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은 내 운명, 요리강사 윤명희 씨(1)

서울-김인선 xallsl@rfa.org
2018-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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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배경청소년지원재단 무지개청소년센터의 한식조리기능사 양성 프로그램 '꿈을 잡(Job)아라' 2기 훈련생들이 요리 실습 하는 모습.
이주배경청소년지원재단 무지개청소년센터의 한식조리기능사 양성 프로그램 '꿈을 잡(Job)아라' 2기 훈련생들이 요리 실습 하는 모습.
연합뉴스 제공

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김인선: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네. 요즘 남쪽 텔레비전 프로그램 중에는 먹는 음식과 관련된 방송이 참 많은데요. ‘오늘은 뭐먹지’, ‘집밥 백선생’, ‘다해먹는 요리학교’, 그 수를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돕니다. 자연스럽게 요리하는 방송을 접해서일까요? 음식을 만드는 일, 요리사를 꿈꾸는 사람들이 많은데요. 오늘의 주인공도 요리를 하는 분이라고요?

마순희: 네. 오늘 소개할 주인공 윤명희 씨는 올해 57살로 군산 명문 요리직업학교에서 강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2015년부터 지금까지 4년째 강사로 근무 중인데요. 지금도 열심히 제자들의 취업과 창업을 위해 강의를 하고 있답니다.

김인선: 윤명희 씨가 요리를 가르쳐 주는 요리강사라고 하셨는데요. 중식도 있고 한식도 있고 일식도 있고 그 종류가 참 많잖아요. 명희 씨는 어떤 요리를 가르치나요?

마순희: 네. 명문직업전문학교의 대표적인 과목인 한식을 가르칩니다. 명희 씨를 만나기 위해 군산으로 갔을 때 교장선생님의 승인을 받고 수업하는 모습을 들어가서 보았는데요. 제가 갔을 때 요리는 전골요리였습니다. 신선로처럼 생긴 작은 용기에 부챗살처럼 고기와 여러 가지 남새 등을 예쁘게 썰어 넣고 바글바글 끓이고 있었습니다. 두부는 물론 편육을 자르고 지단을 가늘게 써는데 자로 재면서 일일이 점검하는데 만만치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여 명의 교육생들이 있었는데 때로는 엄한 교사답게, 때로는 누이동생이나 엄마 같은 모습으로 농담도 섞어 가면서 가르치고 있는 명희 씨의 모습이 과연 전문가다웠습니다. 깔끔하고 세련된 복장에서부터 질서정연한 조리도구와 설비들에서도 전문 직업훈련기관의 대표강사 면모가 엿보이기도 했습니다. 명희 씨의 수업을 듣는 수강생들은 자신이 만든 요리는 모두 도시락에 싸 가지고 가는데 식구들 앞에서 요리솜씨를 뽐낼 수 있게 되었다면서 행복한 웃음을 보이며 돌아가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답니다.

김인선: 저도 빈 도시락 하나 들고 찾아가고 싶은데 너무 멀리 계시네요. 많은 탈북민들이 정착지역으로 수도권 지역을 선호한다고 들었는데 명희 씨가 군산을 거주지로 선택한 이유가 있나요?

마순희: 네. 윤명희 씨는 북한에서도 바다를 끼고 있는 함흥시에서 살아와서인지 바다 가까이에서 살고 싶기도 하고 또 조용히 살고 싶다는 마음에 지방인 군산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막상 혼자 살기 시작해보니 고향사람들도 없고 가족도 없어서 외로움이 컸다고 하더군요. 허나 중국에서 두 딸들을 데려오려면 무엇보다 돈을 많이 벌어야 했습니다. 여성들이 가장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일자리가 식당이잖아요. 주방에서 설거지부터 시작해서 일거리를 찾아 뭐든지 했습니다. 그런 노력이 있었기에 2년 후에는 중국에 남겨졌던 두 딸도 한국으로 데려오게 되었습니다.

한결 마음의 여유가 생기게 된 명희 씨는 남한의 대학에서는 어떻게 배우는지 궁금하게 생각되더랍니다. 어느 날 함께 일하던 지인한테서 남한에서는 나이 먹은 사람들도 대학공부를 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대학공부를 해보고 싶다고 했더니 대한민국에는 넘쳐나는 것이 대학졸업생이라며 연세도 있으신데 일하면서 돈이나 벌어라 하는 식으로 이야기 하더랍니다. 그 말이 자신을 생각해서 한 말일 수도 있지만 무시하는 것 같기도 해서 서운한 마음도 들더래요. 그런데 그 말이 오히려 자신이 꼭 대학공부를 해보겠다는 결심을 다지게 하는 계기가 된 것 같다면서 웃으며 이야기하더군요.

