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시기의 연호와 북한의 주체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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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동포 여러분, 봉건사회의 유물 중에는 달력을 정함에 있어서 당대 왕의 집권연도를 표시하는 연호를 정하였다는 것은 역사시간에 배워서 잘 아실 것이라고 봅니다. 연호는 국가주권이 한 사람에게 있고 왕이나 황제 등 군주가 세습적으로 국가 원수가 되는 나라들에서 사용되던 달력을 말합니다.

결국 연호는 봉건사회 같은 낡은 사회의 유물로 신성화된 왕의 우상화를 위해 사용된 달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낡은 달력 연호를 북한에서는 영원한 김씨왕조의 세습을 위해 지금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조봉건시대 등 낡은 시대의 연호와 지금의 북한의 주체연호를 비교해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광개토왕비를 보면 광개토왕이 당시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삼국시대에도 연호가 존재했음을 말해줍니다. 고구려에서는 건흥, 연가, 영강 등의 연호를 사용했고 백제에서는 태화(泰和), 신라에서는 건원(建元)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는 것은 옛 기록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발해시기 고왕(高王) 대조영(大祚榮)은 천통(天統)이라는 연호를 사용하게 했고 그 이후로는 역대 왕들이 자기의 독자적인 연호를 제정하여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후삼국시대의 궁예는 국호를 마진(摩震)이라 부르도록 했고 무태(武泰), 성책(聖冊)이라는 두 개의 연호를 사용했으며 다시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개명하고는 수덕만세(水德萬歲), 정개(政開)라는 두 개의 연호를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고려시기에 들어와 태조 왕건은 천수(天授)연호를, 고려의 4대왕 광종(光宗)은 광덕(光德), 준풍(峻豊)의 연호를 사용하도록 했죠. 그리고 고려 중엽이었던 1135년에 승려였던 묘청(妙淸)이 수도를 개경(개성)에서 서경(평양)으로 옮겨야 한다는 서경천도를 내세우며 반란을 일으켜 대위(大爲)라는 나라를 세우고 연호를 천개(天開)라고 부르도록 하였습니다.

고려가 붕괴되고 태조 이성계에 의해 이조왕조인 조선이 건국되면서 조선왕들은 중국 명나라의 제후국을 자처하면서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갑오개혁을 계기로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한 날을 기념해 1392년을 개국기원 원년으로 정했습니다.

1895년 8월 을미사변을 계기로 정권을 장악한 개화당 내각은 서양에서 사용되던 양력을 도입하여 1896년부터 건양(建陽)이라는 연호 사용을 채택하였습니다. 1897년 10월에 수립된 대한제국은 연호를 다시 광무(光武)로 칭하도록 했고 1907년 순종이 즉위하면서 융희(隆熙)라는 연호를 사용하였습니다.

이조왕조시기 27대에 이르는 왕들의 집권시기를 역사학자들은 당대 왕의 연호로 표현하기는 하지만 마지막 왕인 순종시기에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되면서 우리나라에서는 더 이상 연호가 사용되지 않았고 대신 일본의 연호인 대정(大正)과 소화(昭和) 연호가 사용되었습니다.

해방 이후로는 남과 북이 우리민족 고유의 음력달력보다 서양달력을 사용하면서 달력에서 연호를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대한민국과 북한은 달력에 당해의 서양달력 연도만을 표기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서양달력 연도는 1895년에 있었던 을미개혁을 계기로 처음 우리나라에 도입되었습니다.

지난시간들에 설명했던 것처럼 고종 31년이었던 1894년 7월부터 1896년 2월 초까지 약 19개월 동안 3차에 걸쳐 추진된 일련의 개혁을 넓은 의미의 갑오개혁(甲午改革)이라고 하며 그 중에서 1895년 8월 하순부터 1896년 2월 초순까지 추진되었던 개혁은 제3차 갑오개혁 혹은 을미개혁(乙未改革)이라고도 부릅니다.

청취자 여러분들은 을미개혁과 을미사변을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같은 해인 1895년 을미년에 있었다고 하여 을미개혁, 을미사변으로 불리지만 을미개혁은 개혁파들에 의해 일어난 개혁운동이었다면 을미사변은 이조 제26대왕인 고종왕의 왕비인 명성황후 민비가 일제에 의해 시해된 사건입니다.

