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순희의 성공시대] 탈북민 프로 N잡러의 꿈 (2)
2024.06.13
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한옥정 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볼게요. 옥정 씨는 선전대 출신으로 한국에 와서도 예술단 활동을 했는데 나중에는 음반까지 낸 가수로 활동하게 된 분이라고 했었죠?
마순희: 네, 맞습니다. 한옥정 씨는 기량이 뛰어난 덕분에 노동자 가정임에도 불구하고 고등중학교를 졸업한 후 선전대 활동을 할 수 있었는데요. 선전대 생활을 하면서 고가의 선전대 제복을 직접 장만해야 했기에 경제적인 부담이 컸습니다. 그보다 더 힘든 것은 개인의 목소리를 낼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주체발성법이라고 당국에서 원하는 목소리로 선전대 모두가 한 목소리가 되어 노래를 불러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언니가 갑작스러운 탈북을 하게 됐고, 그 뒤를 따라 어머니와 함께 탈북해 중국에서 고생하다 2003년 1월 한국에 입국할 수 있었죠. 옥정 씨는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을 나온 후 예술단 활동을 권유 받게 되었는데요. 한국에 가면 꼭 가수가 되고 싶다는 꿈을 키워왔던 옥정 씨였기에 마다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탈북민 예술단의 공연을 찾는 곳은 많지 않았고 수입도 일정하지 않았습니다. 옥정 씨는 무작정 방송국을 찾아가 가수가 되고 싶다고 했고 그 일이 계기가 되어 가수협회와 연이 닿으면서 가수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오랜 시간 꿈꿔왔던 가수였던 만큼 옥정 씨는 행복했다는데요. 탈북민 출신 가수라는 수식어로 시작한 것이었기 때문에 한국의 가수들처럼 창법을 고치고 노래를 부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옥정 씨는 한국에 도착한지 3년 만에 탈북여성 최초의 그룹인 ‘달래음악단’으로 활동을 시작하게 됐는데요. 팀을 이끄는 대표 역할까지 맡으며 각종 방송에 출연하고 축제 현장에 초대가수로 올랐습니다. 당시 ‘달래음악단’하면 한국에서는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로 유명세를 탔고 인기가 대단했는데요. 북한에서는 옥정 씨의 목소리가 환영받지 못했었기에 감회가 남달랐다고 합니다. 북한에서 예술선전대 활동을 할 때는 목소리에서 부르주아 냄새가 난다며 전투적인 억양과 목소리로 바꾸는 훈련을 혹독하게 해야 했는데 한국에 오니 특색 있는 목소리라고 환영을 받게 되었고 자신의 목소리로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김인선: 하지만 탈북민 예술단원들이 적지 않은 만큼 똑같은 북한식 창법으로 계속 노래를 하면 특색 있는 목소리라고 할 수는 없거든요. 옥정 씨만의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마순희: 맞습니다. 북한에서 온 가수라는 수식어는 언제까지나 가지고 갈 수는 없었기에 한옥정 씨는 한국예술대학 실용음악학과에 입학해 한국에서 새롭게 음악공부를 시작했고, 자신만의 창법을 찾기 위한 노력을 했습니다. 가수 활동도 활발하게 이어가면서 영화 음악, 드라마 음악에도 참여했고 대한민국의 유명한 국민배우인 이순재 선생님과 함께 광고도 찍었습니다. 방송 활동은 물론 전국의 군부대나 중고등학교, 대학교에서 통일안보강사로 강의도 했기에 매일매일 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 했습니다. 밤잠을 못 자며 열심히 일해야 했지만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노래 부를 수 있어 너무 행복했다는 옥정 씨입니다. 한옥정 씨는 자신의 재능을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는 일에도 앞장 섰습니다. 2016년에 남북주민이 함께하는 재능기부 봉사단체인 ‘남이랑 북이랑’을 만들어서 한국에 정착하시는 탈북민 어르신들과 함께 노래교실, 음식 나눔 봉사도 하고 또 건강이 안 좋으신 분들을 위한 의료봉사에도 참여했습니다.
김인선: 맡은 역할이 너무 많은 옥정 씨네요. 가수나 배우들 사이에 ‘물 들어올 때 노 저어라’는 말을 많이들 하더라고요. 일이 있을 때, 잘 나갈 때 더 열심히, 다 해내야 돈도 벌고 명성도 높아진다는 거죠. 하지만 그러다 쓰러지는 분들이 많다는 게 문제입니다. 옥정 씨도 관리를 잘해야 할 정도인 것 같은데요.
