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명학의 남북문학기행] 북한서 ‘영화의 신’으로 불린 남한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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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북한에 계신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도명학의 남북문학기행입니다. 진행을 맡은 미국 워싱턴의 홍알벗입니다. 오늘도 남한의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는 탈북 소설가 도명학 선생님과 함께 남북한 문학작품에 대해 이야기 나눕니다.

MC: 안녕하십니까?

도명학: 네, 안녕하세요.

MC: 오늘은 좀 특별한 작품을 갖고 나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작품인가요?

도명학: 네. 오늘은 북한영화를 가지고 이야기하려 합니다. "소금"이라는 제목의 영화인데 북한에서 인기가 굉장했던 영화입니다.

MC: 이 작품이 기존의 북한 영화작품과 비교해 볼때 특별하다고 하는데 뭐가 특별하다는 건가요?

도명학:예, 아주 특별했습니다. 이 영화 이전 북한영화들에서 전혀 볼 수 없었던 성관계 장면이 처음 나온 것이 가장 특별했던 것 같습니다. 북한주민들이 받은 충격이 상당히 컸습니다. 이 영화가 제작된 시기가 1985년이었는데 저도 그땐 한창 젊음이 용솟음치는 20대 청년이었습니다. 그때 그 영화를 영화관에서 낮부터 늦은 밤까지 온종일 여러 번 상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별것도 아닌 그 장면을 다시 보겠다고 영화가 끝났는데도 밖에 나오지 않고 관람석 밑에 엎드려 숨었다가 다시 영화가 시작되면 또 보고 또 보고 한 장난꾼들이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MC: 영화 '소금'은 어떤 작품이고, 줄거리는 어떻게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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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소금' 포스터. /연합

도명학: 예 이 영화는 1934년 경향파 작가로 알려진 강경애가 발표한 중편소설을 원작으로 제작된 영화입니다. 작품은 1930년대 초 간도 지방을 배경으로 일제와 지주의 억압을 받으며 살고 있는 소금장수 여주인공 봉염 어머니의 일생을 그렸습니다.

남편을 따라 정든 고향을 등지고 두만강을 건너간 봉염 어머니는 간도의 용정 부근 중국인 지주 광둥의 땅을 부치며 근근이 살아갑니다. 그런데 하늘같이 믿고 살던 남편은 지주를 보호하려다 공산당의 습격을 받아 죽고, 아들 봉식이마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후 행방불명이 되고 맙니다. 하는 수 없이 지주 광둥의 집에서 부엌데기로 지내게 된 봉염 어머니는 지주에게 겁탈을 당하는데 겁탈을 하던 중 운 나쁜 지주는 시렁에 놓아둔 토기단지가 떨어지면서 머리를 맞아 죽습니다. 이로 인해 봉염 어머니는 살인죄로 옥살이를 하게 되는데 의외로 배속에 아기가 생겨난 것을 알게 됩니다. 지주 광둥의 아이를 임신한 것인데 참 기막힌 불행의 연속이긴 하지만 불행중 다행이랄지 임산부라고 석방됩니다. 한편 봉염 어머니는 아들 봉식이가 공산당에 가입해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사형당했다는 이유로 온갖 핍박을 받으며 어린 봉염과 봉희마저 잃게 됩니다. 홀몸이 된 봉염 어머니는 삶의 막다른 길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소금 밀수 무리에 끼어들고. 소금을 지고 돌아오던 길에 그들은 산에서 항일유격대를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공산당이라고 하는 그 사람들은 “여러분, 당신네들이 왜 이 밤중에 단잠을 못자고 이 소금 짐을 지게 되었는지 아십니까?”라고 하면서 그 원인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봉염 어머니가 집에 돌아와 언 몸을 녹이며 소금 팔 궁리를 하고 있을 때 순사들이 달려들어 애써 지고 온 소금을 허가 없이 가지고 있는 소금이라고 압수하고 그녀를 체포해 갑니다. 이때 봉염 어머니는 공산당이 나쁘다는 일제의 선전이 거짓이며 남편이 공산당의 손에 죽었다는 말도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또한 그는 공산당이 가난한 사람들의 편임을 확신하게 되면서 그제야 아들을 이해하고 항일유격대를 위해 자신도 소금과 같은 존재가 되겠다고 다짐하며 아들이 있는 항일유격근거지로 찾아가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자신이 처한 삶의 고통의 원인을 전혀 알지 못하던 무지한 한 여성이 사회적 의식을 깨우쳐 변화해가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그린 작품입니다.

