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청소년 ‘농활’ 동행취재] 어울림의 가능성을 보다

탈북 청소년과 한국의 여고생들이 지난 주말 1박2일 일정으로 경기도 양평에서 농촌 체험 활동을 함께 했습니다. ‘서로 한 번 마음을 열고 친해져 보자’는 게 목적인데요. 성장배경이 다른 이들이 과연 서로의 벽을 허물고 어울릴 수 있을까요?
서울-박성우 parks@rfa.org
2009.10.14
youth activity 305 한국의 여고생들이 탈북 청소년과 함께 지난 주말 1박2일 일정으로 경기도 양평에서 농촌 체험 활동을 하고 있다.
RFA PHOTO/ 박성우
서울의 박성우 기자가 동행 취재했습니다.

지도교사: 두 줄! 두 줄! 두 줄로 이동할게요.

경기도 양평에 있는 농촌 체험 마을. 가을걷이를 기다리는 벼가 머리를 숙이고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한적한 곳입니다.

도시 아이들이 농촌 생활을 체험할 수 있도록 만든 이곳에 탈북 청소년 8명과 경기여고 학생 10명이 모였습니다.

지도교사: 들어가서 짐을 놔두고, 점심 먹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여기 모이는데…

이들 중 대부분은 지난 8월 중순에 이미 만난 적이 있습니다. 한국에 있는 남북 청소년의 교류를 위해 시민단체인 <북한인권시민연합>이 마련한 특별 활동을 통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영화 한 편과 음악 공연을 같이 본 게 전부였던 당시 만남이 아쉽다며 이들은 9월 중순에 다시 모였고, 내년 2월까지 거의 매주 토요일마다 만나기로 약속했습니다.

이들은 첫 번째 행사로 선택한 1박2일 일정의 농촌 체험 활동을 통해 이번엔 “작정을 하고 한 번 친해져 보자”고 다짐합니다. 그래서 새로 온 친구들에게 서로를 소개하면서도 좀 더 재밌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경기여고 학생: 제 옆에 있는 현진이, 현진아 일어나. 네, 이름은 김현진이라고 합니다. 현진아, 소개해. (웃음)

탈북 남학생: 혹시 제 이름 뭔지 아세요? 와! 천재시네요. 그리고 제 나이는 여러분보다 한 살 많은 거 아시죠? 1년 선배입니다.

하지만 지금껏 살아온 배경이 완전히 다른 이들이 1박2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과연 잘 어울릴 수 있을까. 그 어울림을 위해서 이들은 이날 하루를 논과 밭에서 함께 땀 흘려 일하고 개울에서 신나게 놀아보기로 했습니다.

지도 교사: 우리가 여기서 벤 벼를 저쪽으로 가서…

농촌 체험의 첫 순서는 벼 베기. 아무래도 농기구에 익숙한 건 북에서 온 청소년들입니다. 농촌 일을 해 본 적이 없는 남한의 17세 여학생들은 북에서 온 19살의 한 남학생에게서 어떻게 낫을 잡는지부터 배웁니다.

탈북 남학생: 이렇게 밑에 이 날을 대고, 이렇게 당기면 되거든요. 한번 해 보세요. 그렇게 비벼요. 옳지. 쑥 당기세요. 네.

여고생들:
우와!

고구마밭에서도 이 남학생은 인기가 최고입니다. 서툰 호미질로 손가락만한 고구마밖에 못 캐던 여고생들은 이 남학생이 능숙하게 땅을 헤집으며 씨알 굵은 고구마를 캐내는 걸 보고 함성을 지릅니다.

탈북 남학생: 그냥 이렇게 뿌리를 따라서 만져보고 이렇게 쭉 하면 알 수 있는데…

경기여고 학생1: 우리는 안되던데.

경기여고 학생2: 우와 그냥 나와.

경기여고 학생1: 진짜 신기해.

이 남학생은 신이 났는지 자신이 캐낸 팔뚝만 한 고구마를 여학생들에게 모두 줘 버립니다.

경기여고 학생1: 우리끼리만 캐면 이거 못 캐. 오빠 고마워요.

기자: 다 줘버리면 어떻게 해요?

탈북 남학생: 괜찮아요. (웃음)

물놀이 시간은 이들이 함께 몸으로 부대낄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네 개의 뗏목에 나눠 탄 학생들은 이리 저리 뗏목을 건너다니더니, 나중엔 서로를 물에 빠트리며 즐거운 함성을 지릅니다.

신나게 놀고 난 다음 학생들은 한층 친해진 모습입니다. 저녁식사를 한 뒤 방에 둘러앉은 학생들은 서로 말장난을 치기도 합니다.

학생들: 저지붕위 콩깍지는 깐 콩깍지냐 안 깐 콩깍지냐… (웃음)

서로 속 깊은 이야기도 나눕니다.

경기여고 학생: 북한에서 뭐 힘들었던 건 없었어?