마순희: 맞습니다. 문화공연을 하시는 분들은 방송국에서만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전국을 돌아다니게 되고 특히 학교들이나 군부대 안보강의 등 많은 거리를 이동해야 하는 일정들을 소화하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유명 연예인들은 운전이나 일정관리를 돕는 매니저를 두고 있지만 옥정 씨는 그럴 형편이 안 되기에 모든 일정들을 혼자서 관리하고 자신이 직접 운전하면서 소화해 나가야 했습니다. 십여 년 넘게 그렇게 활동하다 보니 옥정 씨의 건강에 무리가 생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날 큰 행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옥정 씨가 쓰러지게 됐는데요. 과로와 스트레스가 심해서 간 건강에 치명적인 진단을 받게 되었고 활동은 물론 건강 유지에도 적신호가 켜졌습니다. 옥정 씨는 병원에서 지금과 같은 생활을 계속하면 회복 불가능하다는 진단을 받았는데요. 그 난관 역시 옥정 씨 답게 자신의 힘으로 이겨 나갔습니다.
이후의 공연이나 방송 일정은 물론 안보강의 일정까지 모두 양해를 구하고 취소했고 건강회복에 전념했습니다. 다행히 대한민국의 선진 의료와 유능한 의료진 덕분에 옥정 씨는 다시 건강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몸이 많이 망가진 후에야 옥정 씨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건강이라는 것을 가슴깊이 느끼게 되었다고 합니다. 좋아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도 좋지만 꼭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옥정 씨는 병원을 찾은 사람들에게 접수와 검사를 안내하고 처방에 따라 그에 맞는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행정실장으로 일을 하게 됐는데요. 건강의 소중함과 자연 치유의 산 증인이 되어 다른 사람들의 건강을 위해서도 조언과 도움을 아끼지 않고 있는 건강전도사로 거듭난 것입니다.
김인선: 건강상의 문제로 선택하게 된 길이라 마음 한 켠에 늘 아쉬움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제는 건강도 회복했는데, 노래에 대한 아쉬움이 없을까요?
마순희: 처음에는 무대를 뒤로 하는 것이 많이 아쉽고 마음이 아팠지만 우선 자신의 건강이 문제가 되다 보니 그런 마음은 둘째였다고 합니다. 자신만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가족들, 특히 딸을 생각하면 부모로서의 자신이 더 소중했던 옥정 씨였습니다. 옥정 씨에게는 딸이 있는데요. 여섯 살 때 중국에서 데려왔습니다. 그 딸이 지금은 대학을 졸업하고 엄마의 든든한 조력자이자 친구로 옥정 씨 곁에 있는데요. 딸 곁에서 오래도록 함께 하고 싶기에 오랜 꿈이었던 가수를 내려두고 병원의 행정실장으로서의 업무에 충실하고 있습니다.
노래에 대한 아쉬움은 자신만의 공간에서 달래고 있다는데요. 옥정 씨는 자신의 집 한 공간에 방음장치와 조명, 음향장치까지 다 갖춘 근사한 녹음실을 만들어서 노래도 마음껏 부르고 녹음도 하고 있습니다. 또 가끔이지만 잊지 않고 찾아 주는 사람들의 초청으로 병원 근무가 없는 날, 지역축제나 강의도 조금씩 참여하고 있습니다. 자연 속에서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딸과 함께 야영활동인 캠핑도 가고 맨발 걷기, 그리고 한강을 끼고 자전거를 타면서 건강을 위한 투자와 노력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잃어봐야 소중한 줄 더 알게 되잖아요? 옥정 씨는 건강의 소중함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가족들에게는 물론 병원을 찾아오는 환자들에게도 최선을 다하는 건강 전도사로 살고 있습니다. 매일 무대에 서지는 않지만 옥정 씨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노래도 부르고 가수 한옥정을 그리워하는 사람들과 소통도 하며 행복을 찾아가고 있는데요. 그녀의 음악 한 곡 들으면서 오늘 하루를 기분 좋게 시작해 볼까 합니다.
김인선: 노래로 위로와 희망을 주더니 이제는 상담과 자연식 전파로 많은 사람들의 건강을 챙겨주네요. 어디에 있든 옥정 씨가 있는 그곳이 멋진 무대가 되는 것 같습니다. 노래하는 건강전도사 한옥정 씨의 또 다른 무대를 응원하며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에디터 이예진,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