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함경북도 무산 출신으로 올해 정착 10년 차인 박소연입니다”
“양강도 혜산 출신으로 이제 막 한국에 정착한 이해연입니다”
10년 차이로 남한에 입국한 탈북민 선후배가 전하는 남한 정착 이야기.
<우리는 10년 차이>
이해연 : 저는 남한에 살면서 아직까지 묘지를 많이 보지 못했어요. 그 이유가 남한은 고인을 납골당에 안치하기 때문이라고 하더라고요. 혹시 땅값이 비싸서 그럴까요? 아무튼 납골당에 안치하면 제사가 간편한 것 같습니다.
박소연 : 맞아요. 납골당은 시신을 화장하고 남은 유골을 담은 유골함을 보관하는 장소를 말하는데요, 요즘 북한에도 화장하죠?
이해연 : 아직 지방에는 흔하지 않습니다. 지방에는 매장이 많고요, 평양의 경우에는 도시라 매장할 공간이 좁다 보니 남한의 납골당처럼 화장해서 남은 유골이 든 단지를 보관하는 장소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박소연 : 보통 무덤을 생각할 때는 왠지 등이 오싹하는 느낌이 들잖아요. 그런데 납골당은 그런 느낌이 별로 없어요. 새로 지은 건물이고 화장해서 안치하는 공간은 꽃, 사진 같은 걸로 꾸미잖아요? 아기자기 예쁘다는 느낌이 더 많고 남한은 납골당도 있지만 나무 밑에 화장한 유해를 묻는 수목장도 있더라고요.
이해연 : 남한 드라마에서 나무 앞에서 절을 하면서 우는 장면을 본 적이 있어요. 그때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왜 저러지? 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수목장이었군요!
박소연 : 해연 씨도 보셨군요. 남한은 안장하는 방법들이 다양해서 북한처럼 굳이 산에 가지 않아도 돼요. 장례 절차도 간소하지만 깨끗하고 좋아요. 제가 이번 추석에 남한에서 살다가 사망한 탈북민들이 안치된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예원 추모관에 다녀왔어요. 이곳은 무연고 탈북민들, 남한에 가족이 없는 탈북민들의 유골이 보관된 곳으로, 통일부와 남북 하나 재단이 임대해서 관리를 해줍니다. 이번 추석에도 전국 각지에 사는 탈북민들과 남북 하나재단 이사장, 통일부 직원분들이 모여서 이들을 추모하는 행사를 가졌습니다. 현재 예원 추모관에는 67명의 무연고 탈북민의 유골이 안치돼 있습니다.
이해연 : 아직 많진 않네요.
박소연 : 맞아요. 저는 탈북민의 유골함을 보면서 좋은 세상에 왔는데 좀 더 오래 살다 가면 좋았을 걸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어요. 한편으로는 가족이 없는 탈북민들이 사망할 경우 이렇게 안치해 주는 데가 있다는 게 큰 위로가 됐어요. 이제 내가 가면 어디에 묻힐까 하는 걱정은 안 해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 거죠. 관계자들이 얘기하는 게 탈북민들이 평상시에도 이곳을 많이 찾아온다고 합니다. 지나가다 들러서 인사하고 꽃을 놓고 가고 그런대요. 그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제 마음이 든든한지 몰라요.
이해연 : 같은 고향 사람이라서 꽃 한 송이라도 바치며 추모하는 그 마을을 알 것 같습니다. 선배님, 혹시 예원추모관은 산이에요? 아니면 납골당?
박소연 : 납골당입니다. 아, 이 부분은 혹시 납골당이라는 호칭 때문에 청취자분들이 오해할 수 있어서 자세히 설명해 드릴께요. 납골당은 남한 드라마에서도 많이 나오죠? 예쁘게 꾸민 건물 안에 사물함처럼 칸칸이 나누어진 공간이 있어요. 그 안에다가 시신을 화장하고 나온 유골을 곱게 분쇄한 재를 작은 단지에 담아서 넣고 문을 잠그죠. 유골함과 함께 가족이나 고인의 사진, 유품도 넣고 꽃으로 장식도 합니다. 앞에 유리문이라서 그 안이 다 보이고요, 그래서 묘지 같은 느낌이 전혀 안 들고, 마치 박물관이나 전시장에 왔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리고 이런 추모관은 우리처럼 산에 올라가지 않아도 되니까 명절에만 가는 게 아니라 보고 싶을 때는 언제든지 들려볼 수 있어요.
