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순희의 성공시대] 내 힘으로 달라지는 삶 (1)

0:00 / 0:00

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지난 7월 14일은 첫 북한이탈주민의 날로, 남한 전역에서 탈북민을 위한 다채로운 행사가 열렸습니다. 탈북민들을 위한 축제의 장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요. 마 선생님께서도 아주 특별한 순간을 보내셨더라고요. 제 1회 북한이탈주민의 날 기념식에서 대통령상을 받으셨잖아요.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정말 많은 분들께 축하인사를 받고 있는데요.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네요. 제 1회 북한이탈주민의 날 기념식에서 대통령께서 직접 주시는 상을 받는 영예를 제가 받아 안게 되다니! 지금도 정말 꿈만 같습니다. 한국생활 21년 동안 열심히 살아오긴 했지만 더 열심히 살아가라는 격려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지금보다 더 열심히 살아가겠습니다. 부끄러운 표현이지만 저처럼 열심히 살아오신 탈북민 한 분을 오늘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2008년에 한국에 입국해서 현재 전라남도 광양에서 살고 있는 오승은 씨인데요. 승은 씨는 한반도 끝과 끝에서 모두 살아 본 분이십니다. 북한에서 살 때는 한반도의 최북단에 위치한 온성에서 살았고요. 한국에서 살면서 최남단에 위치한 제주도에서도 3년 정도 살았거든요. 처음 한국에 와서는 경기도에서 살았다가 제주도를 거쳐 2018년부터 지금까지는 전라도 광양에서 살고 있는 오승은 씨에 대해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김인선: 멀지 않은 곳으로 이사해도 신경 쓰고 애써야 하는 부분이 많은데요. 오승은 씨의 경우 경기도에서 제주도, 다시 전라도로 제법 먼 거리를 이동한 편이라 정착하는데 훨씬 더 많은 노력을 했을 것이라 짐작됩니다. 승은 씨의 한국 정착 이야기, 자세히 들려주시죠.

마순희: 네. 오승은 씨는 2008년에 처음 한국땅을 밟았는데요. 승은 씨가 처음 북한을 떠났던 것은 2000년이었습니다. 함경북도 온성에서 세 아들을 키우며 평범한 가정주부로 살던 승은 씨에게 고난의 행군은 너무도 힘들고 어려운 시간이었습니다. 승은 씨는 세 아들을 굶기지 않겠다는 생각 뿐이었는데요. 중국에서는 한 달 정도면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브로커의 말을 듣게 되면서 중국행을 택했습니다. 하지만 그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습니다. 승은 씨는 인신매매에 걸려 흑룡강성으로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팔려 간 곳이 한족 동네라 말이 통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중국에 살고 있는 동안 남편과 애들이 다 죽은 것으로 하고 살아야 한다는 인신매매업자들의 말을 그대로 따랐기에 북한에 자식이 있다는 말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승은 씨의 뱃속에는 어린 아이가 자라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임신한 채 세 아들을 위해 떠난 길이었던 것입니다. 승은 씨는 고생하고 있을 자식들을 생각하며 혼자 남몰래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그래도 시간이 좀 지나면서 집밖 사람들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승은 씨는 근처에 조선족 교회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먼저 찾아 갔고 그곳에서 몇 년 만에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날 후로 승은 씨는 아무리 힘들어도 교회가 열리는 주일에는 무조건 참석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중국에서 보내는 시간은 점점 길어졌고 탈북할 때 뱃속에 있던 아이는 어느덧 9살이 되었는데요. 그 무렵 승은 씨는 교회의 도움으로 한국행을 결심했고 2008년 딸과 함께 무사히 대한민국에 입국했습니다.

김인선: 자녀와 함께 한국행을 하고 싶어도 여러 가지 여건 상 어쩔 수 없이 홀로 입국을 하는 경우도 많은데요. 승은 씨의 경우 딸과 함께 하는 여정을 선택하셨군요.

