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10년 차이] 글이 길어야 충성심이 깊다?
2024.12.02
“안녕하세요, 함경북도 무산 출신으로 올해 남한 정착 10년 차인 박소연입니다”
“양강도 혜산 출신으로 이제 막 한국에 정착한 이해연입니다”
10년 차이로 남한에 입국한 탈북민 선후배가 전해드리는 남한정착 이야기.
<우리는 10년 차이>
박소연 : 해연 씨, 안녕하세요. 요즘 많이 바쁜가 봐요. 얼굴에 떡하니 쓰여있는데요?
이해연 : 대학 기말시험으로 리포트를 제출하라는 과제를 받았어요. 선배님, 리포트 써보셨습니까?
박소연: 써봤죠. 한국 리포트 어렵죠? (웃음) 리포트는 어떤 주제에 관해 다양하게 조사해 내용을 요약하고 마지막에 자신의 견해를 밝혀 제출하는 과제물인데요, 의미는 알죠?
이해연 : 뭔지는 알아도 정작 하려고 하니 너무 어려워요.
박소연 : 북한 대학에도 남한의 리포트와 비슷한 과제가 있어요. 북한은 대학에서 배운 내용만 정리하면 되지만 남한은 과제에 부합한 다양한 내용을 정리하고 꼭 자신의 견해나 분석이 들어가야 합니다. 어렵지만 배우는 것도 많이 과제입니다.
이해연 : 미리 써 보신 선배님께 오늘 도움을 좀 청해도 될까요?
박소연 : 그럼 제가 혁명적으로 도와드릴까요.(웃음) 먼저 어떤 걸 주제로 리포트를 쓸지가 중요해요. 주제가 뭐죠?
이해연 : '창업의 성공 요건'이 주제입니다. 제 전공 과목은 세무이고 그 외에 필수적으로 들어야할 사화 과목이 있는데 이번 리포트는 사회 과목의 과제입니다.
박소연 : '창업과 세무', 제목만 들어도 연관성이 있네요. 혹시 창업에 대해서 조사는 해봤습니까?
이해연 : 자료는 많이 찾았는데 요약을 못 했어요. 생각보다 범위가 넓어서 먼저 뼈대를 잡아야 하는데…
박소연 : 그게 어렵죠. 북한 사람들이 대부분 글 쓰는 걸 무서워 하진 않아요. 워낙 짧은 글짓기를 많이 해서 그렇죠. 탈북민들도 어떤 글이든 쓰라면 이 정도쯤이야 눈 감고도 한다고 생각하는데 막상 닥쳐보면 정말 다르죠. 북한 짧은 글짓기처럼 줄줄 쓰면 리포트가 아니라고 하거든요.
이해연 : 글 쓰는 방식이 좀 다르긴 합니다. 특히 북한에서는 틀에 맞게 짜인 어떤 보고서를 그냥 줄줄이 외워서 쓰는 경우가 많잖습니까? 그리고 의견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박소연 : 예를 들어 수령님의 교시와 말씀을 기본으로 해서 그걸 따르기 위한 우리의 결의문을 작성했지, 남한처럼 어떤 논문이나 주요 기사들을 근거해서 인용하고 분석하는 게 아니잖아요. 특히 북한 문장은 반복되는 문구가 많고 길어요. 또 글을 길게 써야 당에 대한 충성심이 많다고 여겼는데, 남한에선 간략하게 쓰래요.
이해연 : 남한은 글을 쓸 때 정보 전달에 핵심을 두지만, 북한의 경우에는 글 길이가 충성심이죠. 그래서 이것저것 일단 많이 갖다 붙여 늘리는데 리포트를 그렇게 쓰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박소연 : 이번 리포트 주제가 '창업의 성공 요건'이라고 했죠? 그럼 해연 씨, 일단 창업이 뭐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요즘 창업은 뭐가 추세인지도 중요할 것 같고요.
이해연 : 제가 이걸 공부하기 전까지는 창업은 단순히 식당이나 커피숍을 차려 운영하는 것만 생각했는데 정말 범위가 넓고 많습니다. 세상이 워낙 빠르게 바뀌고 새로운 기술이 나와서 그런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단순히 옷을 만들어 파는 것도 예전에는 옷의 모양, 색상, 추세를 따라가는 것이 중요했지만 요즘은 옷으로 이야기를 만들어서 팔아요. 옷에 큐알코드라는 것을 작게 인쇄해 놓고 구매자가 그걸 휴대전화 카메라로 찍으면 동영상이 재생되거나 소설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거죠.
박소연 : 그거 젊은 탈북민 디자이너가 창업한 사업인데요. 단추나 주머니 옆에다가 코드를 넣어서 그걸 휴대 전화 카메라로 찍으면 한 사람의 인생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탈북민들의 기가 막힌 이야기가 담겨있어요. 그러니까 말하자면 단순히 옷을 파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도 함께 판매하는 의미 있는 사업입니다.
이해연 : 그렇군요… 그리고 요즘은 인공지능 같은 첨단 산업 분야의 창업도 많은 것 같습니다. 이런 부분은 국가 지원 사업이 정말 많은 것 같습니다.
