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10년 차이] 그해 여름은 선풍기를 눕히고
2023.07.24
“안녕하세요, 함경북도 무산 출신으로 올해 정착 10년 차인 박소연입니다”
“양강도 혜산 출신으로 이제 막 한국에 정착한 이해연입니다”
10년 차이로 남한에 입국한 탈북민 선후배가 전해드리는 남한 정착 이야기.
<우리는 10년 차이>
“폭염이라는 말은 처음 들어봤어요”
“햇빛이 폭탄처럼 쏟아진다는 뜻인가?”
박소연 : 해연 씨, 안녕하세요. 요즘 폭염에, 장마에 어떻게 지내세요?
이해연 : 죽을 맛입니다. (웃음) 북한도 ‘장마’라는 말을 자주 쓰지만 폭염이라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어요.
박소연 : 무더위라고 했던가요?
이해연 : 심하게 더울 때는 무더위라고 하는데, 폭염은 남한에 와서 처음 들어봤어요. ‘매우 심한 더위’라는 뜻이라는데 처음 들었을 때는 뭔가 대단한 말인 줄 알았습니다. (웃음)
박소연 : 저도 남한 정착 초기에 폭염이라는 단어를 듣고 햇빛이 폭탄처럼 쏟아져 내린다는 뜻으로 생각했어요. (웃음) 생각해 보면 지금 날씨가 햇살이 폭탄처럼 쏟아지긴 하죠. 매해 점점 더워지는 것 같습니다.
이해연 : 해마다 날씨가 점점 더워지는 현상은 지구 온난화와 연관이 있는데요. 북한 주민들은 지구 온난화에 대해서 잘 몰라요, 그 단어는 자주 들었지만 정확하게 뭔지 설명 들은 적이 없었고 대신 이런 소문이 있어요, 나중에 온 세상이 점점 더워져서 큰일이 날 것이라고... 매해 더워지니까 소문이 맞다고 생각했네요.
박소연 : 저희 때는 지구와 태양이 점점 더 가까워져서 앞으로 지구 전체가 열대 지방이 된다는 소문이 있어요. 사람들 반응은 '어떡하겠니, 이제 큰일 났다'고 걱정하는 게 아니라, '야, 그럼 좋지. 화목도 절약하고!' 이랬죠. (웃음) 다 사실에 근거했던 건 아니죠. 여기 오니까 남한 사람들은 지구 온난화 등 기후 변화에 대해서 관심이 많더라고요. 이 문제가 우리의 일상과 생각보다 밀접하게 연관이 있으니까요.
이해연 : 북한에서는 워낙 화목에 대한 걱정이 많으니까, 그런 얘기할 만합니다. (웃음)
“지구온난화? 그럼 좋지! 화목도 절약하고!”
“겨울이 되면 화구가 이밥을 먹는다?”
박소연 : “겨울이 되면 '화구가 이밥을 먹는다”라는 말이 있죠. 그래서 지구 온난화 같은 걸 남의 일처럼 생각했어요. 북한에선 어떤 것보다도 당장 입에 넣을 쌀을 해결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죠. 다른 건 뭐... 남한에 온 뒤에 기후 문제에 대해 관심이 생겼는데요. 일단 TV를 틀면 기후 정보들이 많이 나오고 자세히 설명해주고요. 사실 먹고 사는 1차원적인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에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여유가 생기는 거죠.
이해연 : 지구 온난화를 계속 얘기하니까 그 의미가 궁금하실 것 같아서 검색해 봤는데요,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지구를 둘러싼 대기 온도가 점점 높아지는 현상’으로 ‘산업혁명 이전에도 자연계에서 있었던 현상이나 20세기에 들어서는 석탄이나 석유 같은 화석 연료의 사용량 증가와 과도한 산림 벌목 등으로 인한 훼손으로 온난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다’.
