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10년 차이] 나는 북한에서 온 ‘성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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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함경북도 무산 출신으로 올해 남한 정착 10년 차인 박소연입니다”

“양강도 혜산 출신으로 이제 막 한국에 정착한 이해연입니다”

10년 차이로 남한에 입국한 탈북민 선후배가 전해드리는 남한정착 이야기 <우리는 10년 차이>

박소연 : 저희가 지난 시간부터 팬, 북한말로 애호가에 대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남한에서는 가수, 배우 같은 인물 또는 어떤 물건을 특별히 애호하는 팬 또는 은어로 덕들이 존재한다고 지난 시간에 소개해드렸어요. 보통 팬하면 가수 팬들이 대표적인 것 같아요.

이해연 : 맞습니다. 남한에는 노래 잘하는 가수들이 되게 많지만 그중에 요즘 엄청나게 대세인 분이 한 분 있는데요. 바로 트로트 가수 임영웅입니다.

박소연 : 요즘 그분을 모르면 간첩이죠. (웃음)

이해연 : 이름조차 영웅이네요. 많은 분들이 코로나 장기화로 외부 출입이 어려워 집안에만 있다 보니 힘든 시간을 보냈는데요. 당시 대회에 나와서 얼굴을 알린 이 가수의 노래를 들으며 큰 위로를 받았다고 해요.

박소연 : 임영웅 가수는 북한으로 말하면 전국 노래 경연에서 1등을 한 분이에요. 남한은 보통 20대 아이돌 가수를 따라다니는 젊은 팬층이 많아요. 근데 임영웅 가수는 젊은 층은 물론 50대 60대의 팬덤을 만든 장본인입니다.

이해연 : 제가 북한에 있을 때도 BTS 같은 나와 비슷한 또래 나이의 아이돌 가수를 좋아했어요. 남한에 와서 보니 아니더라고요. 나이별로 팬들이 다 있고 임영웅 가수의 공연에는 20대부터 시작해 40, 50대 팬도 많아 보였습니다.

박소연 : 아마도 70대 이상인 분들도 있을걸요? (웃음) 남한에는 노래 잘하는 가수 엄청 많은데, 유독 이 가수가 이렇게 많은 노년층의 팬을 가진 사람이 됐을까 생각해 봤어요. 우선 임영웅 가수가 부르는 노래가 노년층의 정서에 잘 맞아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도 있고, 그분의 선한 이미지와 행동들 때문인 것 같아요. 가수의 상징이 하늘색이랍니다. 팬들도 콘서트장에 올 때 하늘색 옷을 입고 와서 콘서트장이 온통 하늘색이에요. 자신이 팬이라는 걸 이렇게 표현하는 거죠. 그리고 얼마 전에 '그 가수의 그 팬'이란 기사가 나왔어요. 몇만 명이 모이는 콘서트 장은 얼마나 혼잡하겠어요. 그곳에 80세 되는 할아버지가 화장실 갔다가 제자리에 못 돌아오다 보니까 그 행사에 동원된 안전요원이 그분을 직접 업어서 제자리에 모셨다는데 임영웅 씨가 이 공연에 보러 온 나이 지긋한 팬들이 불편하지 않게 여러 가지 신경을 많이 썼더라고요. 놀라운 것은 기사에 달린 긍정적인 댓글만 몇 만 개였어요. 저도 이 기사를 읽는데 세상이 아직 살만하다는 걸 간접적으로 느꼈어요. 이게 남한 사회에서 가장 좋은 팬과 팬 질이 아닐까요?

이해연 : 정말 공감 가는 게 저도 작년에 콘서트를 갔다 왔잖아요. 공연장에는 노래하는 가수도 힘들지만, 팬들도 힘들어요. 그런 배려를 받은 팬들은 또 가수를 위해서 얼마나 질서를 잘 지키겠습니까.

박소연 : 팬들이 우리가 좋아하는 가수인데 질서를 안 지키면 저 사람 얼굴에 먹칠하는 일이니 잘 지켜야 한다며 엄격하게 질서를 지켜요. 저도 얼마 전 비와이(BY)라는 가수의 콘서트에 다녀왔어요. 북한 주민들한테는 좀 낯선 힙합 가수, 래퍼인데요, 말하는 노래를 하는 가수입니다. 남한에 금방 왔을 때는 이게 무슨 음악이냐고 무시해서 안 봤는데, 어느 날 BY라는 가수가 나와서 부르는 가사가 머리에 총알처럼 팍하고 박히는데 너무 좋은 거예요. 그래서 팬이 됐는데 우연한 기회에 작년에 콘서트에 다녀왔죠. 내가 좋아하는 가수를 눈앞에서 직접 본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이 가수가 좋은 사람인 것 같아서 더 좋았습니다. 공연하면서 객석 2층에 아기엄마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여러분, 2층에 아기가 있으니까 박수 치지 마세요', 아기가 놀라니까 박수를 치지 말라고 자기도 아기 아빠라서 잘 안다고 하는데 제가 팬인 게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손을 뻗은 팬들의 손을 다 잡아주는 거예요. 저는 그날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먹었는데도 마음이 구름 위에 뜨는 것 같고 그날엔 제 나이를 잊어버렸습니다. (웃음)

이해연 : 저도 지난여름에 가수 싸이의 콘서트에 갔었습니다. 아침에 떠났는데 차가 너무 막히고 날씨까지 안 좋고, 비까지 내리는 거예요. 그래서 4시간이면 갈 거리를 무려 8시간이나 걸려서 갔었어요. 식사는 가다가 중간에 먹으려고 계획을 세웠는데 결국 못 들렸어요. 아침 점심 다 못 먹고 그냥 물 한 병만 사서 마시고 콘서트 내내 5시간 동안 뛴 거죠. 5시간의 공연 시간이 끝나고 돌아가는데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정말 기뻤습니다.

