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절이 없는 북한

장진성∙탈북 작가
2013-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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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를 맞아 조선인민군,조선인민내무군 장병들과 각계층 근로자들,청소년학생들, 해외동포들이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동상을 찾아 참배하고 있다.
8.15를 맞아 조선인민군,조선인민내무군 장병들과 각계층 근로자들,청소년학생들, 해외동포들이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동상을 찾아 참배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북한인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북한의 8.15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남북 분단을 실감하게 하듯 8.15를 남한에선 광복절이라고 하고, 북한에선 해방절이라고 합니다. 광복절의 의미는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어 대한민국이 독립하였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일제의 강점으로부터 벗어난 날과 독립국으로서 정부가 수립된 날을 기념하기 위해 1949년 10월 1일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매년 8월 15일을 광복절이라 하고 국경일로 지정하도록 하였습니다. '광복'이란 '빛을 되찾다'는 뜻으로서 잃었던 국권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반면 북한은 해방절이라고 하는데 이는 단순히 일제식민지에서 해방됐다는 의미로만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북한은 전 세계가 아는 역사적인 이 8.15마저 김일성 신격화로 왜곡하고 있습니다. 소련군에게 일본이 항복했는데 마치 김일성이 나라를 해방시킨 구세주인 듯이 말입니다. 원래 북한도 1963년까지는 8.15일을 소련에 의한 일제패망일로 규정하고 친소주의를 합법화하는 국가명절로 기념했습니다.

2012년에 탈북한 김영운 씨는 70세의 노인이십니다. 그 분은 50년 전 양강도 혜산에서 김일성이 참가한 8.15 해방 기념보고회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으며 그때 불렀던 해방의 노래를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양강도 혜산에서 8.15 해방 기념행사가 크게 열렸다. 평양에서 김일성이 내려오고 소련 사람들도 많이 참가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상임위원회 내각 부수상인 이주현이 내려와 행사를 지도하였다. 혜산이 생긴 후 처음 으로 집단체조를 했고, 김일성도 연설하고 소련 대표도 연설하였다."고 증언했습니다. 김영운 씨는 "그땐 혜산이 온통 꽃 바다로 장식되고, 조소문화회관에서는 소련군대의 업적을 전하는 공연을 진행하였다. 소련이 없으면 오늘의 해방도 없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김일성과 스탈린 초상화가 곳곳에 걸려있었고 조소친선을 형상한 유화들이 거리마다 내걸렸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1963년 당시 거리를 행진하며 불렀던 8.15해방 노래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쏘베트 용사들이 찾아준 내 나라 영광 찬 강산을 낙원으로 꽃폈네 항일전통 빚내며 천리마로 달리니 5개년의 큰 계획 앞당겼다네 아 ~ 슬기로운 이 나라 자유의 땅 우리는 언제나 소련과 함께 있네’ 그러던 북한은 1963년 이후 소련에 대한 업적 내용을 지우기 시작했습니다. 각 도마다 세워졌던 조소기념탑도 소리 없이 사라져버렸고 문화회관 옆에 위치했던 조소문화회관도 하나 둘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63년 후부터는 해방의 은인이 소련이라고 거리마다 가득했던 구호 판들도 더는 볼 수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이상하게 해방 절만 다가오면 기업 소마다 당위원회 조직부서들이 직장별• 작업반별 정치강연을 조직했습니다.

내용인즉 오늘의 해방은 김일성 항일무장투쟁의 승리로 이룩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민을 일제의 억압 속에서 해방시킨 것은 김일성이라고 주입을 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당시 대부분 북한 주민들은 해방을 소련군의 업적으로 알고 있었고 또 정권도 그렇게 칭송했었는데 갑자기 해방절 18주년 행사 이후에는 소련이 역사 속에서 서서히 사라지는데 대해 의아해했습니다.

북한 주민들이 종전에 알던 해방과 지금까지 세뇌 받은 해방의 시작은 이렇듯 1963년 전후로 갈라졌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 역사적 배경은 이러합니다. 당시 1962년 미국의 대통령 존 케네디는 소련이 쿠바에서 미사일 기지를 세우고 있다며 이를 중단하지 않을 경우 전면전을 벌일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소련 내 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반대파는 핵 기지의 건설을 취소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군부를 중심으로 한 강경파는 핵 기지의 건설을 강행해야 한다며 대립했습니다.

흐루쇼프는 미국과의 전면전을 피하기 위해 쿠바로 향하는 수송선단을 돌리도록 지시 했고, 이로 인해 그는 군부를 비롯한 강경파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었고, 당내에서도 미국과 타협했다는 부정적인 인상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흐루쇼프가 서방과의 대결 보다는 공존을 외치자 공산주의 진영의 다른 한 축이었던 중화인민공화국의 마오쩌둥은 이를 규탄하고, 흐루쇼프를 "수정주의자"라고 비난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양국관계는 급속하게 냉각되었으며, 전 세계의 공산국가들이 친 소련과 친 중국 국가로 나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쿠바위기에서 정권불안을 느끼던 김일성은 바로 공산국가들의 이 분열 시점에서 친소공산권보다 친중공산권을 선택하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하여 흐루쇼프를 수정주의자로 맹비난하는 것과 동시에 소련의 업적을 지우는 작업에 돌입하게 됩니다. 대신 그 빈 자리에 엉뚱하게도 자기의 신격화를 조작해 끼워 넣는 선전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때로 말하면 중국에서 모택동의 절대적 영도체계를 신성화하던 시점 이어서 북한 내 역사왜곡도 어느 정도 용인되던 때였습니다.

더구나 친소사대주의 8.15보다, 친중사대주의 항미원조, 즉 7.27일 더 부각시키는 김일성의 선택을 중국 공산당으로서는 은근히 즐겼던 것입니다. 결국 김일성의 항일역사 왜곡은 김정일 후계체계로 접어들면서 국가적인 선전으로 고착되게 되었고, 그렇게 이어진 수 십 년 간의 세뇌 속에서 북한 주민들은 더 철저히 기만당 할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 흐루쇼프의 실각도 크게 작용했습니다. 흐루쇼프는 스탈린 식의 유혈숙청은 실시하지 않았으나, 그가 경제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실시한 정책은 당내의 구조와 인력상 많은 변화를 야기하였습니다. 이러한 변화로 당내 주류가 그에게서 등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병력 감축, 핵 무기중시의 군사 정책도 군부의 반감을 얻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쿠바 위기를 둘러싸고 보여준 흐루쇼프의 모험주의는 이러한 대외 온건파들까지도 그에게 등을 돌리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강경파와 온건파 모두의 지지를 잃고 그의 입지는 흔들렸습니다. 그리하여 브레즈네프, 셸레핀, 국가보안위원회의 세미차스트니 등은 흐루쇼프를 실각시키기 위한 계획을 몰래 꾸몄습니다.

1964년 10월 흐루쇼프가 휴가중일 때, 행동을 개시하여 쿠바위기, 중소분열, 농업정책 실패의 과오를 들어 공산당 최고간부회의 특별회의 소집을 요구했고, 이때 흐루쇼프가 도착하자 최고간부회의는 흐루쇼프에 대한 불신임 투표를 하여 가결시켰습니다. 10월 15일 흐루쇼프는 당과 정부에서 모두 사임했는데 이후 소련의 내부문제와 북한에 대한 중국의 독점적 영향력이 맞물려 결국 김일성의 역사왜곡은 북한에 완전히 고착되게 된 것입니다.

오늘 날 북한 주민들은 인권 해방의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 북한이기에 해방절은 1963년에 사라졌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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