씨는 6년 동안 중국 연변에 살다가 미국으로 가기 위해 홍콩, 필리핀, 멕시코를 거쳐야 했는데요.

 

구금된 김순희 씨는 미 이민귀화국(INS)에 망명 신청과 보석금 납부 및 진정서 제출을 통해 석방됐지만 불과 한 달여 만에 미국에서 추방될 위기에 놓였습니다.

 

김순희 씨를 보호할 법안도, 탈북민이라고 증명할 방법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같은 해 탈북민 한 모 씨와 김 모 씨도 “북한 실상에 염증을 느껴 탈북했고 중국에서 언제 탈북민 신분이 드러날지 몰라 미국행을 결심했다”고 밝히며 김순희 씨와 같은 방법으로 밀입국을 시도했지만 체포돼 각각 보석금 1만 5천 달러를 낸 후에야 석방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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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4년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이 북한인권법안에 서명을 하고 있다. /SBS TV 캡처

 

탈북민 정착을 돕기 위해 50건 이상의 무료 법률 지원을 제공해 온 토마스 바커 변호사는 당시 탈북민이 미국에 정착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고 말합니다.

 

[토마스 바커] 북한인권법이 제정되기 전에 북한 사람이 미국에 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탈북민이 미국에 오려는 이유는 신변 안전과 차별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토마스 바커] 제가 알기로 북한 사람들은 남한 사람들과 억양이 조금 다르기 때문에 차별을 받곤 합니다. 남한에 정착한 탈북민들은 그런 차별에 고통받을 수 있겠죠. 또 북한 정찰총국이 남한에서 더 많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탈북민들은 비교적 남한이 덜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북한에서 당 간부였던 사람들은 더 그렇고요.

 

전 세계 어느 곳에도 안전지대가 없는 탈북민들을 위한 긴 싸움이 시작됐습니다.

 

북한인권법 통과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북한자유연합의 수잔 숄티 대표는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한다고 말합니다.

 

[수잔 숄티] (당시 상황이) 생생합니다! 김대중 전 한국 대통령이 소위‘햇볕정책’을 추진하던 시기인 2003년부터 이 법안을 추진했는데 당시 북한 주민들은 굶주림에 고통받고 있었고,여성들은 중국으로 밀수출됐으며, 수십만 명의 무고한 어린이와 여성∙남성들이 북한의 노동수용소에서 고문당하고 살해당하고 있었습니다.

 

참혹한 북한 인권 실태에 상·하원 모두 북한 인권 의식 제고와 증진이 필요하다는 점에는 동의했지만, 북한 인권상황을 어떻게 해결할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했습니다.

 

2003년 11월 샘 브라운백(공화, 캔자스)과 에반 베이(민주, 인디애나) 상원의원, 제임스 리치(공화, 아이오와)와 톰 랜토스(민주, 캘리포니아) 하원의원 등이 공동 상정한 ‘북한자유법’은 북한 난민들에게 망명처 제공과 지원을 보장하는 ‘우선 망명’ 정책과 미국인들의 북한 어린이 입양 등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테러 후원국이었던 북한에서 난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불안감과 북미 간 안보 문제가 발목을 잡았습니다.

 

이로부터 4개월 후인2004년 3월 23일, 반대에 부딪혔던 ‘북한자유법안’을 짐 리치 하원의원을 주도로 대폭 수정하고 보완하여 ‘북한인권법’을 재상정했습니다.

 

주로 대량살상무기 관련 조항이 삭제됐고 북한 내 기본 인권 향상과 북한 난민에 대한 인도적 해법에 대한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습니다.

 

2004년 4월 28일, 약 1천 명의 사람들이 북한 주민들의 자유와 인권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집회에 모여들었습니다.

 

[수잔 숄티] 한반도 밖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북한 주민들의 존엄과 인권을 옹호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 집회는 미국 의회 의원들에게 소수의 활동가와 탈북자들만이 북한 주민들이 처한 가혹한 상황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리기 위한 목적을 위해 마련됐습니다.

 

이날을 기념해 미국에서는 매년 북한의 인권 실상을 고발하는 북한자유주간행사가 열리고 있습니다.

 

한편, 북한 주민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움직임은 국제사회에서도 병행됐습니다.

 

유엔 인권위원회는 북한 인권상황을 조사하고 그 결과를 보고하는 북한인권 특별보고관직을 설치하고, 2004년부터 초대 특별보고관인 태국 출신의 비팃 문타폰 보고관의 임기가 시작됐습니다.

