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순희의 성공시대] 탈북민에게 찾아온 인생의 전환점 (2)
2024.11.14
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정경일 씨에 대해 이야기 나눠볼게요. 2007년에 한국에 입국한 분이셨죠?
마순희: 네. 정경일 씨는 평양에서 나고 자랐고 무역 관련 일을 하시는 아버지를 따라 외국 생활을 1년 정도 했을 정도로 좋은 집안이었는데요. 경일 씨 본인도 김일성종합대학을 나온 수재였습니다. 경일 씨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어울리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는 성격이었고, 북한에서의 이력 덕분에 한국에 입국한 후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을 하게 되었는데요. 아내와 두 아들이 먼저 한국에 정착해 있었던 덕분에 한국생활에 큰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비슷한 업무를 해도 회사 규모나 관련 분야의 경력 정도에 따라 급여가 다르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면서 잠시 혼란스러워 한 적이 있었는데요. 금방 적응을 하고 좀 더 급여가 높은 곳으로 재취업을 했습니다. 경일 씨의 주 업무는 취재를 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김인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걸 좋아했다면 기자가 적성에 잘 맞아 일도 잘했을 것 같은데 어땠나요?
마순희: 맞습니다. 경일 씨는 취재차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됐는데 탈북민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 나고 자란 분들까지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만난 많은 사람들 중에 김치공장 사장님도 계셨는데, 상품을 팔 수 있는 판로를 찾기가 어려웠던 사장님이 답답한 마음에 경일 씨에게 김치를 도매가격으로 넘겨줄 테니 판매를 해보지 않겠냐며 권했다고 합니다.
정경일 씨는 김치공장 사장님의 제안을 수락했습니다. 무역업을 하던 아버지를 따라 해외 생활도 해봤던 경일 씨였기에 상품 판매에 능통했습니다 경일 씨는 자신의 사업수완과 인맥을 동원해서 김치를 판매했는데요. 본업보다 훨씬 더 많은 수입을 얻게 될 정도로 결과가 좋았습니다. 정경일 씨는 이 경험으로 개인 사업을 하는 것이 회사에 다니는 것보다 벌이도 좋고 무엇보다 자신에게 잘 맞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신감이 든 경일 씨는 회사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김인선: 기자가 천직인 줄 알았는데 갑자기 인생 경로가 바뀌었네요. 살아가다 보면 ‘인생을 바꿔줄 만한 사람이 한 명씩은 나타난다’고 하는데요. 정경일 씨에겐 김치공장 사장님이 그런 분인가 봅니다. 사업가로 변신한 탈북민들 정말 많으시거든요. 하지만 모두가 승승장구 하는 게 아니라 실패도 맛보고 자신만의 비법과 전략을 찾아가면서 성공합니다. 정경일 씨도 자신만의 경영비법이 있었을까요?
마순희: 네. 특별하지는 않다고 하지만 경일 씨의 경영 비법 첫 번째는 ‘신뢰’입니다. 평생을 살아오면서 신뢰나 신임은 절대로 저버리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일관된 신조였던 정경일 씨입니다.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는 것이 영업의 첫째 가는 미덕이라고 생각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인지 한 번 거래한 사람들은 모두 그의 인품에 반해서 거의가 단골이 되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만큼 인맥이 탄탄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경영 비법은 어떤 일이든지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방법을 찾아내고 끝까지 해결하고야 마는 철두철미한 사고방식입니다. 정경일 씨 본인도 그런 사고방식이 기업 경영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볼 때는 한 자리에 머무를 줄 모르는 무한한 도전정신과 거기에 동반되는 해박한 지식, 특히 무역일군인 아버지를 따라서 외국 체류 경험도 많았던 경일 씨였기에 사업은 계속 확장되었던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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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을 시작한 후 몇 년 지나서 경일 씨는 단순히 김치를 판매하는 사업에 국한하지 않고 확장시켜 나갔습니다. 먼저 김치의 종류를 늘렸고 명태를 비롯하여 북한의 대표 먹거리를 통해 무역사업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또 평소 인맥이 넓은 덕분에 결혼 중매를 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걸 계기로 새로운 일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결혼정보회사에서 남성과 여성을 연결시켜 주는 업무를 전문적으로 하는 매칭 매니저 역할까지 경일 씨의 다양한 사업은 점점 더 번창해 나갔습니다.