MC: 이 영화의 감독 또한 유명한 사람이죠? 영화 '소금'을 만든 감독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소개 좀 해 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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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옥 감독(오른쪽)과 배우 최은희 씨가 미국 망명 직후인 지난 1986년 5월 워싱턴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북한에 납치됐던 이들은 1986년 3월 오스트리아를 영화 촬영 차 방문했다가, 북한 감시원을 따돌린 후 미국대사관에 망명을 요청했다. /AP (Kyung Ha Rhee)

도명학: 예, 이 영화를 만든 사람은 북한 김정일의 지시에 의해 납치되어 월북자로 둔갑했던 한국의 유명 영화감독으로 잘 알려진 신상옥 감독입니다. 신상옥 감독은 1926년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났고 한때 함경북도 회령군과 경성군에서 유년기를 보냈고, 경성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도쿄예술대학을 다니다가 1945년에 중퇴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 유학 덕분에 일본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었고, 썩 훗날 지인에게 자신의 납북 상황을 알려준 녹음 테이프도 일본어로 되어있다고 합니다.

신상옥 감독은 해방 후 1946년 서양화가로 화단에 등단한 적이 있었고, 1948년 영화 '희망의 마을'를 통해 영화 감독으로 데뷔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1949년 영화 '여성일기'의 미술감독을 맡았고 이어 같은 해 1949년 영화 '파시'로 영화 조감독으로 데뷔하였으며 1952년에 16mm 영화인 '악야'라는 작품으로써 본격적인 영화 감독이 되었습니다. 그는 1960년 자신의 영화사인 '신필름'을 설립했습니다. 신필름은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 형태에 가장 가까웠던 첫 번째 기업형 영화사로 1960년대 한국 영화 부흥기를 이끌었습니다. 신필름은 미국 콜럼비아 영화사를 모델로 전속 배우, 작가, 감독, 촬영 감독, 녹음 기사까지 영화 제작에 필요한 인력을 자체 조달하는 영화 스튜디오였습니다. 신상옥의 아내인 최은희를 비롯해 김승호, 신영균, 이예춘, 남궁원, 태현실 등 당대 최고의 배우들이 신필름 전속 배우로 활동했으며 용산에 지어진 1천 평 규모의 촬영소에는 촬영 스튜디오와 녹음실, 편집실, 영사실, 부설 연기자 양성소 등을 두었을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1961년부터 1970년까지 쏟아낸 작품 수는 102편이며 신필름 휘하에 있던 안양필름이 제작한 영화까지 합하면 150편이 넘습니다. 신필름은 1960년 영화 로맨스 빠빠, 1961년 성춘향의 성공으로 기반을 잡고 사업을 키워서 전성기엔 직원 수가 200명, 전속 배우가 70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1966년 신필름은 홍콩을 비롯한 해외 합작 영화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안양종합촬영소를 세워 몸집 불리기에 나섰지만 정부 지원이 부족해지면서 재정적 위기에 몰리기 시작해, 안양종합촬영소는 산업은행으로 넘어가고 현대식 설비들이 즐비했던 스튜디오도 몰락하게 됐다고 합니다. 또 1960년대 중반 이후 흥행작들도 적어지면서 설상가상의 위기를 맞아 신필름은 1970년부터는 회사 규모를 줄이며 연명하고 텔레비전 보급에 따른 영화계 침체까지 겹쳐 고전하다가 결국 1975년 홍콩과 합작한 '장미와 들개'의 예고편 중 검열 과정에서 삭제된 키스 장면을 극장에서 상영했다는 이유로 정부로부터 영화사 등록취소 처분을 받고 해체됩니다.

배우였던 부인 최은희와는 1953년에 결혼해 1남 1녀를 두었는데 최은희가 불임인 관계로 조카를 입양하였다고 합니다. 아들 신정균은 신상옥의 사촌의 아들인 당조카이고, 딸 신명희는 육촌의 딸이라고 합니다. 훗날 두번째 부인인 오수미 사이에 아이가 생기면서 최은희가 불임이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양자인 신정균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영화감독이 되었습니다.

