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공산주의 체제와 고려인들:가족영농과 주류사회 진출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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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NING: '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매주,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Andrei Lankov) 국민대 교수와 함께 알아보는 '공산주의 역사이야기' 진행에 전수일입니다.

전수일: 교수님, 고려사람들은 원래 스탈린 사망 때까지 차별을 많이 받았다고 하셨는데요. 스탈린은 1953년 3월에 죽었습니다. 그 후에도 차별이 있었습니까?

란코프 교수: 스탈린의 사망 직후 공식적인 차별은 거의 없어졌습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차별은 여전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일 중요한 변화는 1953년 이후에 고려사람들도 다른 소련사람들처럼 국내에서 이동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습니다. 구소련은 북조선과 달리 대부분의 경우 여행증 없이 자유롭게 국내에서 돌아다닐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려사람들은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교 입학을 많이 했습니다. 1980년대 말 들어와 소련에서 고려사람들만큼 교육수준이 높은 소수민족이 없었습니다. 러시아사람들보다 대학 졸업자 비중이 훨씬 높았습니다. 그러나 학교로 많이 간 고려사람들은 주로 스딸린 사망 이후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나이가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중앙아시아 벌판에서 농사를 열심히 지었습니다. 흥미롭게도 고려사람들은 지금 북조선이 실시하기 시작한 포전담당제를 60년대 말부터 했습니다.

전: 북조선의 포전담당제는 가족영농제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그러니까 가족 단위, 혹은 몇 가족이 농토를 협동농장에서 대여 받아 농사를 짓고, 수확한 농작물 가운데 일정 양을 협동농장에 내고 나머지는 가족이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는 그런 영농방식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원래 포전담당제는 중국의 등소평 시대에 개발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소련에도 있었다는 말씀이군요.

란코프: 네. 소련에서는 고려사람들만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고려사람들이 1950년대 말부터 포전담당제식의 농사를 짓기 시작했을 때는 그런 명칭을 쓰지 않았고 '고봉지'라는 말을 썼습니다. 고려사람들은 '고봉지'가 조선말이라고 하는데, 그 말의 근원에 대해서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도 고려사람들은 고봉지 영농을 많이 하고 있는데, 이것이 제일 성행했던 시기는 1970년대 입니다. 당시에 고려사람들만 할 수 있는 농사 경영방법입니다.

전: 당시 고봉지 영농이 실제 어떤 식으로 실시되었는지 궁금합니다.

란코프: 10-15명의 고려사람들은 분조를 만들었습니다. 이 분조는 그들이 살았던 중앙아시아 마을에 있는 콜호스뿐만 아니라 러시아나 우크라이나까지 가서 콜호스 지배인과 약속을 했습니다. 콜호스 라는 건 당시 소련 정부가 도입한 반관반민 성격의 협동조합식 집단농장 입니다. 고려사람들의 분조는 콜호스로부터 밭을 받았습니다. 밭에서 주로 양파, 수박, 참외를 농작했습니다. 그들은 당연히 콜호스에서 생산량도 할당 받았습니다. 몇 톤 정도 가을에 콜호스에 바치기로 약속했습니다. 계획보다 많이 생산될 경우 콜호스 할당량을 제외한 잉여 생산물은 마음대로 장마당 가격으로 팔 수가 있었습니다. 결국 이런 고봉지 영농으로 고려인들은 당시에 돈을 아주 잘 벌었습니다. 1970년대 고려인들은 여름과 가을에 열심히 일한다면 1인당 5000-10000루블 정도를 벌었습니다. 이것은 소련에서 돈을 잘 벌었던 교수의 1년치 소득보다 더 높습니다. 고려사람 지식인들도 여름에는 옛날 머슴처럼 고봉지에서 일꾼으로 일하고, 돈을 아주 많이 받았습니다.

전: 그런데 교수님, 고려사람들은 왜 자신들이 정착한 중앙아시아 말고도 멀리 떨어진 러시아나 우크라이나까지 가서 고봉지 농사를 지었을까요?

