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북한인권법 20주년 기획]➂ 당간부 딸, 할리우드 의상 제작자 도전기
2024.07.03
[앵커] 올해는 미국 북한인권법이 제정된지 2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먹을 것을 찾아 중국 국경을 넘어 방황하던 탈북민들은 자신들을 난민으로 받아주는 미국으로 구름처럼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낯선 땅에 뿌리 내리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은 미국 북한인권법 제정과 탈북민들의 정착이야기를 다섯편에 거쳐 보내드립니다. 오늘은 세번째 순서로,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할리우드 의상 제작자로 살아가는 최한나씨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보도에 정영기잡니다.
경쾌한 록 음악이 흐르는 택시를 타고,
형형색색 이색적인 문화가 공존하는 이민자의 대도시.
세계영화의 고장으로 불리는 할리우드 거리,
한때 북한 대학생들 속에서 “로스엔젤레스의 자랑”이라 불리며,
LA에 사는 재미교포를 둔 친구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그 도시가 눈앞에 펼쳐집니다.
미국에서 두번째로 큰 도시 로스엔젤레스,
미국에서 북한인권법이 제정된 이후 지구 반바퀴를 돌아 이곳에도 탈북민들이 둥지를 틀었는데요.
탈북민 최한나 씨는 89번째로 미국정부로부터 난민인정을 받아 로스엔젤레스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합니다.
[최한나 씨 회사] (재봉기 소리) 드르륵, 드르륵…
기자가 할리우드 의상 제작자로 일하는 최한나씨를 찾은 것은 6월 초.
서부의 낮 온도는 섭씨 30도를 오르내리고 아스팔트를 뜨겁게 달구고 있습니다.
최씨가 일하는 작업장에서는 분주히 돌아가는 재봉기 소리가 요란합니다.
얼핏봐도 평범해 보이지 않는 옷이 수백벌이나 옷걸이에 걸려있습니다.
최한나 씨는 주문 시한을 맞추기 위해 점검을 합니다.
[최한나씨] 이 옷은 디즈니랜드라고 하는 미국의 유명한 그런 놀이동산이에요.
거기서 (연기)쇼랑 할 때 배우들이 입는 옷이고, 이 자켓은 할리우드 영화배우들이 입는 옷이에요.
[기자] 이건 양복이네요.
[최한나] 양복이예요. 천질은 영화 배역에 따라서 다 다른데, 주인공마다 옷의 재질도 다 틀려요. 양복지 옷감들이 다 다르듯이 다 달라요.
벽을 마주하고 일렬로 배치된 재봉기들,
적당히 잘라진 천조각들이 한나씨의 능숙한 손놀림으로 제봉틀에서 제모습을 갖춰갑니다.
옷걸이에는 남자 양복과 서양 숙녀 전통의상, 인디언들이 입는 망토도 걸려 있습니다.
[최한나] 이런 걸 한두 벌 만드는 게 아니에요. 예를 들어 총에 맞는 그런 역을 한다고 하면 (손으로 가리키며)여기에 총에 맞았잖아요. 그러면 구멍까지는 안 뚫려도 아마 피 자국이 튀겠지요, 총에 맞으면 피가 튀는 그런 걸 연기를 했는데, (감독이)연기가 마음에 안 들었다고 하면 다시 찍어야 된단 말이예요. 그러면 옷을 또 다시 바꿔 입고 찍어야 되요. 그래서 사이즈별로 막 전번에는 약 48벌까지 만들었어요.
일상복이 아니라 영화나 행사에 쓰이는 옷이라 항상 고객의 주문이 달라서 하루 종일 일해도 지루하지 않다고 합니다.
[최한나씨] 한 사람이 입을 것, 두 사람이 입을 거 뭐 하여간 또 재미있어요. 옷 스타일이 여러 가지 형태인데,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이 다 각양각색이잖아요. 디자이너가 영화 시나리오를 보고 “아, 이 배역에는 이 옷을 입히면 되겠다”고 결정하고, 디자인해서 우리 회사에 와서 맡기는 거죠. 그러면 우리가 만들어서 주는 거예요.
세계 영화산업의 중심지 할리우드(Hollywood)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중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영화 촬영이 적합한 할리우드로 미국 동부의 영화산업이 옮겨오기 시작하면서 이곳은 미국을 넘어 세계 영화산업을 대표하는 거점이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수많은 영화들이 제작되고, 많은 유명배우들이 탄생했습니다. 할리우드가 미국 영화와 텔레비전계를 대표하는 대명사로 쓰이고 있는데, 그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들의 옷을 최씨가 만드는 겁니다.