김인선: 자본주의 사회에 제대로 적응을 하셨는데요?
마순희: 맞습니다. 사업가로 다양한 활약을 펼치고 있는 정경일 씨입니다. 최근에는 건강식품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는 추세를 감안해서 버섯공장을 새로 꾸리고 사업을 확장해 나가고 있습니다. 김치사업으로 시작한 사업이 이제는 무역을 통한 유통업으로 사업이 확장됐습니다. 흔히 한 가지 사업을 시작하면 그 사업 분야만 하는 경우가 많지만 정경일 씨 경우에는 김치사업과 건강식품, 대외무역에 이르기까지 정말 그 범위가 광범위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경일 씨가 사업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많은 탈북민 선배사업가들이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빈털터리로 시작했기에 남한 사람보다 경험도 더 풍부했고 그들에게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고 했습니다. 한 고향 사람이기에 마음을 터놓게 되기도 했는데 점차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면서 지금은 자신이 배울 수 있는 것에 있어서 한 고향 사람이라는 것이 더는 기준이 안 된다고 합니다. 자신이 배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누구에게든 배우려 하고 도리에 어긋나는 경우에는 친한 사이라 하더라도 가차 없이 지적하는 정경일 씨인데요. 내면의 자신감에서 비롯된 자신만의 철학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 것 같았습니다.
김인선: 사업 규모가 커질수록 챙겨야 할 직원도 늘고 위험 부담도 많아지거든요. 무엇보다 사업이 늘 잘되고 좋을 때만 있는 게 아닌데요. 정경일 씨는 그런 고비를 어떻게 이겨냈을 지 궁금해요.
마순희: 네. 정경일 씨는 위기가 생기면 상황에 맞게 사업체의 생산 방식이나 유통 방식 등에 변화를 준다고 하는데요. 회사 운영에 있어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정경일 씨의 또 다른 장점은 도움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발 벗고 나서서 도와준다는 것입니다. 꽤 많은 탈북민들이 기업가 분들의 후원의 손길로 도움을 받고 있는데요. 정경일 사장님도 어려운 이웃들을 돌보는 일을 우선으로 하고 있습니다. 자신처럼 건강하고 일할 수 있는 젊은 사람들인 경우에는 문제가 없지만 건강이 안 좋거나 육아 등 일을 할 수 없는 여성들 같은 경우에는 많은 관심을 가지고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 정 사장님의 일관된 신념입니다.
그래서 시간과 여유가 될 때마다 봉사활동을 많이 하는데요. 제가 대표로 있는 자조모임에도 도움을 주셨습니다. 작년에 북한 음식을 만들어 나눔 행사를 했는데 빵을 비롯한 많은 식품을 보내 주어서 어르신들이 얼마나 고마워했는지 모릅니다. 정경일 씨는 안팎으로 능력자이신데요. 유명 탈북민 예술단체의 이름 있는 무용수로 활약 중인 아내의 활동도 적극적으로 지지해주면서 행복한 가정을 꾸려가고 있습니다. 두 아들은 대학과정까지 모두 마치고 전문가로서 자신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정경일 사장은 식구들과 함께 하는 행복이 늘 생활의 원동력이 되고 삶의 보람을 느끼게 한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선 자리에서 기업가로서의 성공은 물론 행복한 가정과 이웃들을 위한 사랑의 마음을 담은 봉사와 후원까지 그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실천해 나가고 있는 정경일 사장님의 힘찬 하루를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김인선: 김치공장 사장님과의 인연으로 사업가가 된 정경일 씨. 어떤 한 사람과의 만남으로 인생이 바뀌었는데요. 이제는 경일 씨가 다른 분들의 인생을 바꿔줄 만한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사업도 계속해서 번창하시길 바라며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에디터 이예진 웹편집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