 

2009년부터 2017년까지 미국 국무부 북한인권특사를 지낸 로버트 킹 전 특사는 북한인권법 제정과 유엔 특별보고관 임명은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고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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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자유주간을 맞아 미국 워싱턴 DC 중국중앙텔레비전 앞에서 탈북자 강제북송 반대 시위를 가진 숄티 대표(중앙). /북한자유연합

 

[로버트 킹] 북한인권법 제정은 북한 인권에 훨씬 더 광범위하게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미국 의회가 북한인권법을 검토하던 시기, 제네바 유엔인권위원회는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한 관심을 모으는 데 중점을 두었고 이에 따라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한 특별보고관직을 만들었습니다. 미국의 북한인권법 제정과 유엔의 북한인권법 특별보고관직 설립은 개별적이 아닌 거의 동시에 진행됐습니다. 특히 1990년대 북한에 대기근이 발생하고 생활환경은 더 열악해졌다는 정보가 유출되면서 전반적으로 북한 인권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북한인권법 제정은 이 과정 중 하나였다고 생각합니다.

 

로버트 킹 전 특사는 톰 랜토스 의원과 북한을 방문하며 북한 실상을 알려 2004년 북한인권법을 통과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 법안은 같은 해 9월과 10월 미국 상·하원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됐고, 대통령 서명을 거쳐 18일 공식 발효됐습니다.

 

북한인권법은 북한 주민이 외부 소식을 접할 수 있도록 매년 200만 달러를 4년간 지원하고, 탈북민, 고아, 인신매매로 희생당하고 있는 탈북 여성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위해 매년 2천만 달러씩을 제공하도록 규정했습니다.

 

특히 3장에 명시된 ‘북한난민의 보호조치’로 탈북민이 미국에 입국했을 때 난민지위, 우선망명정책의 추진, 신분 변경, 임시보호지위, 노동허가권 등의 특혜를 부여받을 수 있게 됐습니다.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는 당시 RFA와의 인터뷰에서 북한인권법은 인권 사각지대에 있는 주민들을 위한 법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김성민] 북한인권법안이 헐벗고 굶주리는 북한 주민, 인권의 사각지대에 있는 북한 주민들을 상대로 한 법이기 때문에, 저희는 북한에서 살다 온 탈북자로서 북한 주민들에게 필요한 것이 인권 정신이라고 보고 북한, 우리 고향 땅을 민주주의로 발전시키는 데 필요하다고 보는 거죠.

 

[Bridge]

 

북한인권법이 제정된 지 20년이 흘렀습니다.

 

[박석길] 미국 또는 국제사회에서 장기적으로는 북한에 대한 관심이 많아진 것은 맞는 것 같고요. 북한에 대한 이해, 북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 그리고 북한 사람들의 자유를 위한 움직임과 응원∙지원이 계속해서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런 데에서 희망을 가져봅니다.

 

14년간 탈북 난민 구출 활동을 이어온 미국 북한인권단체 링크(LiNK)의 박석길 한국지부 대표는 미국의 북한인권법이 북한 국내외 의식 변화를 불러일으켰다고 평가했습니다.

 

수잔 숄티 대표는 법안 제정이 인권 향상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고 설명합니다.

 

[수잔 숄티] 한 마디로, 북한인권법이 북한 인권을 전면에 내세웠다는 점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미국 내 북한인권법 제정으로 탈북 난민들의 상황은 180도 바뀌었습니다.

 

제정 이후 현재까지 200명 이상의 탈북민이 난민지위를 인정받아 미국에 입국했습니다.

 

2006년 5월 탈북민 6명이 북한인권법에 따라 처음으로 난민 지위를 인정받아 동남아 제3국을 거쳐 미국에 정착했습니다.

 

2008년 한 탈북민 가족은 중국에서 수감되고 수많은 고행 끝에 미국에 정착했고 그 가족의 딸 조 모 씨는 최근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북한에서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어 꽃제비 생활을 하던 조셉 김 씨는 2007년 난민지위를 인정받아 미국에 정착했습니다. 그는 뉴욕 바드 대학에서 정치학 학위를 취득한 뒤 강연을 통해 북한 인권 상황을 알렸으며 부시 센터에서 글로벌 정책 프로그램 매니저로 일하고 있습니다.

 

북한인권법 발효와 탈북난민 정착에 힘썼던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은 부시 센터를 통해 여전히 북한 주민의 인권상황 개선과 탈북민 지원 정책이 절실하다며 더 적극적인 움직임을 촉구했습니다.

 

[조지 W 부시] 2,400만 명의 북한 주민들이 잔혹한 통치 하에 폭정과 궁핍에 시달리고 있고 북한 내에서 정치범 수용소와 고문은 주민들을 통제하기 위한 일상적인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특히 자유 사회에 살게 된 사람들은, 북한의 인권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야 합니다. 탈북난민을 지원하고 힘을 실어주고, 북한의 정보 차단 장벽을 허물고, 그리고 모든 정부가 인권을 우선시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앵커 멘트]  RFA  자유아시아방송 기획 특집, [미 북한인권법 20주년- 미국에 뿌리 내린 탈북자들] 제1편 "노스코리아메리칸(North KoreAmerican), 그 시작"을 마칩니다. 지금까지 보도에 RFA 자유아시아방송 박수영 기자였습니다.

  

에디터 이진서, 웹편집 김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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