일본의 세력 침투가 강화되고 김홍집(金弘集) 등 친일(親日)세력이 득세하자 명성황후는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세력을 추방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아차린 일본정부는 주한 일본공사(公使) 미우라 고로를 사주해 1895년 8월 20일(양력 10월 8일)에 일본의 떠돌이 무사들인 낭인들을 궁중에 잠입시켜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시신을 궁궐 밖으로 옮겨 소각하였습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인 을미사변을 전후로 친일세력의 거두였던 김홍집을 중심으로 수립되었던 친일내각과 이들에 의해 일어났던 갑오개혁은 19세기 말 대한민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갑오개혁이 추진한 목적에 대해 전문가들은 첫째는 조선의 개화파 인사들과 농민대중이 개혁을 요구하였고 둘째로는 1868년 일본의 명치유신(明治維新) 이래 조선을 지배하고자 꾀했던 일본의 의도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갑오개혁과 을미개혁 등 일련의 개혁들은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植民地化), 보호국화(保護國化)하기 위한 '내정개혁'의 일환이었고 친일내각의 인사들이 일본세력을 등에 업고 추진한 근대적 개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화파인사들의 구상이 개혁의 일부 내용을 반영하기 때문에 개화당의 개혁과정을 순전히 일본의 강요에 의한 타율적 개혁이라고만 보지 않고 일부는 자율적 측면도 있었다고 전문가들은 주장하고 있죠.

갑오개혁 안에는 중국 청나라의 속국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나라로 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왕실사무와 국정을 분리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현재 현대판 봉건왕조국가인 김씨왕조가 중국이 없으면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는 중국의 속국 같은 처지에 놓인 것은 당시 갑오개혁이나 을미개혁에 비추어 보면 후퇴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3차 갑오개혁이라고도 부르는 을미개혁은 친일내각에 의한 일본 식민지화, 조선 보호국화 조치의 일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명성황후 민비의 시해사건 직후 일본의 간섭으로 친일내각인 김홍집내각이 등장했고 그동안 중지되었던 개혁이 내외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급진적으로 추진되었습니다.

을미개혁의 주요내용은 지금의 달력인 태양력 사용, 종두법시행, 우체국 설치, 소학교 설치, 1세1원(一世一元)의 연호 사용, 군제의 개혁, 단발령의 공포 등입니다. 개화파들은 음력 1895년 11월 17일을 기하여 양력 1896년 1월 1일로 정하고, 건양(建陽)이라는 연호를 채택하였습니다.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되면서 연호가 사라졌고 해방 이후에는 남과 북에 진주한 구소련과 미국에 의해 대한민국과 북한에서는 봉건시대에 사용하던 연호가 사라지고 현재의 서양달력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김일성이 사망하고 3년이 되는 1997년 7월 8일에 북한에는 이조봉건왕조시대의 연호를 방불케 하는 주체연호가 생겨났습니다.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와 중앙군사위원회, 국방위원회, 중앙인민위원회, 정무원이 1997년 7월 8일 공동명의로 '김일성동지의 혁명생애와 불멸의 업적을 길이 빛내일 데 대하여'라는 결정서를 채택하면서 '태양절'과 함께 주체연호가 생겨난 것입니다.

북한당국은 '주체연호'에 대해 "수령의 혁명생애와 불멸의 업적을 길이 빛내이며 당중앙의 영도 따라 수령의 혁명위업을 빛나게 계승, 완성하려는 전체 당원들과 인민군 장병들, 군인들의 한결같은 지향과 염원의 반영"이라 강조하였습니다. 결국 같은 해인 1997년 9월 9일, 북한 건국일을 시점으로 모든 문서, 출판, 보도물, 우표 등에 이 연호를 서양력(西曆)과 함께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그에 따라 현재 북한의 각종 출판물과 공문서, 사적비, 현지교시판 등 모든 건축물과 도서들에는 주체연호가 명시되고 있습니다.

저는 북한에서 살면서 1998년 달력에 주체연호가 실리는 것을 보면서 봉건사회의 연호가 떠올랐습니다. 당시 혜산교원대학 명예학장이셨던 저의 외할아버지가 이조왕조 역사기록물인 이조실록을 보셨는데 저도 그 책에서 태종 몇 년, 세종 몇 년 등의 당대 왕들의 연호를 보았던 기억이 있었기에 북한이 다시 왕조국가로 돌아간 기분을 느꼈던 것입니다.

사회주의라고 표방하지만 연호마저 이조봉건왕조의 낡은 연호를 고집하고 있는 북한이야 말로 현대판 봉건왕조국가임을 청취자 여러분들은 명심하기 바라면서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칩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김주원, 에디터 오중석,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