박소연 : 우리가 그런 힘으로 내일을 사는 것 같습니다.

이해연 : 네, 살아가는 원동력을 얻고 고갈된 에너지를 그런 걸 통해서 채우는 것 같습니다.

박소연 : 북한 주민들 앞에서는 배부른 소리 같지만, 사실 북한에서 살 때는 내일 살 걱정하느라고 일상을 어떻게 잘 채워갈까 하는 생각을 못 했습니다. 남한에 와서 기본적으로 먹고사는 게 해결되니까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어느 순간부터 지루한 거예요. 아침에 밥 먹고, 낮에 일하고, 저녁에 와서 청소하고 자고. 이렇게 배가 부르니까 뭔가 또 다른 삶을 지향하는 거예요. 그런 경우의 탈출구가 이런 팬 활동이고 이를 통해 내일을 힘차게 살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이해연 : 사람은 어딘가에 집중해서 뭔가를 할 때 행복한 감정을 느낀다고 하더라고요. 우리가 정말 좋아하는 어떤 것에 빠졌을 때는 아무리 힘들어도 그냥 기분이 좋죠.

박소연 : 그리고 저는 남한 사람들과 같은 핏줄, 한민족이라는 것이 좋습니다. 북한에 있을 때는 맨날 '조선 사람의 긍지'라고 하는데 쌀 한 톨도 안 주면서 무슨 긍지를 느끼겠냐며 불만이 있었는데, 남한에 와서 보니까 이 작은 나라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이 너무 많은 거예요. 물론 배우들도 많지만, 특히 축구선수 손흥민 선수 아시죠? 영국 명문 구단에서 뛰는 대한민국의 자랑이잖아요. 아시안으로는 유일하게 유럽 축구팀에서 주장을 하고 있어요. 저도 처음에는 손흥민 선수를 몰랐다가 축구를 좋아하면서 알게 됐는데, 저의 유일한 낙이 무엇인지 아세요? 바로 손흥민 선수가 나오는 모든 경기 일정을 매일 체크해서, 새벽 2시든 3시든 상관이 없어요. 축구가 있는 날엔 그걸 볼 생각에 하루 종일 설레는 거예요. 경기 중에 손흥민 선수가 주전으로 출전하다가 중간에 교체되어 나가면 너무 아쉬운 거 있죠. 그리고 이번에 주장이 됐어요. 남한에서는 그런 걸 국뽕이라고 하죠. '야 남한에는 손흥민이 있는 나라야'라는 자부심을 갖는데, 북한에 있을 때는 '야, 우리 북조선에는 김정일 수령님이 있는 나라야'라며 한 번도 자부심을 갖지 못 했거든요. 남한은 배우, 가수, 운동선수까지 이 사람들로 인해서 누가 강요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애국심이 목 밑까지 차오른다니까요.(웃음)

이해연 : 선배님이 얘기하실 때 보면 정말 행복해 보이세요. 팬심을 인정해 드립니다. (웃음) 그런데 좋은 면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너무 지나치게 하다 보면, 예를 들어 팬 미팅에 가고, 유료로 팬 가입도 하고, 새로운 앨범이 나왔다고 해서 또 그 앨범을 사면서 지출이 많죠. 보통 1~2개씩 사는 건 취미로 괜찮겠지만, 너무 지나치게 구입하시는 분들은 1달에 달러로 2천 달러 정도를 쓰신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 생활에 큰 영향을 받을 것 같습니다.

박소연 : 어떤 것도 적정선을 넘으면 결국 안 좋은 결과가 나와요. 그릇에 담긴 물도 너무 많이 부으면 넘치잖아요? 팬심도 똑같은 것 같습니다. 좋아하는 것도 적당히 해야겠죠. 남자 가수나 배우를 좋아하는 부인 때문에 부부 싸움 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제 아들도 중학교 때 트와이스라는 여성 중창조 그룹을 너무 좋아했는데, 트와이스 화보, 트와이스 앨범을 사서 자기 방에 가득 걸어놓은 거예요. 그걸 보는 순간 화가 너무 나더라고요. 그래서 엄마가 한창때 트와이스보다 이뻤다고... 쓸데 없는 곳에 아까운 용돈 쓴다고 화를 냈는데요. (웃음)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시기가 다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쪽으로 치우치다 보면 현실감이 떨어집니다. 그럴 때 빨리 다시 되돌아와야 하겠죠. 알고 보면 팬 활동도 다른 일처럼 장단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클로징] ‘성덕’이란 ‘성공한 덕후’ 즉 ‘성공한 팬’이라는 의미인데요, 팬으로써 성공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예를 들어 좋아하는 가수나 배우를 진짜 만나거나 그들과 함께 일할 기회를 얻거나 또는 드라마의 팬이 그 드라마를 보면서 꿈꿨던 일이 이뤄지면 그게 성덕인 거죠. 어떤 면에서 해연 씨나 저는 분명 성덕입니다. 북한에서 남한 드라마를 보며 생각했던 것들을 이뤘기 때문입니다. 사실 많은 사람이 북한에는 이런 식의 활동이 금지됐다고 생각하지만 저는 사실 팬질을 강요하는 국가가 북한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도자에 대한 인민들의 애정을 거의 팬 수준으로 국가가 강요하기 때문인데요, 청취자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얘기는 다음 시간에 이어갈게요.

지금까지 탈북 선후배가 나누는 남한 정착 이야기 <우리는 10년 차이> 진행에 박소연, 이해연, 제작에 서울 지국이었습니다. 함께 해주신 청취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제작:이현주

에디터:양성원

웹편집: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