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로 보는 북한] 다시 불어오는 ‘1941년도 바람’
2025.01.07
-‘소일 중립조약’으로 수많은 항일운동가가 투항했던 1941년
-왜 지금 ‘1941년’이 소환되나?
-시대적 어려움? 러시아에 대한 동경 차단? 결국은 ‘김정은에 대한 충성’
[진행자] 지구상에서 가장 폐쇄된 국가 바로 청취자 여러분이 살고 계신 북한입니다. 내부 문서를 통해 오늘이 북한을 만나보는 [문서로 보는 북한] 진행에 안창규입니다.
오늘의 문서는 <간부 당원 근로자 대상 학습제강 ‘41년도 바람’의 주인공들이 지닌 투철한 혁명적 신념에 대하여>입니다. 김지은 기자 안녕하세요.
[김지은 기자] 네, 안녕하세요. 안 기자님은 이 영화를 보셨습니까?
[진행자] 안 본 사람이 있을까요? 북한이 혁명 전통 교양이 산 교과서라고 자칭하는 항일 빨치산 회상기에 나오는 내용을 영화로 각색한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1940년대 초 김일성이 인솔하던 부대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부풀려 만든 영화로 빨치산 중대장이었던 지갑룡이라는 인물의 변절에 대한 내용이지요.
일제를 반대하는 항일 투쟁을 오래 한 혁명가들도 혁명 승리에 대한 신념이 없으면 결국 배신과 변절의 길로 굴러떨어지게 된다는 것이 이 영화의 핵심 주제였습니다. 북한에서 주민들에게 별로 인기를 얻지 못한 영화였다고 생각되는데, 김 기자도 보셨습니까?
[김지은 기자] 그럼요, 인기는 없었지만 때마다 자꾸 소환되네요. 북한 주민들도 그 자리에 앉혀 놓으니까 보긴 하겠지만 정말 눈이 감기는 영화였습니다. 이 학습제강에서는 ‘41년도 바람’을 집체적으로 시청하고 토론한 뒤 주인공들의 사상 세계를 해설하라고 지시하고 있습니다.
[진행자] 문건에서 먼저 짚어볼 부분은 분명해 보입니다. 조선 예술 영화 촬영소가 1991년에 제작한 영화를 왜, 지금 전 주민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학습 자료에 등장시켰는가 하는 것입니다.
30여 년 전에 제작된 오랜 영화가 갑자기 중요해진 다른 이유가 있거나 아니면 지금의 상황이 1941년 봄과 비슷하다는 의미라고 보이는데요?
[김지은 기자] 네, 지금의 현실이 41년도만큼 바쁘다 또는 혼란스럽다, 저도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또 당시 항일 투사들이 영화 속에서 수령을 따른 것처럼 지금은 김정은을 따르라, 41년도의 영웅들처럼 살아라 이런 것이겠죠.
이 영화는 이번 학습제강뿐 아니라 지난 2023년 2월, 노동신문에도 두 차례나 등장했습니다. 2월 4일자 1면에 ‘빨치산 정신으로 산악같이 일떠서 용진하자’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41년도 바람은 지나간 역사가 아니다, 항일 투쟁 시설 만주의 눈보라는 지금의 시련과 동급이다. 그리고 그걸 넘어서게 하는 것은 수령에 대한 절대 충성’이라고 밝혔습니다. 또 26일 기사에서는 영화를 소개하면서 항일 투사들이 지녔던 투철한 신념을 강조한 바 있습니다.
[진행자] 영화의 배경인 1941년 어떤 일이 있는지 청취자 여러분도 잘 아실 겁니다.
1941년 봄, 정확하게는 4월 13일 모스크바에서 ‘쏘일 양국 간 중립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이 조약이 체결된 1941년의 상황에 대해 한국과 북한의 평가가 크게 차이가 있어 보이진 않습니다. 북한은 독일의 침공이 기정사실화된 상황에서 전쟁 준비가 미약했던 소련이 일본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다시 말해서 동서 양쪽에서 두 개 전쟁을 치르는 상황을 막기 위해 전략적으로 조약을 체결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반대로 일본에 대해서는 소련과의 중립 조약을 통해 자기들이 차지한 중국, 동북 지역의 안정과 동남아 지역 침공에 집중하려 했다 이렇게 설명합니다.
두 국가의 이해관계 산물인 이 조약은 당시 김일성 부대를 비롯한 동북 지역의 빨치산 부대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김지은 기자] 영화 속에서 바로 이 ‘쏘일 중립 조약’으로 인해 주인공 운석은 흔들리고 결국에는 배신을 하게 되죠.