신상옥 감독은 배우 오수미와 사귀게 되면서 아내인 최은희와는 이혼했으나 최은희 가 1978년 1월 14일에 홍콩에서 북한 공작원에 의해 납북되자 그녀의 행방을 찾다가, 그 역시 같은 해 7월 19일에 홍콩에서 납북되었습니다. 두 번째 부인 오수미는 신상옥이 납북되자 홀로 신상옥과의 사이에서 낳은 두 아이들을 키우다가 유명 사진작가 김중만과 재혼했으나 1992년 교통사고로 요절했습니다. 신상옥과 최은희는 재결합했고 북한에서 영화 활동을 이어 나갔습니다. 신상옥 감독은 평양에서 신필름영화촬영소 총장을 맡으면서 '소금', '불가사리' 등 적지 않은 영화를 제작했습니다. 신상옥 감독의 신필름영화촬영소 만든 북한 영화들은 이전의 북한 영화들에 비해 수준이 높고 무엇보다 재미도 있었기 때문에 북한 영화계와 인민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줌과 동시에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김일성, 김정일 부자도 흡족해할만큼 작품성도 뛰어나서 해외에서도 상을 탈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 1986년 3월 13일 최은희와 함께 오스트리아 빈에 있던 도중, 미국 대사관으로 탈출하여 무려 납북 8년만에 극적으로 탈북에 성공합니다. 8년 중 영화활동은 3년 정도 뿐이었는데, 그것 밖에 안한 건 사실 초반 5년간은 탈출 시도를 했다가 수용소나 다름 없는 곳에서 노동 생활과 세뇌교육을 받은 적이 많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신상옥 감독은 1987년 11월 29일 김현희가 일으켰던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을 다룬 반공 영화인 '마유미'를 대한민국 복귀작으로 제작하여 1990년에 내놓았습니다. 신상옥감독은 1994년 한국인 최초로 칸 영화제 심사위원을 맡았으며 2000년에 미국에서 대한민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이후 간에 이상이 생겨 앓다가 간 이식 수술을 받았지만, 건강이 계속 악화 되어 2006년 4월 11일 사망하였습니다. 묘소는 경기도 안성시 보개면 북가현리 소재의 천주교 공원 묘지에 있습니다.

MC:영화배우 최은희와 신상옥 감독은 북한 당국에 의해 납치됐던 남한 주민이었는데요, 북한 주민들도 이 사실을 알고 있나요?

도명학: 북한주민들은 신상옥 최은희 부부가 납치된 사실을 모릅니다. 그들 스스로 제3국에서 활동하던 중 월북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기자회견에서 본인들이 그렇게 말했었죠. 당시의 남한 군부정권의 핍박을 받았고 환멸을 느끼면서 월북을 결행하게 되었다고 한 만큼 주민들은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이 다시 오스트리아에 갔다가 탈출한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북한 당국이 주민들 대상으로 신상옥, 최은희가 김일성, 김정일의 사랑과 믿음을 배신하고 영화를 만들라고 준 거액의 돈을 착복할 목적으로 도망갔다는 내용의 강연회를 했었습니다. 그래서 신상옥 최은희는 은혜를 모르는 개만도 못한 수전노들이라고 욕을 했습니다. 그러나 인텔리들을 비롯한 일부 사람들은 당국의 강연내용을 액면 그대로 믿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엄청난 대우를 해줬는데도 도망갔다면 필시 무슨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세계적인 명성을 날린 사람들인데 고작 그 돈 떼먹겠다고 명예를 스스로 실추시키는 행동을 했을 리 만무하다며 합리적 의심을 했습니다.

MC: 신상옥 감독과 최은희 배우가 북한에서 인기는 많았나요? 그 이유가 뭘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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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을 산 배우 최은희가 16일 오후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92세. 사진은 북한으로 납치됐다 탈출한 최은희·신상옥 부부가 1986년 5월 미국 워싱턴 워터게이트호텔에서 기자회견장에 도착하며 미소짓는 모습. /연합 (Kyung Ha Rhee)

도명학: 인기가 많았다는 정도가 아니라 영화의 신이었죠. 신상옥, 최은희, 신필름 영화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최고로 여기는 것을 당연 시 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얼마나 대단한 천재인지에 대해 출처가 분명치 않은 별의별 썰이랄지 전설이랄지 아무튼 소문이 또다른 소문을 낳으며 많이 떠돌았습니다.