란코프: 잘은 모르지만, 중앙아시아에서는 아마 경쟁도 심하고 토지조건도 그리 좋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래서인지, 고봉지 농사는 1960-70년대 주로 남방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전: 고려사람들이 고봉지 영농으로 스탈린 사후에 돈 도 많이 모으고 자녀들을 대학에도 많이 보냈다고 하셨는데요, 그런 상황이라면 소련사회의 차별이 없었던 것 아닙니까?

란코프: 그렇지 않습니다. 여전히 어느 정도 보이지 않는 차별은 남아 있었습니다. 제가 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구소련에서는 믿을만한 소수민족도 있었지만, 의심스러운 소수민족도 여전히 있었습니다. 의심스러운 소수민족은 소련땅 외부에 자신의 출신국가가 있는 민족입니다. 예를 들면 유대인은 이스라엘이 있었기 때문에 차별이 비교적 심했습니다. 고려사람은 남한과 북한이 있어서 어느 정도는 의심을 받는 소수민족이었습니다. 연구활동이나 경제활동은 문제가 없는데, 공산당 간부나 군관이 된다면 그 이상의 지위 확보는 쉽지 않았습니다. 아마 도당지도원이나 대좌까지는 될 수 있는데 그 이상으로 승진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고려사람 군관들 가운데 소장이 된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고려사람들이 정말 들어가기 힘든 곳은 국가 기밀과 관계가 있는 곳입니다. 국가 정보기관인 KGB에 들어가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습니다. 그러니까 고려사람들이 불만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공부하는 고려사람들은 소련에서 교육수준도 생활수준도 제일 높은 소수민족 중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대체로 말하면 매우 성공적으로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 교수님, 반공정신이 강해 소련 공산체제 사회에 동화하기 어려웠다는 사할린 한인들의 생활은 아무래도 고려사람들보다는 못했을 것 같은데요, 어떻습니까?

란코프: 그렇습니다. 고려사람들만큼 잘 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갈수록 살기가 나아졌습니다. 1970년대까지도 그들은 나중에 남한으로 돌아갈 생각, 그리운 서울이나 부산으로 갈 생각이 많아서, 소련 당국자들이 제안하는 소련국적도 철저히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남한으로 갈 권리를 요구했는데, 소련에서 전례가 거의 없는 시위투쟁까지 벌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아들 딸들은 부모세대와는 사뭇 다릅니다. 자녀 세대는 어린 시절부터 러시아 말, 노어 교육을 받고, 서울로 가는 것보다는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의 명문대에 진학하고 싶어했습니다. 결국 1970년대 말 들어와서는 사할린 한인들 대부분이 소련 국적을 받고, 소련 주류사회에 많이 진출했습니다.

전: 소련이 1991년 말, 해체 된 이후 중앙아시아의 고려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란코프: 매우 간단하게 말씀 드리면, 첫째로 소련붕괴 이후 중앙아시아에서 경제상황도 나빠지고 그 지역의 종교인 회교, 즉 이슬람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차별이 많이 심각해졌습니다. 결국 고려사람들은 러시아로 많이 이주했습니다. 둘째로, 많은 사람들은 남조선으로 가서 남조선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고, 그곳에서 돈을 벌기도 합니다. 셋째로, 많은 경우에 러시아민족과 결혼합니다. 그래서 다음 세대에 고려사람의 민족의식을 가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전: 그러니까 고려사람들의 후손의 정체성이 변하고 있다는 말씀인데요, 어느 나라이든 이민 2세대 3세대에 가면 고유 민족성을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금 러시아에서 살고 있는 고려사람들은 조선말을 잘 하나요?

란코프: 거의 못합니다. 그래서 서울까지 가서 조선말 유학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구소련 지역에서 살고 있는 50-70만명 고려사람 가운데 조선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은 많아야 10% 정도입니다. 뿐만 아니라 잘 사는 남조선으로 가서 교육을 받거나 돈을 벌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비교적 많습니다. 특히 소련붕괴 이후 어렵게 사는 우즈베키스탄 고려사람들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자신들을 아시아 출신의 러시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가 하면, 한국사람도 조선사람도 아닌 제 3의 민족인, '고려민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지 않습니다.

전: 란코프 교수님,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러시아 출신의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학교 교수와 함께 알아본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오늘 순서 여기서 마칩니다. 진행에 전수일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