강연 제강에도 이 조약에 대해 평가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조약의 골자는 쌍방이 평화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 그리고 호상 영토의 보존과 불가침을 존중한다는 것, 어느 일방이 제3국과 분쟁 상태에 들어가는 경우 중립을 지킨다는 것이다”, “조약이 체결된 사실은 쏘련을 믿고 혁명의 길에 나섰던 사람들에게 커다란 실망과 비관, 동요를 가져다 주었다”고 밝혔습니다.
실제로 소련은 당시 ‘쏘일 중립 조약’을 체결하면서 일제 식민지 조선인에 대해서는 학살, 일본 제국에 대해서는 대등한 중립 조약을 맺으며 이중적인 태도를 보여줬습니다. 또 이 조약으로 일본은 쏘련으로부터 각종 지하자원을 공급받고 전쟁 수행에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적으로 영화에 등장하는 1941년, 이 시기에 김일성이 어디에 있었는지 생각을 한번 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김일성은 러시아 원동 지방에 있었습니다. 일종의 피신이었죠. 일제가 관동군 대토벌을 시작한 이후 소련-만주 국경을 넘어 러시아로 몸을 피신한 것이죠. 만주에서는 당시 소규모 전투를 했다고 하지만 실제로 전투라기보다는 도망을 다니는 그런 차원이었습니다.
[진행자] 당시 중국 동북 지역에서 활동하던 김일성 부대는 물론이고 최현, 김책, 최용건, 허형식 등 조선인들이 이끄는 빨치산 부대는 다 중국 공산당에 소속돼 있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이들은 먼 남방에서 장개석 국민당과 대치하느라 바쁜 중국 공산당보다는 소련과 그의 지배를 받는 국제당의 지시를 많이 받았다고 알려졌습니다. 그런 구세주 같은 소련이 일본과 중립조약을 체결하니 일부 빨치산들이 소련이 자신들을 배반했다, 또 일제와 싸우는 건 승산이 없다고 신념이 흔들린 건데, 실제로 이 시기, 김일성 부대 참모장이던 임수산과 김일성보다 직급 경륜이 높은 황포군관학교 출신 정광, 본명 오성윤 등 주요 인물들이 줄줄이 일본에 투항했습니다.
북한 당국이 지금의 국내 상황이 ‘소일 중립조약’이 체결된 1941년 봄과 마찬가지로 어렵고 따라서 주민들의 혁명적 신념 즉 김정은과 노동당에 대한 충성과 신뢰가 약화될 여지가 있고 보고 있다는 얘기겠죠.
[김지은 기자] 그렇습니다. 그리고 힘들고 어려운 시기, 주민들의 어려운 삶보다 북한 당국이 우려하는 건 ‘충성심 약화’라는 점도 분명합니다.
문서에서는 “이런 시기를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혁명적 신념, 즉 수령에 대한 절대적 믿음에 기초한 투철한 신념으로 이겨 나가자”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또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배신하면 죽음”이라는 메시지를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문건에서는 “항일 혁명 투사들에게 있어서 위대한 수령님은 마음의 기둥이었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니 지금은 ‘김정은 위원장을 따르라’바로 이 말을 하기 위해서 이 영화를 다시 꺼내 들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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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자] 중국 동북 지역에서 활동하던 항일 빨치산에게 가장 어려운 시기였던 1938년 겨울입니다. ‘고난의 행군’이라고 불리는 시기죠. 이 어려움은 일본의 대토벌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1941년 봄의 어려움은 소련에 의해 조성된 것입니다.
최근 북한이 러시아와 극도로 밀착하는 분위기에서 당시 소련의 약점이 언급되는 학습 자료가 등장하는 건 좀 모순된다는 생각도 듭니다.
[김지은 기자] 네, 저도 동의합니다. 표면적으로는 북한이 러시아와 가깝고 또 주민들 속에서도 러시아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고 있는 시기인 것은 분명합니다. 러시아에서 밀이 들어오면 밀을 먹고, 안 들어오면 굶고… 이런 시기이니 주민들이 러시아에 갖는 기대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죠. 그러니 북한 당국은 이걸 차단하려 할 겁니다. 항상 북한 당국은 중국이나 또는 러시아 등 다른 나라와의 밀착을 외부에는 크게 자랑하지만 내부적으로는 인민들에게 비방하는, 이런 이중적인 모습을 취해 오지 않았습니까?
[진행자] 영화도, 영화를 이용해 당국이 주장하는 내용도 심지어 주민의 삶이 어려움에 처한 것도 뭐하나 바뀐 것이 없습니다. 단 하나 충성을 바쳐야 하는 대상은 김일성에서 김정은으로, 그거 하나만 바뀐 것 같습니다. 다음 시간에 남은 내용 이어가겠습니다. 김지은 기자 수고했습니다.
[김지은 기자] 감사합니다.
[진행자] 진행에 안창규였습니다. 저희는 다음 시간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에디터 이현주, 웹편집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