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과 조선 건국자 이성계

김주원∙ 탈북자
2021-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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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과 조선 건국자 이성계 태조 이성계의 무덤인 건원릉.
연합

북한 동포 여러분, 북한에서는 김씨왕조의 역사인 김일성과 김정일의 혁명역사 교육에 치중하다보니 고려역사나 조선시대 이씨왕조 역사에 대해서는 수박 겉핥기식으로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은 청취자 여러분들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왜 북한당국이 이전의 봉건국가에 대한 역사에 대해 구체적으로 가르치지 않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못했을 거라고 봅니다. 바로 고려왕조나 이씨 조선왕조를 알면 그 시대의 봉건국가와 같은 북한의 김씨 왕조의 모순점을 북한주민들이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씨 조선왕조의 탄생은 지금으로부터 660년 전인 1361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13세기 몽골제국이 팽창하면서 중국과 지금의 우리나라 함경남북도와 자강도 일부 지역은 몽골의 지배하에 놓이게 됩니다. 1335년 함경도 지역이 몽골제국의 지배권에 들어있던 시기에 함경남도 영흥군, 지금의 금야군에서 태어난 이성계는 무예가 뛰어났고 수하에 활을 잘 쏘고 말을 잘 타는 끌끌한 무사들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1360년대 10만에 달하는 홍건적에 의한 고려의 수도 개성 함락, 원나라의 사촉을 받은 덕흥군과 최유의 1만 군대의 침략을 물리치고 고려조성을 지켰고 여진족 삼선과 삼개의 난을 평정해 함경도 지역의 안정을 되찾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이성계는 황산대첩 전투에서 왜적들을 물리쳐 그 명성이 함경도는 물론 전 고려 봉건관료들에게도 잘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원나라의 공주인 노국대장공주와 정략결혼하면서 고려의 31대 왕위에 오른 공민왕은 1370년대에 이르자 선친들의 친원정책, 한마디로 몽골제국에 대한 사대주의 정책을 배척하였고 젊은 봉건관료들로 구성된자제위라는 관청을 설립하였지만 결국 자제위의 홍륜과 내관 최만생 등에 의해 살해됩니다.

이때부터 한반도의 통일국가로 근 500여 년간 존재하여 오던 고려는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고 공민왕이 살해되고 왕위에 오른 우왕과 창왕도 자기의 왕권을 마음대로 행사할 수 없었습니다.

고려 32대 왕인 우왕 때에 우군도통사였던 이성계는 좌군도통사 조민수와 함께 북쪽 오랑캐들을 징벌하기 위해 동북지방으로 향하다가 신의주와 단둥사이에 있는 섬인 위화도에서 부대를 돌려 다시 개성(개경)으로 돌아왔습니다.

당시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개경)으로 돌아온 이성계는 고려의 최고 군사 권력자인 최영을 제거하고 같은 시기에 우왕을 왕직에서 폐위시켰습니다. 그리고8살인 우왕의 아들 창왕을 왕위에 올려 세우죠. 한마디로 어린 창왕을 허수아비 왕으로 만들어 놓고 고려를 완전히 붕괴하려고 꾀했던 것입니다.

이 시기 고려의 실제 권력가로 부상한 이성계는 창왕이 왕위에 오른 지 1년이 지난 1389년에 창왕이 부왕인 우왕의 아들이 아니라 중이었던 신돈의 아들이라는우창비왕설을 들고 나와 9살인 창왕마저 폐위시킵니다.

이성계 일당들은 우왕과 창왕을 폐위시키고 이들을 강원도 강릉과 강화도에 유배를 보내고 나서 고려 20대 왕 신종왕의 7대손인 공양왕을 왕으로 등극시키죠. 공양왕은 이성계의 압력으로 선대 왕들인 우왕과 창왕을 처형하도록 하사하였지만 그 마저도 이성계에게 왕의 자리를 빼앗기고 2년 뒤에는 강원도 삼척에서 살해되고 맙니다.

결국 이성계는 마지막 고려왕들인 우왕과 창왕, 공양왕을 차례차례 처형하고 그것도 모자라 왕족인 왕씨들을 씨를 모조리 멸족시키려고 하였죠. 당시 고려 왕조를 떠받들고 있던 중앙관리들과 대신들은 쇠퇴한 고려를 다시 재건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왕조를 세울 것인가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였습니다.

