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함경북도 무산 출신으로 올해 정착 10년 차인 박소연입니다”
“양강도 혜산 출신으로 이제 막 한국에 정착한 이해연입니다”
10년 차이로 남한에 입국한 탈북민 선후배가 전해드리는 남한 정착 이야기.
<우리는 10년 차이>
박소연 : 안녕하세요. 오늘 지하철에서 내려 방송국까지 걸어오는데 땅바닥의 가로수에서 떨어 노란 낙엽이 너무 많은 거예요. 혜연 씨는 요즘 차도 뽑았겠다, 젊겠다…(웃음) 단풍 보러 많이 다녀왔을 것 같은데 잘 지냈어요?
이해연 : 어떻게 아셨어요? (웃음) 지난주에 집 주변에 있는 인천대공원에 다녀왔어요. 단풍도 보고 돗자리도 펴고 앉아서 가을을 느끼고 왔습니다. 작년에 선배님이 설악산 얘기를 하셔서 올해 무조건 가야겠다고 검색했는데 너무 멀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주변에 있는 대공원에 갔다가 계양산도 등산하면서 단풍도 보고 운동도 했습니다.
박소연 : 지혜롭게 잘하셨어요. 저는 경기도 안산에 있는 바다 향기 수목원이라는 곳에 다녀왔어요. 집에서 거리가 대략 50리 정도 돼요. 수목원에 갔더니 50~60대 아줌마들이 무리를 지어 단풍을 보러 왔는데 전부 등산복을 입었더라고요. 그런데 여기는 재밌게 단풍을 누워서 볼 수 있는 스프링 침대 같은 걸 만들어 놓았는데요, 거기 누워서 단풍을 볼 수 있습니다.
이해연 : 누워서 보면 뭐가 좀 다른가요?
박소연 : 서서 볼 때는 그냥 나무하고 단풍만 보이잖아요. 그런데 누워서 보면 단풍나무 사이로 파란 하늘이 보여요. 잎사귀 사이로 햇빛이 쏟아지는데 사진을 찍기조차 아까운 겁니다. 우리는 보통 '편안하게 서 있어라' 이렇게 말 하지 않잖아요? '편안하게 누워있어라' 그러죠. 일단은 몸이 편안하니 단풍을 보는 감정도 편안했습니다. (웃음)
이해연 : 저는 단풍을 밟으면서 걷는 게 너무 좋더라고요. 낙엽을 밟을 때 소리가 나잖아요?
박소연 : 상상만 해도 기분이 너무 좋아집니다. (웃음) 지금은 아니지만 정착 초기에는 사람들이 인터넷으로 단풍 구경하기 좋은 곳을 검색하면 솔직히 배부른 사람들이 하는 행동으로 보였습니다. 솔직하게 그때는 세상 사람들이 전부 나를 괴롭히는 적처럼 보였어요. 나를 몰라봐 주고 내 이래도 조선에서 왔는데...이런 생각을 했었어요. 그 때 같이 일하는 선배가 남자친구랑 설악산 간다고 자랑하는데 솔직히 그분이 너무 미웠어요. 올해도 다 가는데 빚도 있고, 언제면 다른 사람들처럼 단풍놀이를 갈 수 있을까 슬펐던 시절입니다.
이해연 : 그때의 선배님 마음을 알 것 같습니다. 정착 초기에는 그냥 외롭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어요. 정착 연도가 늘면서 요즘은 좀 바뀐 것 같아요. 그래도 북한에서 보냈던 가을과 비교하면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북한은 가을이면 단풍 구경은 고사하고 낟알을 수확하고 겨울날 준비로 제일 바쁠 시기잖아요.
박소연 : 공감해요. 단풍을 보면서도 다른 감정이 들죠. 제가 탈북하기 전 해 가을에 감자녹말 배낭을 메고 산길을 걷다가 힘들어 쉬고 있었어요. 산꼭대기에 앉아서 내려다보니 온통 산이 빨간 단풍인데 그때는 솔직히 예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그냥 이 나무들을 우리 집에 모두 실어 갔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해연 : 단풍이 화목으로 보였군요. 북한에 살 때 남한 드라마에서 단풍 보러 가서 낙엽을 가지고 와서 책 속에 꽂아 넣는 장면이 있어요. 그때는 뭐 저런 걸 하지? 이해를 못 했습니다. 남한에 오니까 이해가 됩니다. 단풍을 보면서 사람들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곰곰이 생각 해보니 가을감성에 젖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남한은 자연을 즐긴다고 말합니다. 이 말도 생활의 여유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박소연 : 맞아요. 배가 부르면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지고 눈을 돌리게 돼요. 당장 저녁에 먹을거리가 없는 사람들이 단풍을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있을까요? 남한은 먹고 사는 문제가 걱정 없기 때문에 다가오는 계절에 대한 설렘이 있고, 탈북민들도 그 문화에 자연스럽게 익숙해지는 것 같아요. 요즘 남한에는 가을 감성을 '가을 갬성'이라고 부르더라고요. (웃음) TV를 틀어도 가을과 연관된 영상이 방영되고, 지인들과 만나도 가을에 대한 주제를 갖고 많이 대화를 나눠요. 그런데 북한의 가을은 어때요? 북한은 가을철 하루 게으르면 봄날에 열흘을 굶는다고 말합니다. 남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가을은 단풍, 낙엽, 등산을 비롯해 가을철 감성들로 꽉 차 있어요.