MC: 기존의 북한영화와 신상옥 감독이 만든 영화가 다른 점은 무엇이고, 신 감독이 영화를 만드는데 애로사항은 없었나요?

도명학: 신상옥 감독이 북한에 와서 만든 영화를 보고 제일 눈에 뜨인 것은 높은 촬영 기술이 도입된 장면들이었습니다. 또 영화의 내용도 기존 북한 영화들에서 볼 수 없는 대담한 설정들이었습니다. 특히 키스신, 베드신 같은 것은 북한 주민들이 외국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장면으로 여겼는데 신필름 영화에서 보게 되니 놀라움과 충격이 컸습니다. 그리고 원래 북한은 작품에서 삼각연애나 불륜을 설정하지 못하도록 통제하는데 신감독 영화는 예외였던 것 같습니다.

신감독이 영화를 만드는데 애로사항은 물질적으론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왜냐면 김정일이 돈 걱정하지 말고 만들고 싶은 대로 영화를 만들라고, 전폭적으로 지원했다고 합니다. 신상옥 최은희 부부가 3국에서 탈출할 무렵에는 평양시에 대규모 신필름영화촬영소 건설을 시작했을 때였습니다. 그들이 정작 느낀 애로는 돈이나 설비가 아니라 영화 제작의 자유였다고 합니다. 영화를 만들 때마다 당국의 간섭을 피할 수 없었고, 또 제작일정을 맞추려면 배우들과 스텝들을 걸핏하면 사상학습이요, 생활총화요, 정치행사요 하면서 불러내는 바람에 차질이 빚어져 스트레스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들이 탈출한 이유가 자유로운 영화 제작 환경이 아닌 것에 염증을 느낀데 있다는 말이 암암리에 돌았습니다.

MC: 배우 최은희는 북한에 있으면서 바로 이 '소금'이란 작품으로 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기도 했는데, 북한 주민들의 시각은 어땠습니까?

도명학: 그때 그 사실을 신문방송에서 굉장히 요란하게 전했습니다. 영화 "소금"이 사회주의 리얼리즘 창시자인 소련작가 고리끼의 소설 "어머니"에 버금가는 작품이라고 세계가 격찬했다는 등 정말 대단했습니다. 최은희가 여우주연상을 받은 것에 대해서도 주민들은 아무렴 최은희 같은 명배우가 그런 상을 받아야지 누가 받겠냐면서 이구동성으로 최은희의 연기실력을 칭찬했습니다. 하도 최은희 인기가 높으니 좀 어이없는 루머까지 돌았는데 남조선의 전두환이 최은희의 아름다움과 연기에 반해 최은희를 어째보려는 사심을 품고 꾀어내려 하는 바람에 신상옥이 최은희를 데리고 3국으로 나갔다가 월북했다는 소리까지 돌았죠. 한마디로 이들 부부는 북한주민들에게 영화의 신이었고 존재 자체만으로도 전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MC: 선생님께서는 이 영화를 보셨을 때 어떤 느낌을 받으셨나요?

도명학: 저 역시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느낌이었습니다. 다만 문학도로서 작품성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가졌는데 내용 면에서 영화 "소금"은 사회주의 리얼리즘 작품의 표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는데 방금 북한매체들이 소련작가 고리끼의 소설 "어머니"에 버금가는 작품이라고 격찬한 것처럼 저도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다만 이 영화에는 수령에 대한 칭송 같은 것이 전혀 없고 단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당위성만 있습니다. 만약 수령우상화를 시도하는 그런 내용이 들어가 있었더라면 아마 모스크바에서 최고의 상을 받지 못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수령 우상화는 자유 진영은 물론이거니와 당시 소련 등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도 개인미신이라며 거부감을 갖고 좋아하지 않았는데 마침 "소금"에 그런 내용이 없었기에 순수 예술성만으로 좋은 평가를 받고 상도 받게 된 것이라고 봅니다.

MC: 오늘 도명학의 남북문학기행 순서는 여기까지입니다. 선생님, 수고하셨습니다.

도명학: 네 수고하셨습니다.

MC: 오늘 준비한 내용은 여기까지입니다. 지금까지 함께 해 주신 청취자 여러분 고맙습니다. 저희는 다음 주 이시간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에디터: 이진서, 웹담당: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