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동북공정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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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동북공정 두 번째 순서에서는 동북공정 논란의 핵심인 고구려사가 중국의 역사라는 동북공정 학자들의 주장과 그에 대한 한국 고구려연구회 이사장인 서길수 서경대학교 교수의 반론을 중심으로 살펴봤습니다.

오늘 순서에서는 700여년 존속했던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조선반도 북부와 만주 그리고 연해주지역까지 걸치는 대왕국을 건설했던 발해가 중국 지방민족 정권이라는 동북공정의 주장과 그에 대한 한국의 발해사 전문학자의 반론을 알아봅니다.

한국의 역사에 따르면 발해는 서기 668년 고구려가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패해 망한 뒤 30년이 지난 698년, 고구려 장군이었던 대조영이 만주 동부지방, 현재 길림성 돈화현 부근 동모산 기슭에서 고구려 유민들과 말갈인을 모아 진국 이라는 이름으로 세웠습니다.

곧 이어 발해로 국명을 바꾸고 고왕인 대조영을 비롯해 열 다섯왕이 이어지면서 230년 가까이 조선반도 북부와 만주지역과 연해주 지역에 걸치는 광대한 땅을 다스리다가 926년 거란이 세운 요나라의 공격을 받고 멸망했습니다. 거란족은 5세기 중엽부터 내몽고 지역에 살던 유목민족입니다.

하지만 동북공정 학자들은 중국 당나라 역사서인 신.당서 사료를 근거로 발해 시조인 대조영은 속말 말갈인이며 발해는 고구려 유민들이 아닌 말갈족이 세웠다고 주장합니다. 말갈족은 서기 6세기경 중국의 수나라와 당나라시대 한반도 북부와 만주 북동부에 거주했던 민족인데, 말갈이 중국 지방민족 정권이었으니 말갈이 세운 발해 역시 중국의 역사에 속한다는 주장입니다. 말갈은 중국 송나라와 명나라 때에는 여진, 그리고 청나라 때에는 만주족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발해왕은 중국에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는 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을 발해가 독립국가가 아닌 중국 지방 민족 정권이었다는 또 다른 근거로 중국학자들은 내세우고 있습니다.

중국 사회과학원 관계자는 지난 9월 한국의 KBS 방송과의 회견에서 “발해가 당나라 지방민족 정권이란 이유는 아주 많고 논거도 충분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또 같은 달 YTN 방송이 취재한 한-중 두나라 교과서 집필진들의 서울 토론에서 중국의 인민교육출판사 중국역사편집실의 ‘리칭’ 편집인은 “발해는 중국의 소수 민족이 건설했기 때문에 중국사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한국.사학자들은 중국의 역사서인 구.당서, 고려시대의 삼국유사, 그리고 신라시대에 저술된 신라고기 역사서의 기록을 들어, 발해의 피지배계층은 말갈인들이었지만 발해를 세운 사람은 고구려 장수인 대조영이었고 지배층들은 고구려 출신들이었다면서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고 주장합니다. 한국 경성대학교 사학과 교수며 1991년 발해사로 한국 최초로 발해학 박사가 된 한규철 교수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말갈이라는 말 자체가 특정 종족의 이름이 아니었다고 설명합니다.

한규철 교수: 말갈의 기록이 신당서와 구당서에 나와 있는데, 결론적으로 말갈이라는 것은 고유명사의 종족명이라기 보다는 보통명사의 범칭명이다. 이렇게 봤을 때 변두리에서 문명이 좀 덜된 사람들을 대개 말갈이라고 했던 것이다.

무슨 말이냐면 발해국은 당나라 역사서에 ‘말갈족’이 세운 나라라고 기록돼 있지만 그 ‘말갈’이라는 말은 발해를 세운 종족만을 지칭하는 고유한 명칭이 아니라 그 당시 중원이 고구려 변방 주민들을 두루 얕잡아 부르던 표현이었다는 것입니다. 당나라는 발해가 세워졌을 당시에는 ‘말갈’이라고 낮춰 부르다가 발해와 국교가 정상화 되는 시점에서야 비로서 정식 국명인 발해로 부르게 됐다고 한 교수는 설명합니다. (한 교수는 그 때문에 중국 사서에 등장하는 일곱 개의 말갈족은 발해를 건국한 고구려 말갈 6개와 그렇지 않은 흑수말갈 1개로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또 발해왕이 중국에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는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발해가 독립국가가 아닌 중국 지방 민족 정권이었다는 중국학자들의 주장에 대해 한규철 교수는 조공은 나라간의 무역행위의 하나요 책봉은 외교 행태의 하나일뿐 한 나라의 귀속여부를 따지는 기준이 못된다고 반박합니다.

한규철: 책봉은 당시 당나라 중심의 국제질서에서 주변 민족에 대한 정치적 승인 행위였다. 이를테면 한국 대통령 취임식에 미국대사가 참석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참석하지 않으면 인정하지 않는 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주변 왕조의 승인행위로 책봉을 해왔던 것이다. 그리고 조공이라는 것은 정치적인 의미도 있는 것이었지만 무역 형태로 많이 왕래가 됐던 것이다.

발해가 중국의 지방 민족정권이 아니었다는 또 다른 근거로 한 교수는 발해의 자체적인 연호 사용을 제시합니다.

한규철: 발해는 연호를 계속 썼다. 인안을 포함해, 발해의 연호는 열 개정도 나온다. 왕조의 자주성은 연호의 사용여부로 생각할 수 있다. 오히려 신라가 발해보다 훨씬 자주적이지 못했다. 신라통일이후 연호 사용 예는 거의 없다.

연호는 서력기원전 114년 중국의 주나라 때에 확립된 왕조의 연도를 표시하는 명칭으로 중국의 신하 나라로 간주되는 주변국들은 자체적인 연호를 쓰지 못하고 중국이 황제가 주는 연호를 하사받아 사용하곤 했습니다. 한 교수는 그밖에도 발해인들은 고구려인들과 마찬가지로 온돌을 사용했고 석실묘나 석곽묘를 만들었었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한규철: 기록에서도 분명한 것은 발해와 고구려는 풍속이 같았다는 말이 나온다. 이것은 중국 당서 기록에 나오는 말인데, 풍속이 같았다고 하는 것은 관혼상제를 비롯해서 언어라든지 하는 것이 고구려와 발해가 같았다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발해는 고구려와 달리 조선민족의 역사로 딱 부러지게 주장하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우선 발해가 이민족에 의해 멸망해 그 역사가 제대로 남아있지 않고, 그나마 당나라 역사서에 언급된 발해말갈 전에는 구당서와 신당서가 건국 시조인 대조영의 출신을 고구려와 말갈로 서로 엇갈리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발해를 조선역사에 넣지 않았으며 신라와 이웃한 나라로만 여겼습니다.

그리고 현재 한국 내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조차, 발해를 세운 백성이 고구려 유민이냐 말갈인 이냐에 대해서는 아직 논란이 있습니다. 기획보도 동북공정, 다음 순서에서는 고조선사가 중국역사라는 중국의 동북공정 주장과 이에 대한 한국 학자들의 반론을 알아봅니다.

워싱턴-전수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