이해연 : 드라마에서 보던 장면입니다. 드라마를 보면 어떤 큰일을 앞두었거나, 힘든 일이 있거나, 연인과 헤어졌을 때 그곳에 가더라고요. 어쨌든 아무 때나 찾아갈 수 있다는 게 정말 좋은 거 같아요.
박소연 : 만일 우리 가족 중에 누군가 납골당에 있으면 저는 매일 갈 것 같아요. 또 거기에 가면 컴퓨터가 있어서 고인에게 글을 남길 수도 있고 편지를 써서 그 안에 넣을 수 있어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마음을 전할 수 있다는 게 너무 부러웠어요.
이해연 : 네, 그러니까요. 그리고 아까 선배님이 무연고로 돌아가신 북한 분들을 안치한 납골당에 탈북민들이 많이 찾아간다고 하셨잖아요. 고인과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들이 지나가다가 들러서 꽃을 놓는 그 마음을 알 것 같아요. 남한에는 혼자서 외롭게 사는 탈북민들이 많습니다. 북한에 두고 온 가족들 생각이 나서 가는 것도 있겠지만, 나의 미래라는 생각에 찾아가서 명복을 빌어주는 것도 있을 것 같습니다.
박소연 : 같은 처지라고 느끼는 공감대라고 해야겠죠. 대부분 탈북민은 남한에 가족이 없어요. 우리 해연 씨는 복 받은 거예요. 이모님도 계시고 사촌 형제들도 있잖아요. 해연 씨 같은 경우는 드물고 제 주변에 보면 대부분 혈혈단신으로 왔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아들과 함께 온 저를 엄청나게 부러워해요. 가끔 저도 복 중에 살면서도 복이라는 것 못 느끼고 사는 것 같아요. 추석에 그분들이 왜 거기 가서 추모했는지 이해가 됩니다. 이번 추석 때 추모관의 분위기는 어두웠어요. 고인 중에는 나이가 들어서 돌아가신 분들도 있지만, 갑자기 사고나 병을 얻어 갑자기 돌아가신 분들도 있었어요. 목숨을 걸고 찾아온 땅에서 자유를 다 누려보지 못하고 돌아가셨으니까, 그에 대해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사람이 함께 느끼는 분위기였습니다.
이해연 : 얘기를 듣다 보니 저도 그곳을 한번 찾아가서 꽃 한 송이도 놓고 추모하면서 고향 생각도 하는 시간을 가져보고 싶습니다. 선배님께서 주소 알려주시면 꼭 가보렵니다.
박소연 : 다음 방송에서 갔다 왔는지 확인합니다? (웃음) 추석에 돌아가신 분들을 기억하다 보면 어떡하겠어요. 우울한 기분도 들지만 그렇다고 명절 내내 다 우울하진 않았어요. 저는 추석 첫날에 탈북민 두 가족이 뭉쳐서 경기도 김포에 있는 애기봉 전망대에 다녀왔어요. 애기봉은 김포를 지나 강화도에 있는데 바로 건너편에 북한 개성시 개풍군이 보여요. 이곳은 보니까 파주보다 북한이 더 잘 보여요. 마침 그날은 날씨까지 좋아서 망원경으로 북한을 실컷 볼 수 있었어요. 망원경으로 보는데 북한이 정말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북한 군인이 염소를 방목하다가 힘들었는지 밭머리에 앉아서 한숨을 쉬고 있는데 입은 속옷은 또 누런 거예요. 그리고 애들은 김일성 동상 앞에서 뜀뛰기를 하고 있었고요. 그 건너편 군관 사택 아파트 창문이 열려있는데 커튼 색깔까지 다 보이더라고요. 눈앞에서 북한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어요.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피자를 한 판 시켜서 군인에게 넘겨주고 싶었어요. 불과 1.4㎞밖에 안 되는 곳에 이곳에 마주하고 있는데도 그걸 건네주지 못하고…어떻게 이렇게 서로 삶이 다를 수가 있을까 싶었습니다.
이해연 : 신입 병사였나 봅니다.