이해연 : 어찌 가을뿐이겠어요. 남한은 사계절을 다 즐기는 것 같더라고요.
박소연 : 구실이 없어서 즐기지 못하죠. (웃음)
이해연 : 그런 것 같아요. 저도 북한에 있을 때는 가을을 즐기지는 못했지만, 요즘은 북한도 변했을까요? 11월 1일 자 노동신문에 평양 단풍 사진들이 많이 소개됐는데 참 이쁘네요. 사진 속에 단풍을 즐기는 평양 시민들의 모습을 보면서 북한도 지금은 단풍을 즐기나 하는 궁금해졌습니다.
박소연 : 저도 사진 봤어요. 그런데 사실 평양이니 가능한 거죠. 북한은 노동신문뿐 아니라 조선중앙TV를 통해 8분이나 평양 시내 단풍 영상을 방영했어요. 거기까지는 좋았어요. 문제는 그다음인데요. 영상에 등장한 평양 시민이 인터뷰에서 '단풍이 강렬함과 불타는 열정을 보면서 조국을 위해서 더 많은 일을 해야 되겠다'고 말해요.
이해연 : 익숙한 문구네요. (웃음) 만약 저에게 인터뷰시켜도 그렇게 말했을 겁니다. 그러나 단풍을 보면서 조국에 대한 불타는 마음은 별로 안 생겼을 것 같고요… (웃음) 영상을 보는 북한 주민들도 콧방귀를 뀌면서 들었을 겁니다.
박소연 : 인터뷰를 했던 사람아 평양 시민이잖아요? 평양 시민들은 지방 사람들하고 달라요. 평양 시민은 누구나 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리고 배려를 많이 받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수령님과 당의 은덕이라고 세뇌당하면서 살고 있어요. 어느 정도는 진심이었을 수 있어요. 대신에 지방 사람들은 그런 거 관심이 없어요. 평양 단풍 사진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그건 그냥 풍경화나 그림을 보는 것이나 같죠.
이해연 : 맞는 말씀이에요. 지방에도 도시 중심에는 가로수들이 있어서 가을이면 단풍을 볼 수 있어요. 산이 많은 지역은 차를 타고 지나가다 빨간 단풍이 눈에 들어오기도 해요. 그런데 사람들은 단풍을 감상하고 구경하기보다 가을이니까 겨울철 준비를 해야 한다는 걱정부터 하게 되죠.
박소연 : 북한에는 단풍을 보러 간다는 말 자체가 없어요. 10년 전에도 북한 지방 도시에는 도로를 중심에는 가로수가 있어 가을이면 낙엽이 거리에 떨어졌죠. 북한에도 도로를 청소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대부분 인민반에서 동원돼 청소를 해요. 가슴이 아팠던 일도 생각 나네요. 북한에는 지역마다 공원이 있는데 가을이면 동네 할머니들이 새벽부터 보자기나 배낭을 가지고 나와요. 그리고 빗자루로 낙엽이 떨어지기 바쁘게 쓸어 담았어요. 화목으로 쓰려고요.
이해연 : 그건 요즘도 변하지 않았어요. 땔감은 북한 주민들에게 일생의 숙제같이 해마다 반복되는 부담이기도 해요. 남한에는 '일생의 숙제가 다이어트다' 이러잖아요? 북한은 일생의 과제가 화목 걱정인 것 같아요. 지금도 사실 그렇게 큰 변화가 없기 때문에 제가 오기 전까지도 할머니들이 화목으로 쓰려고 낙엽을 주워 갔어요.
박소연 :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가을이면 낙엽이 길거리에서 우수수 날리는 모습을 보기가 힘들었어요. 나무에서 떨어지기 바쁘게 쓸어 담아 갔으니까요. 그리고 가을철에 느낄 수 있는 감수정마저도 빗자루로 쓸어서 배낭에 꽁꽁 담아버렸습니다. 북한 사람들은 열에 아홉은 배낭을 메고 다녀요. 무거운 배낭을 멘 사람이 하늘을 바라볼 수 있겠어요? 그래서 가을이 의미가 없었던 것 같아요.
이해연 : 공감해요, 저도 북한에 있을 때 하늘이 예쁘다는 생각을 못 했어요. 하늘이 높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굳이 쳐다보지도 않았고 하늘을 볼 생각을 못 했어요. 일단은 모든 게 마음의 여유에서 나오는 행동이라고 생각해요. 남한에 와서야 하늘을 보며 예쁘다는 생각했고 핸드폰으로 사진도 찍고 있네요.
북한에서 친구나 가족에게 단풍 보러 가자고 말하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요? 도대체 얘가 무슨 소리를 하나… 분명 욕 한마디 들었을 겁니다. 하늘을 쳐다볼 여유도 없이 바쁘게 뛰어다녔던 고향의 가을, 다부지 태우는 매캐한 연기와 콩청대가 먼저 떠오르는 걸 보면 분명 북한에도 가을 감성이 있었네요. 그걸 남한에 와서야 깨닫습니다.
마음 한 구석에 따뜻한 향수로 남은 고향의 가을 이야기, 다음 시간에 이어 갈게요.
지금까지 탈북 선후배가 나누는 남한 정착 이야기
<우리는 10년 차이> 진행에 박소연, 이해연, 제작에 서울 지국이었습니다.
녹음총괄, 제작, 에디터 : 이현주
웹팀 :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