박소연 : 얘기를 듣다 보니, 북한이 정말 잘못하고 있네요. 온 나라가 전부 화목을 때잖아요. 집집마다 굴뚝을 통해 나오는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고 온 산이 벌거숭이가 됐어요. 하지만 어쩔 수가 없죠. 그리고 북한에서도 지구 온난화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얘기해줍니다만 일반 주민들이 들을 수 없었어요. 텔레비전이 나와야 듣죠! 올해는 엘니뇨 현상에 대해 보도에 많이 나오는데, 북한도 5월 28일 자 노동신문에서 엘니뇨 현상을 언급했더라고요. 엘니뇨 현상의 피해를 막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설명해 놨는데 문제는 노동 신문도 아무나 못 본다는 거...
이해연 : 노동신문은 당원들과 당 간부들만 볼 수 있어요. 그런데 엘니뇨는 또 뭔가요?
박소연 : 엘니뇨 현상은 적도 부근에 수온이 올라가면서 강수량이 갑자기 증가하거나 어느 시기에는 너무 가물어서 기상을 예측할 수 없는 현상을 말합니다. 지금 북한도 이것 때문에 우려가 큰 거죠.
“남한에 와서 맞은 첫 해 여름은 충격이었습니다”
이해연 : 그런데 여름은 확실히 북한보다 남한이 더 덥죠?
박소연 : 저도 정착 초기에는 해연 씨처럼 생각했어요. 남한 정착 11년 차가 되면서 느낀 것은 낮 기온은 남북이 거의 비슷하다는 것. 대신 북한은 낮과 밤의 일교차가 큰 데 비해 남한은 여름엔 밤에도 덥습니다.
이해연 : 그래도 기온 차이가 있어요. 북한에 있을 때 기온이 제일 높을 때가 32~33도까지 올랐거든요. 그런데 남한에서는 기상해설자가 35도를 말하는 것을 들었어요. 북한이 좀 덜 덥지 않나 싶어요.
박소연 : 제 생각엔 남한은 도시를 비롯한 농촌 도로까지 전부 포장도로라서 여름에 더 뜨거운 것 같습니다. 아스팔트 도로는 깨끗하고 자동차 운행하기는 좋지만 해가 내리쬐면 복사열 때문에 이글이글하거든요. 북한은 거의 비포장도로라 땅이 열을 일정 정도 흡수하는 것 같고요.
이해연 : 남한에 와서 맞은 첫해 여름은 너무 더웠고, 사람들이 밖에 안 다니는 것이 너무 충격적이었어요. 낮에 몇 명, 양산 쓰고 다니는 것은 봤는데 대부분은 자동차를 타고 다니더라고요. 자동차 안에는 에어컨도 다 있잖아요.
“서 있는 선풍기 바람이 누워있는 나한테 오라고 선풍기를 눕혀서 틀어보기도 하고
아들이 오는 그해에 에어컨을 샀습니다”
이해연 : 정착 첫해는 손 선풍기를 꼭 가지고 다녔지만, 그것만으로는 더위를 이기기엔 턱도 없었어요.
박소연 : 남한 정착 첫해 지나고 바로 뭐 사지 않으셨어요? (웃음)
이해연 : 처음에는 선풍기 하나뿐이었어요. 첫해는 그걸로 버텼는데 다음 해에는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에어컨을 샀는데... 정말 살 것 같더라고요.
박소연 : 벽에 설치하는 에어컨?
이해연 : 맞습니다. 남한은 거의 모든 가정에 에어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 아파트 베란다 밖에 집마다 네모난 게 매달려 있어서 보기도 안 좋게 저런 걸 왜 해놨나... 그랬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에어컨 실외기더라고요. (웃음) 첫해에는 에어컨을 사야겠다 생각만 했고 그 다음 해에 사서 너무 시원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박소연 : 그렇게 비싸지는 않죠?
