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의 해외파견 인력 (1)

워싱턴-전수일 chuns@rfa.org
2019-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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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1970년대 소련의 여성 노동자들 모습.
사진은 1970년대 소련의 여성 노동자들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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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NING: '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매주,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Andrei Lankov) 국민대 교수와 함께 알아보는 ‘공산주의 역사이야기’ 진행에 전수일입니다.

전수일: 교수님, 지난번 시간에 동유럽 사람들의 해외 망명과 도피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동구라파에서 정치 위기가 생길 때마다 해당국의 인민들이 다른 나라로 도피해 갔다고 하셨는데요, 그 배경이 무엇이었을지 궁금합니다.

전수일: 교수님, 지난 시간에 소련과 동구권 나라 사람들이 1960-70년대 합법적으로 해외에 갔다 오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셨는데요. 어떤 경우였나요?

란코프 교수: 당시에 소련과 동유럽 공산당 정권들은 외화벌이 때문에 해외로 전문가와 기술자들을 많이 보냈습니다. 출장으로 가는 사람들은 소련이나 동유럽보다 기술수준이 낮은 나라로 갔습니다. 특히 인도와 같은 남아시아 나라나 여러 아랍국가들 그리고 여러 아프리카 국가로 많이 갔습니다.

전: 아프리카 국가로 많이 간 이유가 궁금합니다.

란코프: 지금 사람들이 거의 다 잊어버렸지만, 1960-70년대 세계 어디든지 많은 사람들이 아프리카의 미래에 대해서 희망이 아주 많았습니다. 아프리카는 지하자원을 비롯한 자원이 많고, 자연조건도 좋기 때문에, 그들이 원래 잘 못 살았던 이유는 그저 제국주의와 식민지 통치 때문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믿었습니다. 물론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이것은 착각이었습니다. 아프리카의 어려운 상황을 초래한 것은 단순히 식민통치 때문만이 아니라, 내부갈등과 복잡한 역사적 유산 때문입니다. 그러나 1960-70년대 소련정부도 아프리카의 빛나는 미래를 많이 믿었고, 이들 나라에서 영향력을 얻기 위해 전문가와 기술자들을 많이 보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에 아프리카에서 독립운동도 많았고 내전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소련군인들도, 소련 군사고문들도 아프리카로 많이 갔습니다. 물론 다른 동유럽 국가들도 소련이 시키는 대로 아프리카에 기술지원을 많이 했습니다.

전: 아프리카와 인도 같은 나라에 일하러 갔던 소련 사람들은 외화를 얼마나 벌었나요?

란코프: 아프리카에서 외화를 많이 벌지 못했습니다. 소련정부가 아프리카로 기술자를 보낸 이유는 정치적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인도, 중동, 남아시아국가들은 소련에서 기술과 시설, 장비를 많이 수입했고, 많은 돈을 냈습니다. 그래서 대체로 말하면 이들 국가로부터는 소련이 외화를 벌었습니다. 동독과 체코와 같은 비교적 기술이 발전한 나라들도 기술 수출로 외화를 벌었습니다.

전: 소련 사람들은 외화벌이 하러 해외에 파견되는 걸 원했나요?

란코프: 당연히 그렇습니다. 이것은 우리 북조선 청취자들도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북조선 해외파견노동자들의 생활조건도, 노동조건, 임금도 아주 열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해외로 가고 싶어하는 이유는 북한기준으로 돈을 잘 벌기 때문입니다. 1960-70년대 해외로 간 소련사람들의 노동조건은 오늘날 북조선 파견노동자와 비교할 수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돈을 아주 잘 벌었습니다. 그 때문에 해외로 가고 싶은 사람들 가운데서는 다툼도 암투도 너무 많았습니다. 당시에 해외에서 3년 정도 있었던 기술자는 귀국하자 자가용 승용차도 쉽게 살 수 있었고, 일반 인민들이 꿈에서도 꾸지 못한 가전제품도 다 살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소련에서 1960년대부터 해외에서 합법적으로 돈을 번 사람이면 좋은 집을 살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번만 해외로 갔다 온 사람이라면, 대부분의 경우 귀국한 다음에는 부자가 아니라도 제일 잘 사는 10%에 쉽게 속할 수 있었습니다.