김인선: 그런데 보통 탈북 청년들도 자신들이 공부를 하기엔 늦었다고 생각을 하고 기술을 배우거나 취업을 먼저 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명희 씨는 나이가 훨씬 많았음에도 대학진학을 꿈꿨다는 것이 인상적이에요.

마순희: 사실 윤명희 씨는 북한에서 교원대학을 졸업한 대학 졸업생이었거든요. 그래서 탈북민 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센터의 상담사 선생님들의 도움을 받아서 낮에는 일하고 밤이면 서해대학 야간학부 호텔조리학과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궁금증으로 입학했지만 공부를 시작하다보니 반드시 졸업해야 하겠다는 욕심이 생겼다는데요. 그러나 낮에는 식당에서 일하고 밤에 대학공부를 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답니다. 체력에 한계가 온 거죠. 결국 어느 날 갑자기 심한 허리통증으로 병원에 실려 갔고 척추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공부를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답니다. 하지만 지금 포기하면 앞으로 어떤 것도 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에 악착같이 공부를 계속했고 피타는 노력 끝에 영양사 시험에 합격하게 됐다더군요. 영양사는 균형 잡힌 식단을 짜고 식품 재료 선정부터 급식시설 관리까지 전반적인 업무를 해야 하는 보건 전문인이라서 시험에 합격하기가 쉽지 않다고 하던데 명희 씨의 노력이 얼마나 많았을지 짐작이 되더군요.

실제로 명희 씨는 힘든 시간이었지만 북한에서도 중국에서도 자신의 노력으로 성취감을 느껴 본 적이 거의 없었기에 더더욱 소중한 자격증이었고 나도 노력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안겨 준 계기가 되었다고 말하더라고요. 사실 명희 씨는 북한에서 살 때 처녀시절에는 검찰서 당 비서를 지내던 아버지 밑에서 고생을 모르고 자랐고 교원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귀국자(일본에서 귀국선을 타고 북한에 온 가족)인 남편을 만나다보니 경제적인 어려움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살았습니다. 혼자 뭔가를 결정하고 선택하는 삶이 아니었던 거죠. 남편의 사망 이후에 삶이 달라진 것인데요. 거간꾼에게 팔려 중국에 가서도 하루하루 무의미하게 살던 명희 씨가 한국에 와서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김인선: 많은 탈북여성들이 가족, 특히 자녀들 때문에 악착같이 그리고 열심히 사는 모습을 많이 봤거든요. 명희 씨를 변하게 만든 것도 역시 가족인가요?

마순희: 맞습니다. 거간꾼에게 팔려 중국에 가게 됐을 때 명희 씨 뿐 아니라 딸들도 중국인 남성에게 팔려가게 되면서 생이별을 하게 되었던 겁니다. 같은 중국에 있었지만 마음 놓고 연락 할 수 없었다는데요. 딸들과 연락하면 도망갈 모의를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명희 씨를 데려간 중국인 남성은 전화도 할 수 없게 자신이 집에 없는 날이면 전화선도 모두 숨겨놓기도 했습니다. 그리고도 자신의 기분이 언짢거나 하면 어떤 구실을 붙여서라도 행패를 부리기가 일쑤였대요. 어떤 때에는 명희 씨의 온 몸이 멍이 들도록 때리기도 했답니다. 견디다 못 한 명희 씨는 도망을 치게 되었고 캄보디아를 거쳐서 무사히 대한민국으로 오게 된 거죠.

그렇게 시작한 한국 생활인데 2년 만에 두 딸들을 데려왔으니 그동안 명희 씨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을지 저는 충분히 그려집니다. 하지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명희 씨의 삶엔 두 딸과 요리전문학교의 강사 일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또 다른 하나가 생겼습니다. 함께 남은 인생을 살아갈 남편인데요. 두 딸이 결혼하고 살림을 나갔기에 지금은 남편과 둘이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합니다. 남편이 이제는 집에서 좀 쉬라고 해도 명희 씨는 자신의 노력으로 일구어낸 일을 놓지 않고 즐기면서 요리강사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데요. 그 모습이 무척이나 행복해 보여서 만나는 내내 저도 덩달아 기분이 좋았답니다.

김인선: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찾아내고 몰두하는 것은 행복한 일이라고 하는데요. 그런 면에서 명희 씨는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요? 요리 강사 명희 씨의 못다한 인생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계속 이어가도록 할게요.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릴게요.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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