[최한나씨] 어떤 영화는 3년이 걸려 찍는 것도 있대요. 그러면 배우의 몸이 불었다 줄었다 한단 말이에요. 그럼 그에 따라 옷을 만들어야 되고 이런 영화를 하나 잡으면 회사는 먹고 살지요.
[할리우드 영화 ‘Mission impassible’ 일부 녹취]
할리우드 영화는 영웅주의와 권선징악, 즉 나쁜 악당과 싸우는 영웅적 인물이 처음에는 얻어맞다가 결국 승리하는 장면이 많아 보는 이들이 통쾌해 합니다. 막대한 제작비가 들어가는 할리우드 영화는 흥행에 성공만 하면 전 세계로 팔려서 영화 제작에 동원된 배우들은 물론 최한나씨가 일하는 회사도 큰 수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최한나씨 집]
[최한나씨] 자, 여기가 우리 집입니다. 하하하 이 아파트가 지어진지 17년 되었어요. 지은지 1년만에 신청해가지고 한달만에 입주 허가가 났어요. 자격이 되는 사람들 많은 중에 제가 뽑혔어요. 저는 이 집이 천국이라 생각해요.
그러면, 최한나씨는 어떻게 할리우드 의상 제작자로 되었을까요?
[최한나] 저는 우리 언니가 사는 평양에 자주 놀러갔어요. 부부장급 아파트니까 중앙검찰소 다니는 사람도 있고, 뭐 보위부 사람들의 옷을 내가 해줬죠. 내가 하루에 만들 수 있는 양이 두 벌 인데, 하루에 와서 맡기는 사람은 5명이 맡겨요. 그러면 5개 다 못 하니까 계속 옷이 쌓이잖아요. 그러니까 자기 옷을 먼저 해달라고 뇌물을 먹이는거예요.
북한에서 김일성 김정일에게 보내는 ‘충성의 편지’ 필사원으로, 양복점 재단사로 잘 나가던 최 씨가 인생의 변곡점에 달한 것은 아버지가 사망한 다음부터였습니다. ‘고난의 행군’으로 불리는 1990년대 중반,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고, 믿었던 아버지까지 사망하게 되자 가세는 갑자기 기울었고 두만강을 건너야 했습니다.
[최한나씨] 우리 아빠 엄마 고향이 중국이에요. 우리 이모가 중국에 있는데 이모가 중국 조선족으로 살고 있죠. 거기로 가니까 처음에 저를 교회로 한 3일 동안 데리고 갔어요. 그때 마침 미국에 있는 유명한 목사님이 와서 그 부흥집회를 한대요. 이모가 “너 참 잘 왔다”라고 하면서 데리고 갔는데, 처음에 목사님 설교에 무슨 “요르단강물에 일곱 번 들어갔다 나오니까” 뭐 어쩌고 저쩌고 그랬는데 하나도 귀에 안 들리더라고. 우리가 북한에서 주체사상을 배우기는 “자기 운명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며, 자기 운명을 개척하는 힘도 자기 자신에게 있다” 이렇게 배웠잖아요. 내 운명을 내가 개척하지 무슨 하나님인가고. 그냥 지금은 “아멘 아멘” 하지만 그때는 “아니 아니” 했어요. 팔짱을 떡 끼고 앉아서.
최씨는 한국이나 미국가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친척의 말을 듣고, 미국으로 가는 탈북민 대열에 합류합니다.
[최한나씨] 3일 전까지만 해도 아니아니하던 내가 우리 북한 탈북자 일행9명이 지금 떠나려고 하는데 집사님이 일행을 손 잡고 기도하더라고요. 그때 그 기도가 하나님이라는 분이 이런 심부름꾼들을 시켜서 우리를 인도하는구나 하는 그런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리고 그 기도의 응답으로 우리가19시간 차를 타고 북경까지 갔어요. 그런데 안전한 마음이 드는 거예요. 가는 동안에 경찰이 증명서 검열하는 데 무사통과로 갔어요. 그 기도의 힘이었던 것 같아요.