탈북 남학생: 있지, 왜 없었겠어?

특히 남한 여고생들은 북한에서의 생활과 탈북 과정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입니다.

탈북 동기를 묻는 질문에 북에서 온 한 남학생이 “북한이 좋았으면 왜 내가 그 고생을 하며 여기 왔겠냐”고 에둘러 말하자 여고생들은 숙연해지기도 합니다.

탈북 남학생: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요. 공부할 때 가장 힘든 게 뭐예요?

북에서 온 학생들도 경기여고 학생들에게 교과목 중 뭐가 제일 힘드냐는 질문이나 학교에서 ‘왕따’, 그러니까 따돌림을 당할 땐 어떻게 대처해야 하냐는 질문을 쏟아내기도 합니다.

그렇게 새벽을 지새우며 남북 학생들은 서로에 대해 조금씩 조금씩 익숙해져 갑니다.

아침이 밝았습니다. 식당으로 가는 길. 학생들에게서 달라진 모습이 발견됩니다. 하루 전만 해도 남한 학생들은 몇몇을 제외하곤 대부분 자기네들끼리 이동하고 식당에서도 끼리끼리 모여앉았습니다.

하지만 이젠 북에서 온 학생들과 섞여서 이동하고 밥도 같이 먹습니다. 1박2일의 단체 활동이 남북 청소년들의 작은 변화를 이끌어낸 겁니다.

식사를 끝낸 다음 학생들은 지난 1박2일에 대해 자체 평가를 하기 위해 다시 모여 앉았습니다.

남한 학생들과 뭔가를 함께 하고 진솔하게 이야기할 기회를 가졌다는 건 탈북 청소년들에게 특별한 기억으로 각인됐습니다.

탈북 남학생1: 남한 애들하고 좀 친해지니까 좀 마음이 별라고 그래요. 재밌었어요.

탈북 남학생2: 농촌에 와서 벼도 베고 이렇게 누나들하고 사이좋게 지낸 게 처음인 것 같고요. 이렇게 속마음을 터놓고 말해서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탈북 청소년들의 솔직한 발언도 쏟아집니다. 밤을 새우며 대화를 나눴지만, 여전히 뭔가 부족함을 느낀다는 겁니다.

탈북 여학생1: 아직 뭐 그렇게 친해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서 그냥 좋아요.

탈북 남학생3: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여러분들과 이야기를 잘 못한 거 같아요. 그래서 아직 친해지질 못하고, 제 마음을 표현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좀 더 시간이 필요한 거 같아요.

남한 학생들도 아쉬움은 느낍니다. 1박2일만으론 마음속의 벽을 모두 허물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북에서 온 청소년들과 태어나서 처음으로 어느 정도 마음을 열고 대화를 나누면서 남한 청소년들은 탈북자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많이 바뀌어 있음을 발견합니다.

기자: 이번 1박2일을 평가해 보자면?

경기여고 학생: 진짜 제가 너무나 무지했다는 걸 알 수 있는 기회였어요.

기자: 어떤 면에서요?

경기여고 학생:
저는 광이 오빠와 친했어도 일정한 한계가 있었어요. 그러니까 내가 이 오빠랑 아무리 친해도 ‘오빠가 북한에서 어떻게 넘어왔느냐, 이런 걸 질문하는 단계는 되지 말자, 일정한 한계를 지니자’ 이랬는데. 오빠에게 한 번, 많이 친해졌으니까 말을 해 봤어요. 그랬더니 오빠가 아주 서슴없이 말을 해 주셨어요. 너무나 가슴이 아팠어요. 제가 하나도 몰랐던 거잖아요. 저는 ‘그냥 북한에서 38선을 넘어온다’ 아니면 ‘중국을 통해서 건너 온다’ 이런 식으로만 알았어요. 저는 (탈북을) 너무나 쉽게 생각했어요. ‘그냥 한 달 정도 고생하고, 너무 힘들겠구나’ 이렇게 너무 간단하게 생각했던 거에요. 그런데 이번 기회를 통해서 ‘내가 너무나 관심이 없었구나’ 이런 생각에 저를 다시 보게 됐어요.

기자: 자신을요?

경기여고 학생: 네, 정말 다시 보게 됐어요.

지난 1박2일 동안 이들은 경기도 양평의 한 농촌 마을에서 작은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남과 북의 청소년들은 한국 땅에서 과연 잘 어울릴 수 있을까. 그 해답을 놓고 이 행사를 마련한 <북한인권시민연합>은 “아직은 절반의 성공”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남북 학생들은 이번 주 토요일 다시 모입니다. 그리고 남과 북의 음식을 함께 만들며 서로의 고향에 대해, 그리고 서로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가는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

경기도 양평에서 RFA 자유아시아방송 박성웁니다.
댓글 달기

아래 양식으로 댓글을 작성해 주십시오. Comments are moder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