이성계의 새로운 왕조 건국을 반대한 대표적인 사람이 고려의 최고의 학자로 꼽히는 정몽주였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들은 개성에 있는 선죽교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고려왕조를 붕괴시키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는 이성계의 뜻을 따르던 정도전과 조준이 정몽주에 의해 귀양 가는 것을 목격한,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마지막으로 정몽주의 속을 떠보려고 그를 만나죠. 이성계의 5번째 아들이자 조선 제3대 왕인 태종 이방원와 정몽주는 술상을 마주하고 시로 자신들의 속내를 드러냈는데 이를 하여가(何如歌)와 단심가(丹心歌)라고 합니다.

이날 둘 사이의 만남은 고려왕조를 뒤집어 업고 새로운 왕조인 이씨왕조를 세우려는 이성계의 뜻을 받들었던 이방원과 고려 왕조를 끝끝내 고집하려는 정몽주와의 대결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이방원이 술 한 잔을 정몽주에게 따라주면서 건넨 시 하여가(何如歌)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백년까지 누리리라였습니다. 이는 낡고 쇠퇴해진 고려왕조대신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는 이성계의 뜻을 따를 것은 권유하는 내용이었죠.

이에 정몽주는 술잔을 받아들고는 화답시인 단심가(丹心歌)로 자신의 의사를 드러냈습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이 시는 절대로 고려 왕조를 붕괴시키려는 이성계 일파와 뜻을 같이 할 수 없다는 정몽주의 의지를 보여준 시라고 할 수 있죠. 정몽주를 더 이상 설득할 수 없다고 생각한 이방원은 심복인 조영규 등을 시켜 정몽주를 피살하도록 합니다.

북한에서 국보 문화유물 제159호로 지정된 선죽교는 현재 개성시 선죽동에 위치한 석교입니다. 개성 남대문에서 동쪽으로 약 1km거리의 자남산 남쪽 개울에 있는 선죽교(善竹橋)는 원래 선지교(善地橋)라고 불리다가 정몽주가 피살되던 날 밤 다리 옆에서 참대가 솟아나왔다고 하여 선죽교라고 불렸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고려왕조의 마지막 충신 정몽주의 죽음 이후로 이성계 지지 세력의 새로운 이씨왕조 건립은 급물살을 타게 되죠. 이성계는 마침내 1392 7월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을 강원도 원주로 추방하고 새로운 왕조를 선포하고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성계는 즉위초기에는 고려 국호를 그대로 쓰다가 1년 뒤인 1393 3 15일부터 조선(朝鮮)이라는 새 국호를 쓰도록 했습니다. 몽골제국 원나라의 쇠퇴몰락과 때를 같이 하여 중국에 새로 세워진 왕조국가인 명나라의 출발과 함께 우리나라에는 고려왕조 대신 새로운 왕조국가, 조선이 세워진 것입니다.

이성계는 고려 500여 년간, 왕족으로 번성한 왕씨 가문이 이씨왕조 조선에 걸림돌이 된다고 보았습니다. 조선 개국 초기에는 왕씨들을 거제도와 강화도 등으로 귀양 보냈다가 후에는 살해하거나 바다에 익사시켜 죽였습니다. 그때부터 왕가들은 한자 임금 왕()과 비슷한 한자인 구슬 옥()자나 거문고 금(), 말 마(), 밭 전(), 온전할 전() 등의 다른 성으로 바꾸어 숨어살면서 혈통을 유지했다고 합니다.

이씨왕조가 피로 얼룩진 숙청과 처형으로 시작된 것처럼 북한의 김씨왕조도 무자비한 숙청으로 세워졌습니다. 무관이었던 이성계와 마찬가지로 1940년대 해방 전 5년 동안 소련군 극동사령부 소속의 88저격여단 소련군 장교로 복무하다가 해방 후 북한의 최고 권력자로 부상한 김일성은 김씨왕조의 건국을 위해 자기와 뜻이 다른 사람들을 마구 처형하였죠. 그 숙청 수법이 너무도 이씨왕조와 비슷하기에 앞으로 이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들은 더 자세히 소개하기로 하고 오늘 방송은 여기에서 마칩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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