버스와 기차를 갈아타며 도착한 곳이 중국의 수도 베이징의 한 민박집
[최한나씨]: 조선족 교회에 찾아갔는데, “여기에 모인 우리” 이 찬양을 막 부르는데 경찰들 한 20명이 쫙 들어오더라고. 찬양 딱 중지시키고 증명서 검열하는 거예요. 북한 사람 잡으러 온 거지. 나를 잡으러 온 거란 말이예요. 그때 집중 단속 기간이었어요.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앞둔 중국이 탈북민들을 비롯한 외부인들을 체포하기 위해 실시한 조사였습니다. 하지만 위기 일발의 순간 급히 떠오른 것은 민박집 주인의 전화번호였습니다. 민박집 주인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최씨는 옆사람의 손전화를 빌려 민박 주인에게 걸었습니다 민박집 주인의 주민등록번호를 알아낸 그녀는 그 번호를 중국 경찰에게 제시하고 겨우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비행기 소리]
1년 4개월이라는 제3국에서의 대기 기간을 보내고 난민신청을 받아 미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최한나 씨는 새로운 희망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할리우드 표지물이 보이는 천문대]
[최한나씨] 할리우드, 저기 사인이 보이지 않나요? SPY Machine 하하하…
천문대 망루에서 한눈에 바라보이는 로스앤젤레스 도시.
두팔을 벌여도 다 안을 수 없을 만큼 대도시가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최한나씨] 처음에 와서 기도라기보다 그냥 하소연했어요. 더 살기 싫다고 내가 고향을 떠날 때 돈 벌려고 떠났는데 돈도 못 벌고 그렇게 있으니까 살 의미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진짜 하소연하다시피 3일을 밥술이 올라가지 않아서 안 먹고 버티고 하소연 했어. 내 가족은 굶어 죽었는지 어쨌는지 모르는데, 눈 딱 감고 기도하는 데, 하나님이 그날의 이 환상을 보여주시지 않았으면 내가 그날 죽었어.
간절한 기도가 이뤄졌던 것일까요?
[최한나씨] 3일째 되는 날 밤 11시 때 하나님이 딱 이 모습을 보여주셨어요. (두 손 벌려 도시를 가리키며) 이 모습을, 저 다운타운에 저기는 내가 할 일자리가 많은 곳이란 말이에요. 이 미국에서 뉴욕하고 LA에서 미 전역에 나가는 옷들을 만든단 말이에요.
최한나씨는 매주 천문대를 등산하면서 미국 생활은 매일 새로 태어나는 느낌을 준다고 합니다.
[최한나씨] 나는 이 미국에 와서 너무 행복하고, 진짜 나는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행복한 여자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어요.
[송제호 탁구교실 앞마당]
[최한나씨] 여기가 바로 송재호 탁구 교실입니다.
[기자] 예 여기가 LA에서 유명한 가요?
[최한나씨] 네, 관장님이 좋아가지고, 저는 일 끝나고 바로 탁구장으로 오는 거예요. 건강할 때 건강을 지켜야지.
[탁구 치는 소리]
로스앤젤러스 한인타운에서 ‘송제호 탁구교실’을 운영하는 송제호 관장의 말입니다.
[송제호 탁구실 관장] 연말에 크리스마스 파티 겸 시합을 했을 때 우승도 하고, 아주 그냥 한나씨가 분위기 메이커입니다. 막 춤도 잘 추고 시합도 우승하고, 굉장히 아주 그냥 엔돌핀 돌게끔 해줍니다.
기쁨이 넘치는우리 한나 씨입니다.
미국북한인권법은 2004년 10월 18일 제정되었고, 그 동안(2008, 2012, 2018) 세차례 재승인됐습니다. 이법은 현재 의회에서 재승인을 받기 위해 계류 중에 있습니다. 이 법에 의해 북한 난민으로선 89번째로 미국에 온 최한나씨는 자신이 입국한 중국 주재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을 통한 북한난민 입국 통로가 막힌데 대해 아쉬움을 표시했습니다.
[노래방 소리]
최한나씨는 주말이면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을 통해 함께 입국한 탈북 동료들과 만나 노랫방에도 가고 고향의 회포도 나누고 있습니다.
[최한나씨] 나는 진짜로 미국에 유학왔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북한에서 못본 것들을 미국에서 많이 보잖아요? 많이 배워가지고, 그래가지고 있다가 통일이 되면 북한에 가서 써먹으려고요. 한마디로 말해서 나는 유학왔다, 배우러 왔다 이런 마음으로 산다는데요.
작지만 당찬 최한나 씨의 모습에서 어떤 역경이 닥쳐도 흩트려지지 않을 자신감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앵커 멘트] RFA 자유아시아방송 기획 특집, <미 북한인권법 20주년- 미국에 뿌리 내린 탈북자들”
지금까지 제3편 “당 간부 딸, 할리우드 의상 제작자 도전기>였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헤드 쉐프, 즉 책임 초밥 요리사로 살아가고 있는 샘 현씨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지금까지 보도에 RFA 자유아시아방송 정영기자였습니다.
에디터 이진서, 웹편집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