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도명학의 남북문학기행' 시간입니다. 저는 진행을 맡은 미국 워싱턴의 홍알벗입니다. 오늘도 서울의 탈북 소설가 도명학 작가와 남북 문학에 대해 이야기 나눕니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도명학: 네, 안녕하십니까.
MC: 오늘은 작품이 아닌 작가를 소개해 주시겠다고요?
도명학: 네, 그렇습니다. 한국의 김이석, 박순녀 부부 소설가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MC: 소개해 주실 작가는 어떤 분들인가요?
도명학: 이들 두 소설가는 북에서 남으로 내려온, 흔히 월남 작가로 분류되는 분들입니다. 북에서 내려왔다는 점에선 탈북작가와 동일한데 다만 그 시기가 다릅니다. 탈북작가는 주로 1990년대 이후 북한을 탈출한데 비해 월남작가는 1945년 해방직후부터 6.25전쟁 전후까지 북에서 내려온 분들을 지칭합니다.

MC: 부부작가는 흔하지 않은 것 같은데 말이죠. 먼저 부인인 박순녀 작가는 어떤 분인가요?
도명학: 예, 부부작가는 정말 드물죠. 남한에는 그나마 좀 있는데 북한에는 거의 없습니다. 특히 김이석 박순녀 작가는 지금과 달리 여성이 집에서 밥도 짓고 빨래도 하고 아이도 키우는 등 부담이 막중하던 시대에 작가가 되었습니다. 지금처럼 전기밥솥, 세탁기, 냉장고 같은 것도 없던 때 가사를 돌보는 와중에 문학을 한다는 건 여성에게 정말 대단한 용기와 인내심을 요하는 일이죠.
박순녀 작가는 1928년 함흥에서 출생했고 원산여자사범학교 수료했습니다. 1945 해방직후 단신으로 월남했습니다. 그의 가족 중 일부는 6.25 한국전쟁 중 월남했습니다. 박순녀 작가는1950년 서울대 사범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한국전쟁이 끝난 후 중앙방송국에서 5년간 근무하면서 방송 드라마를 집필했습니다. 또 서울 동명여자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했고. 김이석 작가 결혼했습니다. 1960년에는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케이스워카'가 가작으로 입선했고, 1962년 월간 종합지 사상계에 소설 '아이 러브 유'가 정식 추천되었습니다. 이어 1964년 월간 종합지 사상계에 소설 '외인촌 입구'가 정식 추천되고. 1970년 소설 '어떤 파리' 가 현대문학 신인상을 수상했습니다. 이후. 1988 년 소설 '비단 비행기'가 제14회 한국소설 문학상을 받았고. 1999년 소설 '기쁜 우리 젊은 날'이 제15회 펜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이외 작품으로 '케'칠법전서', '로렐라이의 기억', '영가', '마리아의 간통', '스몰 보이', 등 많은 작품을 창작했습니다.
MC: 남편인 김이석 작가도 소설가인데, 어떤 분인가요?
도명학: 김이석 소설가는 1914년 평양에서 출생했고, 1927년 평양 종로보통학교와 1933년 평양광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36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고 1938년 중퇴하였습니다. 그 뒤 조선곡산주식회사에 다니다가, 평양 명륜여상 교사로 근무했습니다. 그러다 1951년 가족을 두고 월남하여 대구에서 생활하였고. 중부전선에서 종군작가로 활동하였습니다. 1953년 에는 『문학예술』 편집위원, 성동고등학교 강사직을 맡았습니다. 이후 1957년부터 집필에만 전념하는 한편, 1958년 박순녀 소설가와 결혼하였습니다.
김이석 작가는 일찍부터 문학적인 재질을 나타내 보통학교 때 동요 「돌배나무」를 발표한 적이 있었고, 1938년 연희전문 재학 당시 단편소설 「환등」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본격적인 작품활동은 1938년 단편소설 「부어」가 『동아일보』에 입선되면서부터입니다. 그 당시 평양에서 구연묵·김조규·유항림·양운한·김성집·김화청 등과 함께 문학지 『단층』을 발간하면서 「감정세포의 전복」 등을 발표했습니다. 월남 후엔 종군작가단에 소속돼 작품 활동을 재개하여, 1954년「실비명」을 발표하였고, 이어 「외뿔소」·「달과 더불어」·「소녀 태숙의 이야기」·「광풍 속에서」·「뻐꾸기」 등을 발표하였습니다. 그 밖에 「실비명」과 함께 대표작으로 꼽히는 「동면」 등 다수의 작품을 집필했습니다. 또한 단편소설 외에 1962년 역사장편소설 「난세비화」를 『한국일보』에 연재하여 대중의 인기를 얻었는데, 1964년 역사장편물 「신홍길동전」을 쓰던 중 고혈압으로 작고하였습니다.
MC: 두 작가 모두 북한 출신인데 어떻게 남한으로 내려오게 됐나요?
도명학: 월남하게 된 동기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 짐작에는 박순녀 작가의 경우는 월남 후 서울대학교에서 공부한 것으로 보아 공부를 더하려고 남으로 내려온 건 아닐까싶습니다. 고향 함흥에는 대학교도 없고 평양에도 아직 대학이 없었으니 말입니다. 평양에 처음 생긴 대학인 김일성종합대학은 그가 월남한 1946년 10월이 돼서야 개교했습니다. 가족을 북에 두고 혼자 월남하고 후에 가족 중 일부가 내려온 걸 봐도 그렇게 짐작됩니다.
