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9월까지도 언제 가을이 오나 싶게 더웠는데 어느새 바람이 서늘하게 느껴지면서 사색하기 좋은 장소로 산책도 가고 싶고, 등산도 하고 싶어지는 계절이 됐는데요. 이맘때면 빠짐없이 등장하는 말이 있습니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다' 인데요. 요즘 책 읽는 분들 정말 많이 보이더라고요. 탈북민들 중에도 책을 즐겨 읽는 분들 많은가요?
마순희: 네, 우리 탈북민들 중에 책을 즐겨 읽는 분들이 정말 많으십니다. 저도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책 욕심을 엄청 부렸었거든요. 지금은 다양한 전자기기로 온라인 상에서 열람 가능한 인터넷 서적이 많이 나오고 있지만, 제가 처음 한국에 왔던 20년 전에는 서점에서 종이책을 사서 읽는 사람들이 더 많았는데요. 저도 자주 서점에 들르곤 했었습니다. 북한에서 재미있게 읽었던 '샬로크 홈즈', '제인에어', '톰아저씨의 집' '레 미제라블' 등 없는 책이 없어서 서점에 가면 별천지 같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고, 너무 좋아서 소설책을 엄청 사들였던 기억이 지금도 납니다. 북한에서는 책이 귀하다 보니 재미있는 소설책이라도 구하면 서로 돌려가며 밤을 밝혀가면서 읽었는데 한국에서는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다는 게 정말 좋더라고요. 실제로 저를 비롯한 많은 탈북민들이 한국에 와서 다양한 책을 보고 있습니다. 오늘의 주인공 역시 여러 분야의 책을 섭렵하신 분인데요. 한 달에 10권 이상의 책을 읽는다는 놀라운 독서의 달인 김예림 씨입니다.
김인선: 독서가 여러 가지 면에서 유익하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먹고 살기 바빠서, 혹은 책 읽을 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책 읽기가 쉽지 않다는 분들도 많은데요. 한국에 정착하는 게 가장 우선인 탈북민들에게는 독서가 더 쉽지 않을 것 같거든요. 그런데 예림 씨는 한 달에 10권 이상 책을 읽는다고요?
마순희: 네. 예림 씨는 북한에서부터 공부는 물론이고 책 읽기를 무척 좋아했다고 해요. 한국에 와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림 씨는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에 있을 때에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아서 화제가 됐을 정도였습니다. 예림 씨는 우리가 흔히 많이 읽는 소설책이 아니라 궁금한 분야, 특히 필요한 부문의 참고서적 같은 것들을 찾아서 읽었습니다. 그 덕에 하나원을 수료할 때에는 여느 탈북민들보다 한국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는 사람으로 통했고, 동기생들도 모르는 것이 있으면 으레 예림 씨에게 물어볼 정도였다고 합니다. 예림 씨는 하나원에서 교육을 받을 당시 천주교 수녀님께서 하시던 말씀이 크게 와 닿았고, 지금까지 잊히지 않는다고 하는데요. '사람을 함부로 믿지 말고, 모르는 것이 있으면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서 정말 모르는 부분만 물어보라'고 조언을 했다고 합니다. 예림 씨는 수녀님의 말대로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알아가려는 의지를 키워 나갔는데, 그 과정에 책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김인선: 지금까지 들어 본 탈북민들의 정착생활 이야기에서는 '독서'가 등장한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요. 그래서 예림 씨의 삶이 점점 더 궁금해지는데요. 앞서 북한에서부터 공부도 잘 했다고 했잖아요. 예림 씨의 북한 생활은 어땠나요?
마순희: 네. 예림 씨는 어릴 때부터 공부를 잘 하는 학생으로 소문이 났었고 전문대학교도 졸업했습니다. 대학 졸업 후에는 한국의 회계사에 해당하는 부기원으로 5년간 일하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책을 읽었고 힘든 막노동은 전혀 모르고 살았다고 합니다. 고난의 행군 시기에도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던 예림 씨였습니다. 오히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예림 씨는 중국에 대한 호기심이 날로 커졌는데요. 예림 씨가 살던 도시가 두만강을 옆에 끼고 있다 보니 중국의 사사여행자들이 많이 드나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통하여 중국은 물론 한국이 어느 정도로 발전한 곳인지를 심심치 않게 듣게 되었고, 예림 씨는 한 번이라도 바깥세상으로 나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예림 씨는 중국으로 향했는데요. 현실은 여의치 않았습니다. 잡혀서 북송이 됐는데요. 다시 또 탈북을 감행했습니다.