이해연 : 새 제품은 1,000달러 정도라서 가격이 너무 부담스러웠어요. 그래서 고민 끝에 중고를 샀는데요, 모양이나 만든 날짜가 좀 오래되었지만 기능에는 전혀 문제없이 시원한 바람이 잘 나오더라고요. 지금까지도 별 이상 없이 쓰고 있어요.
박소연 : 북한에서 여름철에 선풍기 하나 없이 지내던 사람들이 부지기수잖아요? 여름은 당연히 덥고 더위는 이겨내는 거라는 인식이 몸에 배어 있죠. 솔직히 선풍기 한 대면 북한에서 간부급 생활이죠. 11년 전만 해도 북한에는 선풍기 있는 집이 별로 없었어요.
이해연 : 여름이면 두꺼운 책 표지로 부채질하면서 살았어요.
박소연 : 그리고 목에는 항상 세수수건을 걸치고 다녔죠. (웃음) 그러다가 남한에 와서 첫 여름을 보내는데, 동사무소에서 기초수급자들에게 선풍기를 눅게 팔아줬어요. 처음에 선풍기 앞에 서서 이거 하나면 올여름은 정말 끄떡없이 이겨내리라고 생각했는데 천만에요. 밤인데도 더워서 죽겠는 거예요. 선풍기 앞에 앉아 있다가 화장실에 뛰어 들어가서 세수수건을 찬물에 적셔서 머리에 쓰면 처음엔 견딜만해요. 7~8월이 되니까 더 더워지는 거예요. 북한에는 8.15가 지나면 선선하잖아요. 남한은 8월인데 더위가 더 심해지는 거예요. 그리고 선풍기가 이렇게 서 있으니까 누워있는 저에게 바람이 오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바람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이용할까 생각한 끝에 선풍기를 눕혀 놓았더니 바람이 잘 오더라고요. (웃음) 날씨가 얼마나 더운지 나중에 선풍기에서 더운 바람이 나왔어요.
이해연 : 저도 겪었어요! 진짜 더우니까 뜨거운 바람이 나오더라고요.
박소연 : 첫 여름을 그렇게 나고 다음 해에 아들이 왔어요. 제가 혼자였다면 계속 선풍기를 안고 잤을 거예요. 아들이 온다니까 고민 없이 에어컨 매장에 갔어요. 10년 전에 700달러를 주고 벽걸이 에어컨을 샀어요. 주변 사람들이 소비전력 등급이 1등급인지 2등급인지 잘 보라고 해서 눈에 쌍심지를 켜고 전기를 적게 소비하는 1등급을 샀어요. 에어컨을 쓰면서 선풍기에 먼지가 앉기 시작하는 거예요. 찬밥신세가 된 거죠. 벽에 붙이는 에어컨에 재미를 붙였는데 이후에 좀 더 큰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됐어요. 그때는 방구석에 탁 세우는 냉장고의 절반만 한 크기의 에어컨을 샀어요. 세우는 에어컨은 찬 바람도 나오고 공기 청정기도 되고, 비가 오는 날에는 제습도 돼요. 가격은 벽걸이에 비해 두 배 정도 했지만 지금까지 6년 동안 잘 쓰고 있어요. 10년은 거뜬하게 쓸 것 같아요. 비싼 만큼 값을 하는 셈이죠.
북한에는 얼어 죽는다는 말은 있지만 더워 죽는다는 말은 없습니다. 북한의 한겨울 추위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게 혹독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북한도 점점 더워지면서 시원한 아이스크림, 까까오가 잘 팔린다고 들었습니다. 11년 전에는 사카린 들어간 단단한 얼음과자가 장마당의 여름을 버티게 해줬는데요... 남한에선 여름에 뭐가 제일 잘 팔리는 지 아십니까? 바로 ‘아.아’ 입니다. 이게 뭔지, 다음 시간에 말씀드릴게요. 저희는 이만 인사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탈북 선후배가 나누는 남한 정착 이야기 <우리는 10년 차이>,
진행에 박소연, 이해연, 제작에 서울 지국이었습니다.
에디터:이현주, 웹팀: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