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 허영철 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볼게요. 영철 씨는 탈북민 초기정착 교유기관인 하나원에서 지낼 때 캠코더를 처음 접하고 첫 눈에 반했다고 했어요. 그래서 자신도 영상 촬영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꿈까지 생겼고요.
마순희: 네. 그렇습니다. 영철 씨가 하나원에서 지낼 때 자원봉사자가 영상을 찍는 비디오 카메라인 작은 캠코더로 탈북민들의 일상을 촬영하는 모습을 보게 됐는데, 며칠 지나서 편집된 영상을 보여주더랍니다. 영상을 본 영철 씨는 자신도 그런 영상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하나원을 나오자마자 캠코더부터 구입했습니다. 하지만 당장 급한 것은 돈을 버는 일이었습니다. 영철 씨는 몸이 허약한 아내와 어린 딸을 데리고 탈북한 가장이었기 때문입니다. 영철 씨는 부산에서 한국 정착을 시작했고 하루 단위로 근로 계약을 하고 보수를 받는 일용직 근로자로 일했습니다. 밤이면 카메라 관련 서적을 펼치며 독학으로 캠코더를 알아가며 자신의 꿈을 놓지 않았는데요. 독학으로 영상 공부를 하며 꿈을 향해 달려가던 중 신문에 실린 서울 지역의 영상교육 광고를 보게 됐습니다. 6개월 과정의 교육이었는데 영철 씨는 배우겠다는 일념 하나로 무작정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숙소는 24시간 운영되는 찜질방에 한번 가보고는 이후로 쭉 묵게 됐는데요. 한국의 찜질방에는 수면실부터 식당까지 없는 게 없었습니다. 영철 씨는 영상 교육에만 집중하면 됐습니다. 온통 영어로 된 영상 편집 기술을 배우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천 번 넘게 연습하며 기능들을 외우고 익혔습니다. 영철 씨가 학원에 등록할 때 학원 측에서는 40이 넘어 영상을 배우겠다고 찾아온 사람도 처음이고 영상 편집에 필수적인 컴퓨터를 하나도 다루지 못하는 사람도 처음이라 난색을 표했었습니다. 그런데 6개월의 교육 기간을 마친 후 허영철 씨는 본격적으로 영상 촬영 일을 시작할 수 있을 만큼 실력이 늘었습니다. 영상과 편집에 자신감을 갖게 된 영철 씨는 부산에 내려가 꿈 꿔왔던 영상 제작을 실현했습니다. 첫 작품은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배경으로 한 다큐멘터리 제작이었는데요. 영철 씨 집안의 역사를 담은 작품, 제목은 ‘뿌리’입니다.
김인선: 영철 씨의 가족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있었나요?
마순희: 네. 그렇습니다. 영철 씨의 아버님이 6. 25전쟁 때 남한으로 진격해 왔다가 부상을 당한 후에 거제도 수용소에서 생활했던 포로 교환병이셨습니다. 영철 씨의 아버지는 전쟁이 끝난 후 북한에서 기록영화 촬영소에서 근무하셨다고 해요. 그때 아버지가 어깨에 메고 다니던 촬영기가 그렇게 멋있어 보였고, 자신도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영철 씨가 하나원에서 캠코더를 보고 첫 눈에 반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영철 씨가 첫 작품으로 아버지의 이야기를 담았다고 했잖아요? 사실 북한에서 포로 교환병은 겉으로는 신임하는 척 해도 늘 잠재적인 감시 대상이었습니다. 남한에서 간첩 임무를 받아 가지고 왔다는 의심을 받고 있었기에 영철 씨 아버지는 평양에서 계속 근무하지 못 하고 지방의 도시 문화회관에서 근무하게 됐는데 이때도 촬영만은 멈추지 않았다고 합니다. 영철 씨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에도 생전에 들려주시던 포로수용소에 대한 이야기들은 영철 씨의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기에 한국에 정착하면서 거제도에 직접 가봤습니다.
아버지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들을 되새기며 아버지의 이야기들이 모두 사실이었음을 알게 되었는데요. 영상 기술을 배운 후 영철 씨는 다시 거제도를 방문해 영상을 제작했습니다. 포로로 거제도를 찾은 아버지와 관광객으로 거제도를 찾은 자신을 교차해서 담은 이야기로 영화제에 출품도 했습니다. 영철 씨의 첫 작품은 2005년 부산영화제에서 입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김인선: 영화제에서 상을 받을 정도면, 영철 씨의 영상 제작 실력은 검증된 거죠. 실력을 알아보고 업계에서 연락이 오면 좋겠는데요. 이후로 영철 씨가 그토록 바라던 영상 제작 일을 본격적으로 할 수 있었을까요?