김인선: 두 번째 탈북은 성공했나요?
마순희: 안타깝게도 이번 역시 북송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두 번의 탈북 모두가 물거품이 되고 북송을 당하면서 예림 씨는 오랜 시간 험난한 경로를 지나야 하는 탈북은 쉽지 않겠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세 번째 탈북은 동생과 함께였고, 한국행을 주선하는 브로커를 연결해 비행기를 이용했습니다. 그만큼 브로커 비용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위조신분증으로 편하게 비행기로 갈 수 있는 노정은 엄청난 비용이 들기 때문입니다. 브로커는 탈북민들이 한국에 입국하면 정착지원금으로 얼마를 받는지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림 씨와 거래를 했습니다. 예림 씨는 정착지원금을 받으면 브로커 비용으로 바로 갚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브로커와 예림 씨의 거래에는 담보도 있었는데요. 바로 예림 씨의 동생이었습니다. 동생은 중국에 남고 예림 씨만 먼저 한국에 가는 것으로 약조를 한 뒤 위조신분증으로 비행기를 탈 수 있게 했던 것입니다. 예림 씨는 중국인 신분으로 한국남자에게 국제 결혼하러 가는 신부로 위장하고 비행기를 탈 수 있었고, 2002년 무사히 대한민국 땅을 밟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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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선: 2002년이면 국제축구연맹 한일 월드컵이 열린 해잖아요. 한국이 4강까지 진출하면서 광화문, 시청 거리에 40만 명이 나와서 다 같이 응원했던 그 열기는 지금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예림 씨가 한국에 와서 이런 걸 봤으면 좋았을 텐데, 언제 온 건가요?
마순희: 예림 씨가 입국한 시기는 2002년 8월입니다. 월드컵이 6월에 끝났으니까 직접적으로 월드컵을 마주하지는 못했는데요. 식지 않은 열기는 느껴졌다고 합니다. 한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 예림 씨를 깜짝 놀라게 한 것은 축구가 아니었습니다. 예림 씨가 비행기를 타고 입국했다고 했잖아요. 2001년에 개항한 인천국제공항을 처음 마주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전 세계 공항에서 가장 서비스가 좋은 곳이자 세계의 중심공항으로 인정받는 곳이잖아요? 예림 씨가 한국에 와서 가장 처음 접한 곳이 인천국제공항이었으니 한국에 대한 첫 느낌은 별 세계 같았을 겁니다.
하지만 예림 씨는 한국의 화려한 모습에 동화돼 여기 사람들과 어울려 한가하게 월드컵 분위기를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없었습니다. 하루 빨리 돈을 벌어서 브로커 비용을 완납하고 중국의 브로커들에게 인질로 남겨진 동생을 한국으로 데려와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림 씨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자신이 탈북민임을 밝히는 일이었고, 이후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에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예림 씨는 스스로를 ‘목적이 있으면 그것 하나만 보고 다른 것은 안 보는 성격이다’라고 표현하는데요. 하루라도 빨리 한국에서 정착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기에 다양한 책들을 섭렵했던 것입니다.
책을 통해 한국 문화는 물론 한국생활에 필요한 정보들을 스스로 터득할 수 있었고 하나원을 나온 후 누구보다 빨리 한국생활에 적응할 수 있었습니다. 예림 씨는 돈을 벌기 위해 식당 일부터 24시간 운영하는 상점에서 부업까지 하면서 쉬지 않고 일을 했습니다. 그런 예림 씨를 보고 탈북민들의 신변을 보호하고 지역 생활을 안전하게 할 수 있게 도와주는 담당 형사님이 그렇게 많은 브로커 비용을 한꺼번에 다 갚으려고 하지 말라고,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는데요. 예림 씨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동생을 볼모로 자신이 그들과 한 약속이기에 하루라도 빨리 다 갚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김인선: 많은 탈북민들이 브로커 비용을 갚기 위해 열심히 돈을 버는데요. 예림 씨는 브로커에게 담보로 잡혀 있는 동생까지 데려와야 하기 때문에 몇 배로 더 큰돈이 필요한 상황인 것 같습니다. 한국생활이 순탄해 보이지는 않는데요. 어떻게 이겨냈을까요? 예림 씨의 한국정착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들어보겠습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릴게요.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에디터 이예진 웹편집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