박소연 : 그래서 보여서 마음 아팠어요. 일행 중 탈북민 가족의 남편은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하며 술을 붓고 향을 피웠습니다. 그걸 뒤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이 향이 부디 부모님에 다다르면 좋겠다 바랐죠. 저도 얼마 전에 아버님이 돌아가셨잖아요. 이런 생각들 속에 일행들이 한 15분 동안 아무 얘기도 안 했어요.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자, 우리 가서 점심에 맛있는 거 뭐 먹을까?' 하면서 분위기를 전환했죠.
이해연 : 북한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으니, 마음이 더 먹먹하셨을 것 같아요. 저는 그렇게 북한이 보이는 곳에서 고향을 생각하진 않았지만 경치 좋고 공기 좋은 조용한 산속에 들어가니까 고향 생각이 갑자기 나더라고요. 북한에서 산을 하도 많이 다녀서 생각난 거죠. 그때 고향 생각이며, 부모님 생각하다가 그냥 건강하게 잘 계시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박소연 : 보통 남한에 정착한 지 3~4년 정도 되는 탈북민들은 추석 같은 명절이 되면 울어요. 해연 씨도 물론 울었겠죠. 탈북민들이 처음 3~4년 동안은 동기생들끼리 전화해서 우리 아버지가 살아생전에 명태를 좋아하셨는데 드시지도 못하고 돌아갔다며 여기는 명태가 이렇게 차고 넘치는데… 이런 넋두리를 해요. 한 사람이 넋두리가 끝나면 들어주던 탈북민이 넋두리가 다시 시작되고요.
이해연 : 사실 저는 이번 추석 전에 고향에 계신 아버지랑 통화했거든요. 그래서 한결 마음이 괜찮았던 것 같아요. 추석 때 성묘 가려면 돈도 들 텐데 어떻게 하는지 걱정이 많이 돼서, 추석 잘 보내라고 돈 좀 보내고 나니까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더라고요.
박소연 : 해연 씨가 이번 추석에 왜 이렇게 즐거웠는지 알 거 같아요.
이해연 : 맞습니다. 가족 소식을 못 들으면 추석은 잘 보내고 계시는지 걱정이 많이 되거든요. 마음의 짐을 좀 덜었다고나 할까요. 사실 힘들게 돈 벌긴 하지만, 그 돈으로 가족들을 도와준다는 것이 전부는 아닌 것 같아요. 반반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내 마음이 편해지려고 하는 것도 있습니다.
박소연 : 해연 씨나 저나 똑같은 마음인 게, 우리는 탈북을 한 그 자체가 가족한테 죄를 지은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살죠. 나만 와서 행복을 누리는 것 같고, 그래서 경제적으로 조금 도와주면 내 죄를 조금은 씻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데… 정말 우리가 죄인입니까?
이해연 : 아니죠. (웃음)
박소연 : 탈북민들에게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숙제인 것 같아요. 가족들한테 뭔가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하니까 더 마음 가볍게 추석을 보낸 것 같아요. 자… 가슴 아픈 얘기는 이쯤에서 끝내고 화제를 바꿔서 요즘 북한의 추석은 어떻게 보낼까 하는 궁금증이 들어요.
이해연 : 선배님 때랑 거의 비슷할 거 같아요. 예전부터 산에 성묘하러 갈 때 이것저것 음식 장만해서 이고 지고 가잖아요. 상다리 부러지도록 준비해 가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비슷합니다. 좀 달라진 게 있다면 사진을 찍는 것?
박소연 : 묘지에서 사진을 찍는다고요!
이해연 : 이상하시죠? (웃음) 제가 있을 때부터 그런 문화가 좀 생긴 것 같아요. 꽃다발도 들고 가고 사진도 찍고, 스피커를 들고 가서 제사를 다 지내면 노래도 들으면서 보내죠. 그런 게 처음에는 많이 어색했지만 점차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더라고요.
'고난의 행군'이 한창이던 시기에도 북한 주민들은 빚을 내서라도 추석을 풍성하게 보내곤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노동당을 믿으면 굶어 죽지만 조상에게 잘 보여야 살아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죠. 올해 추석에는 아마 내년 보릿고개를 무사히 넘길 수 있게 조상님이 하늘에서 보살펴 달라고 소원을 빌었을 겁니다. 콩나물, 고사리, 생선 냄새가 진동했던 고향의 추석이야기는 다음시간에 이어 갈게요.
지금까지 탈북 선후배가 나누는 남한 정착이야기
<우리는 10년 차이> 진행에 박소연, 이해연, 제작에 서울 지국이었습니다.
녹음총괄, 제작, 에디터 이현주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