마순희: 맞습니다. 다행히 영철 씨는 부산 지역의 방송국에서 프로그램 한 편을 제작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한편의 영상 제작만으로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어려웠기에 여러 가지 부업까지 하면서 돈을 벌었습니다. 아내도 상점에서 일하며 경제적으로 적극 뒷받침해 준 덕분에 영철 씨는 영화대본(시나리오) 쓰는 공부도 병행할 수 있었습니다. 부부가 함께 노력하다 보니 본인 명의로 된 상점을 낼 수 있을 만큼 생활이 안정됐습니다. 부부가 함께 운영한 상점은 크게 성공했고, 한국 정착 3년째 되는 2005년에는 부산에 150평(495제곱미터)규모의 영상을 제작하는 작업실도 임대로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영철 씨는 더 활발한 활동을 하게 됐고, 2008년에는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사도 했습니다. 언젠가 영화를 찍고 싶다는 꿈을 이루고 싶어서였습니다.
하지만 서울에 올라온 영철 씨는 부산에서처럼 자신의 사무실을 내지 않았습니다. 정부 기관에서 계약직 공무원으로 3년 정도 근무하기도 했고 영상 촬영 업체에 입사해서 근무하면서 두 번째 사업을 할 수 있는 기반부터 마련했습니다. 실무와 기술, 사업 능력까지 차근차근 준비하며 자신만의 사무실을 내고 사업을 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 영상 촬영 업체를 설립했습니다. 2013년이었으니까 서울에 올라온 지 6년 만이었습니다. 영철 씨는 본격적으로 촬영, 편집 활동을 펼쳐 나갔고 점차 사업을 확장시켰습니다. 지금은 경기도 김포시에 영화 촬영까지 가능한 공간도 마련했을 정도로 허영철 씨는 큰 규모의 사업을 펼쳐 나가고 있습니다. 촬영에 필요한 모든 장비와 장소까지 갖추고 실력까지 겸비하다 보니 정부부처 행사 등 큼직한 행사들을 거의 도맡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실제로 어울림 한마당, 탈북민 노래자랑, 정착 성공사례 발표모임 등 중요한 행사 때마다 카메라를 멘 허영철 감독님의 멋진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김인선: 지금도 현장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허영철 씨인데요. 앞서 최종 꿈이 영화를 제작하는 것이라고 했잖아요. 그 꿈 역시 차근차근 이뤄나가고 있는 중이겠죠?
마순희: 그렇습니다. 요즘 영화 촬영으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합니다. 머지않아 영화관에서 허영철 감독님이 만든 영화를 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이번 작품의 제목은 '도토리'라고 합니다. 실지 우리 탈북민들이 겪어 왔던 탈북과 중국 생활, 그리고 대한민국으로 오는 험난하고 목숨을 건 노정을 담았다고 하는데요. 출연하는 배우들도 탈북민이라고 합니다. 영철 씨는 배우들의 실감나는 연기를 볼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습니다. 관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해 예고편처럼 만든 티저 영상을 먼저 볼 수 있었는데요.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보는 내내 가슴이 울컥하고 저절로 눈물이 흘러내리더라고요. 제가 받은 감동을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할 수 있는 그날이 벌써 기대됩니다. 영상을 통해 자신의 사상이나 생각을 언제든지 피력할 수 있는 자유가 있고, 일한 만큼의 보상도 받으며 자신이 바라는 꿈을 펼쳐나갈 수 있는 대한민국에 충분히 감사하다는 허영철 감독님이시기에 이번 감독님의 영화도 역시 대박이 나리라 믿습니다. 허영철 감독님, 파이팅입니다!
김인선: 어떤 분야에서든 독보적인 존재가 있기 마련인데요. 탈북민 관련된 영상물 제작에서 허영철 감독이 그런 존재인 것 같습니다. 지금 준비 중인 영화가 벌써부터 기대되는데요. 그토록 바라던 영화 제작의 꿈을 실현해 나가는 허영철 감독님을 여기는 서울에서도 응원하겠습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릴게요.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에디터 이예진,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