마순희: 네. 우리 탈북민들, 특히 자녀들이 있는 경우 한국으로 오는 길에 여러 가지 선택의 문제가 있기 마련입니다. 한국으로 입국하는 노정이 탈북노정 못지않게 위험한 길이니까요. 여러 나라의 국경을 넘어야 하는 엄청난 모험이기에 부모들이 먼저 한국행을 한 후에 비슷한 경로로 자녀들을 데려오는 경우도 많습니다. 오는 길에 다른 분들에게 부탁을 하는 거죠. 제가 올 때에도 한국에 있는 부모의 요청으로 7살 어린 남자애를 돌보며 함께 오기도 했었거든요. 때로는 중국에서 함께 살던 남편이 자식을 보내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함께 오지 못하고 혼자 오는 경우도 있고 여러 가지 사례들이 많습니다.

오승은 씨의 경우에는 더 이상 사랑하는 딸을 중국 아이로 키울 수 없다는 생각에 딸과 함께 하는 여정을 선택했는데요. 9살이라 능히 엄마와 함께 그 길을 이겨낼 것이라는 믿음도 있었다고 해요. 무엇보다 중국에서 지내는 내내 세 아들을 북한에 두고 온 것이 천추의 한으로 남아있던 오승은 씨였기에 딸과는 절대로 헤어질 수 없다는 생각이 컸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식과 헤어지는 일은 다시는 없어야 된다는 마음이 워낙 강했던 지라 승은 씨는 딸과 함께 한국행을 택했고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김인선: 다음 단계는 적응이죠. 중국과는 또 달라서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리는 분들이 많은데, 승은 씨는 세 아들을 데려오기 위해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제일 컸을 것 같아요. 한국에서 사회생활을 어떻게 시작했을까요?

마순희: 맞습니다. 오승은 씨는 2008년 12월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을 수료한 후 본격적인 한국생활을 시작했는데요. 세 아들을 한국으로 데려오려면 많은 브로커 비용이 필요했기에 바로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항상 딸과 함께 했는데, 9살 어린 딸과 함께 살면서 돈을 번다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어린 딸을 탈북 청년들과 제3국 출생의 탈북 자녀들의 정규교육 과정을 도와주는 대안학교에 맡겼습니다. 이후 승은 씨는 경기도 군포에 있는 한국예술직업전문학교에서 제과제빵 자격증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당시 40대 중반의 나이였던 승은 씨에게 외래어가 태반인 제과제빵 과정은 모르는 용어투성이였습니다. 그래도 승은 씨는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이 곧 취업과 관련된 일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밤을 새워 가며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김인선: 분명한 목표가 있다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이겨낼 수 있더라고요. 승은 씨에게는 세 아들을 위하는 일이 목표일 테니 결국엔 제과제빵 자격증을 취득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마순희: 네. 맞습니다. 승은 씨는 어렵게만 느껴졌던 제과제빵 과정 자격증을 취득한 것은 물론 능력을 인정받아 학원에서 제빵, 제과, 한식을 가르치는 담당 간사로 근무하기도 했습니다. 학원 일정에 따라 시간이 가능할 때에는 한국폴리텍대학 안성캠퍼스에서도 같은 내용으로 강의를 했습니다. 하지만 학교와 폴리텍대학 등에서 강사로 5개월 동안 열심히 근무해도 아들이 셋이다 보니 원하는 금액을 모으기가 어려웠습니다. 브로커 비용을 마련하려면 더 많은 돈을 빨리 벌어야 했습니다. 승은 씨는 수입이 더 좋은 곳을 찾았는데요. 수원에 있는 한 요양원에 조리사로 취업을 했습니다. 승은 씨는 조리사로 3년 동안 일을 했는데요. 일하면서 보니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것이 좀 더 안정되고 좀 더 많은 급여를 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승은 씨는 조리사 일을 하면서 요양보호사 자격증 공부를 시작했고 자격증도 취득했습니다. 이후 수원에 있는 한 요양원에서 요양보호사로 1년 정도 일했고 좀 더 나은 일자리를 찾아 2015년 8월 제주도로 이사하게 되었습니다.

김인선: 사람들마다 더 나은 일자리에 대한 기준이 조금씩 다릅니다. 급여가 더 많은 곳을 나은 일자리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고, 직원들에게 제공되는 복지가 좋은 곳이 더 나은 일자리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결국 개인의 선택사항인데요. 조건만 보지 말고 적성에 맞는 일을 해야 오래 일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이 말합니다. 승은 씨는 적성에 맞는 일을 잘 찾은 걸까요? 그녀의 못 다한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들어보겠습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에디터 이예진 웹편집 한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