박소연 : 인공지능하면 바로 로봇과 연관이 되는데요. 북한에서 살 때는 로봇이 사람을 대신하는 세상이 온다고 하면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며 믿지 않았는데 지금, 북한을 빼고는 거의 모든 국가에서 가능한 세상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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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연 : 특히 남한은 창업을 국가 지원해 주던데 왜 지원을 해죠? 탈북민 창업 지원도 진짜 많더라고요.
박소연 : 탈북민 창업과 관련해서는 정부, 지방자치단체는 물론이고 남북 하나 재단, 통일부에서도 해줘요. 현재 남한에 탈북민이 3만 4천여 명 정도 있는데 창업해서 사업체나 상점, 식당을 운영 중이거나 시작하려는 탈북민들이 많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았던 탈북민 창업 사례는 ‘달리는 수리소’라고 이동 수리점을 운영하는 분입니다. 쉽게 설명하면 물건을 맡길 사람과 수리할 사람이 중간 장소에서 만나, 그 자리에서 바로 고장난 물건을 수리해주는 겁니다. 장점은 어디든 수리하러 갈 수 있다는 것이죠.
한 가지 더 소개한다면 결혼 후 아이를 양육하는 탈북 여성들에게 요즘 ‘24시 무인 편의점’ 창업을 많이 지원하는데요. 직접 상점에 나가지 않고 카메라를 통해 집에서 지켜보며 편의점을 운영할 수 있습니다. 탈북 여성들의 경제적 자립을 돕는 거죠. 그러나 가능성도, 의미도 없는 창업은 지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심사 과정도 아주 까다롭습니다.
이해연 : 왜 이렇게 창업을 지원하나 생각해봤는데요, 앞으로 인공지능이 발전하면 많은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라는 뉴스가 매일 나오잖아요? 사람들의 일자리가 사라지는 만큼 창업을 통해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고 동시에 새로운 산업군을 만들어보고자 하는 의도인 것 같습니다.
박소연 : 저도 동의해요. 특히 청년, 중장년도 창업을 지원해 주는데요. 청년들은 새로운 분야에 도전해봐라… 이런 의미로 보이고 중장년층은 은퇴 이후의 일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탈북민의 창업은 이를 통해 남한 주민들과 탈북민들을 서로 통합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섞여서 함께 일하게 되는 것만큼 서로를 잘 알게 되는 방법은 없으니까요. 실제로 창업 지원을 받아서 성공한 분들도 많고 새롭게 창업하시는 분들도 주변에 많습니다.
이해연 : 저는 단순히 한국에서 취업하기 어렵기 때문에 창업을 지원하나 생각했는데 그런 차원이었네요.
박소연 : 그런데 창업에 성공한 탈북민들을 만나서 얘기를 듣다 보면 첫술에 배부른 예가 없어요.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다가 7전 8기의 정신으로 어려움을 극복한 사람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게 있는데요. 포기하지 않고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탈북도 했는데 이걸 못 하겠느냐 하는, 고난의 행군이 만들어낸 인내와 끈기 그리고 강한 투지 때문이었답니다. 물론 모두 성공하는 건 아닙니다.
이해연 : 그만큼 창업이라는 게 쉽지 않고, 사실 남북한의 창업을 비교해 봤을 때 너무 달라서 탈북민들이 힘들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박소연 : 이쯤에서 해연 씨한테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북한 창업이 쉬울까요? 남한 창업이 쉬울까요?
이해연 : 당연히 북한이 더 쉽다고 봅니다. 북한은 돈이 가장 중요하죠. 그런데 남한은 어떤 사업을 할까도 중요하고 경쟁도 더 치열해요. 남들과 조금이라도 다르지 않으면 성공하기 쉽지 않습니다.
박소연 : 탈북민들이 쉽게 음식점을 창업하는데 진짜 쉽지 않죠. 북한의 대표적인 식당인 ‘온반집’에서는 밥과 국 그리고 똑같은 반찬이 전부입니다. 남한 식당은 돼지고깃국이라도 고기 질과 넣는 양념을 다 다르게 하죠. 저 집은 다른 집 돼지국밥하고는 맛이 다르다고 인식해야 사람들이 다시 찾고요.
이해연 : 챙겨야할 것이 북한보다 배는 많은 거죠.
[클로징] 남한에서 창업에 성공하려면 사전에 얼마나 철저하게 준비하고 조사를 했는지가 중요합니다. 특히 창업 종목을 선정할 때는 현재 유행뿐 아니라 장기적인 관점도 꼭 필요한데요. 이렇게 듣기만 해도 어렵고 머리 아픈 창업, 꼭 해야 할까요? 남한은 북한과 달리 일하면 따박따박 월급이 나오는 직장이 많은데 왜 탈북민들은 창업에 도전할까요? 그 이유는 다음 시간에 얘기해 보겠습니다.
지금까지 탈북 선후배가 나누는 남한 정착이야기 <우리는 10년 차이> 진행에 박소연, 이해연, 제작에 서울 지국이었습니다.
에디터 이현주, 웹팀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