남편 김이석 작가의 경우는 이미 북에서 작품 활동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해방 후 5년간 북에서 활동하는 과정에 작가로서 순수문학을 하기엔 북한 체제상 불편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을 분명 경험했을 것이고 마침 북진했던 국군과 유엔군이 후퇴할 때 피난민 대열에 합류해 내려왔을 가능성이 많아 보이는데,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짐작일 뿐입니다.
MC: 두 작가는 북한과 남한에서 모두 생활을 해 봤는데요, 그러한 경험이 작품 속에 어떤 모습으로든 녹아 있나요, 어떻습니까?
도명학: 당연히 '글은 곧 그 사람'이라는 말이 있듯 작가 자신의 사상이나 취향, 경험 등이 작품에 반영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박순녀, 김이석 작가 역시 남과 북을 다 경험한 지식인들인만큼 다르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선 뒤에서 좀더 상세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MC: 이 두 작가의 작품이 다른 작가들과 다른 특징이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도명학: 박순녀 작가의 소설은 크게 여성적 정체성을 바탕으로 한 애정 문제나 소소한 일상을 다룬 작품, 한국전쟁이나 월남 체험을 다룬 작품, 일그러진 당대 역사나 현실 비판,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주한 미군과 기지촌 문제를 다룬 작품 등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공통적으로 박순녀의 소설에는 전통적 가족의 질서에 머물지 않고 주체적 의지를 갖고 생활하는 학생이나 인텔리 여성이 흔히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전통적 가부장제의 도식적 틀을 거부하는 이러한 여성 인물은 전통적 가부장제를 뛰어넘어 자아실현을 하고자 하는 여성 주체의 욕망을 적극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김이석 작가의 소설은 그 내용 면에서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한국적인 정과 한을 다룬 작품들, 둘째 한국전쟁으로 인한 고통과 전후의 혼란상을 그린 작품들, 셋째 남녀의 애정 윤리를 다룬 작품들, 넷째 역사적 사실을 다룬 작품들로 구분됩니다.
김이석의 작품은 무척 동적이고 인물도 적극적으로 행동합니다. 자기 운명을 알아서 감수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개척해 나갑니다. 그의 작품세계는 대표작 「실비명」·「외뿔소」·「학춤」에서와 같이 사적 체험과는 거리가 있는 주인공의 꿈의 상실에 대한 좌절과 상심을 통해 인생의 비애를 기록하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1920년대 식민지사회의 단면을 제시한 소년시절의 회상이나, 지식인의 내면세계를 통해 조명한 1·4후퇴 때 월남한 지식인들의 비참한 삶의 모습의 기록과 같이 사적 체험을 형상화하는 데 주력하였습니다. 한편 그의 문체는 치밀한 구성과 간결한 표현으로 한국적 정과 한의 세계를 관조하는 담담한 심경으로 그려져 있어 호소력을 가집니다.

MC: 남한에서 활동하는 북한출신 작가들은 현재 몇분이나 계시나요?
도명학: 옛날 북에서 내려온 실향민들이 전부 고령이고 이미 세상을 떠난 분들이 많습니다. 월남 작가로 분류되는 분들 역시 거의 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황순원, 이호철, 최인훈, 송창섭, 이범선 등 한국 문단에 기라성같은 업적을 남긴 월남작가들 거의 전부 세상을 떠났고 생존한 경우에도 너무 고령이기에 창작활동이 어렵습니다.
MC: 휴전 전에 내려오신 분도 계시겠지만 탈북민 작가들도 계실텐데 말이죠. 남한에 오셔서도 창작활동을 하시는지요?
도명학: 탈북작가들은 아직 젊은 편이어서 앞으로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는 시간이 꽤 있습니다만 인원이 너무 적어요. 대략 20~30명 정도로 볼 수 있는데 그중에도 작가적 능력을 충분히 갖춘 인원이 몇 명인지 묻는다면 솔직히 말해 대답이 궁해질 정도의 인원밖에 안 됩니다.
MC: 탈북작가들의 활동 범위나 이들에 대한 남한 문학계의 평가는 어떻습니까?
도명학: 탈북작가들은 창작에 전념할 형편이 안 됩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빈몸에 남한에 왔기에 우선 생계를 위해 다른 일을 하면서 창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탈북작가 수는 적은데 사명감으로 해야 할 일은 많고, 이점이 참 안타깝긴 합니다. 다만 소수의 인원에 어려운 형편에서도 실지 작품이 나오는 것을 보면 북한 작가들에 비하면 일당백이라고 할 정도로 성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특히 2012년 탈북작가들로 구성된 망명북한펜센터가 전 세계 작가들의 모임인 국제펜클럽에 북한 조선작가동맹 등 북한작가들을 대신해 145번째 회원국 지위를 인정받고 가입되면서 탈북작가와 작품에 대해 국내외 관심이 아직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상당히 높아졌습니다. 한국 문학계도 탈북 작가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고 작품에 대한 평가도 양호하고, 남한 작가들이 하고 싶어도 하기 어려운 작품을 쓸 수 있고, 또 이들이 통일문학의 선구자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감이 높습니다.
MC: 탈북작가들의 활발한 활동을 위해 개선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으시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도명학: 딴 게 있겠습니까. 한국 문단과 출판계, 언론에서 더 많이 관심 가져주고 협조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야 아직 청소한 탈북 문단이 성장하고 나아가 통일문학의 전초기지로 역할할 수 있다고 봅니다.
MC: 선생님, 오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도명학: 네 수고 많으셨습니다.
에디터: 이진서, 웹담당: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