전: 북한 사람들이 해외 파견되려고 간부들에게 뇌물을 많이 고인다고 합니다. 당시 소련에서도 그랬나요?

란코프: 흥미롭게도 거의 없었습니다. 소련시대에 비리가 없지 않았지만, 비리의 방법은 다릅니다. 인맥을 활용하는 것입니다. 노어로 블라투입니다. 그래도 해외에 나갔다 잘 오게 되면 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비싼 선물을 바쳐야 하는 것은 상식이었습니다. 하지만 대체로 말하면 이 문제는 그리 심각하지 않았다고 생각됩니다.

전: 북한에서는 해외 파견 노동자들은 사상적 토대가 좋아야 하고 당에 대한 충실성도 높아야 한다고 하던데요, 해외 나가는 소련 사람들도 그랬나요?

란코프: 그럴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렇지 않았습니다. 소련 정부나 동구권 정부들은 해외에서 어떤 공장이나 도로, 다리를 건설했을 때 그 성과에 대해서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이것은 당중앙과 내각이 직접적으로 감독했습니다. 소련은 당시에 미국을 반대하는 세력, 특히 중국을 반대하는 세력을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어떤 아프리카 나라는 좋은 무기를 받지 못하고, 좋은 군사고문들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소련을 떠나서 갑자기 미국이나 중국의 영향권에 들어갈 우려가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해외로 가는 소련사람들은 능력이 있는 진짜 전문가들입니다. 물론 그들도 블라투를 잘했습니다. 당연히 어떤 기술자는 말조심을 제대로 하지 않고, 소련체제나 공산당을 비판한 적이 있었더라면 해외로 갈 희망이 아예 없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 때문에 해외로 갈 희망을 가지고 있는 소련사람들은 말조심을 잘했습니다.

전: 북한 노동자들은 해외 현장에서 간부들의 감시를 철저하게 받고 있다고 합니다. 소련인들도 해외에서 감시를 많이 받았나요?

란코프: 제일 먼저, 해외로 간 사람들은 체제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표시한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 대부분은 도망칠 생각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도 감시를 했습니다. 사실상 국가별로 큰 차이가 있는데, 어떤 나라에서 소련기술자와 전문가들은 거의 완벽한 자유가 있었습니다. 일이 끝나면 어디든지 갈 수 있었습니다. 한편으로 어떤 나라들에서는 일이 끝난 다음에는 꼭 숙소로 가야 했습니다. 도시로 가기 전에는 보위원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나라들도 있었고, 1년동안 보위원의 얼굴을 두세 번밖에 보지 못하는 나라들도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해외로 파견된 기술자들은 무조건 결혼하고 자녀가 있었습니다.

전: 북한의 경우, 노동자는 물론이고 간부들도 해외에 일하러 나갈 때 가족과 동행할 수 없다고 합니다. 당시 소련의 해외 파견자들도 그랬나요?

란코프: 흥미롭게도 대부분의 경우에 그렇지 않았습니다. 군사전문가들은 무조건 가족 없이 가야 했지만, 외교관들은 무조건 가족과 같이 가야 했습니다. 기술자들은 같이 갈수도, 같이 가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부인과 같이 가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소련당국자들의 입장에서 부인은 인질보다는 북한 식으로 후방 일을 많이 도와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자녀들은 예외적인 경우에만 같이 갈 수 있었는데, 어느정도 인질의 역할을 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이유도 있는데, 사실 소련 기술자들이 파견된 나라 중 많은 나라에는 소련인들을 위한 학교가 없었습니다.

전: 해외 파견되고 싶은 소련 사람들은 말조심을 잘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요, 파견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소련 사람들이 바깥 세상 얘기를 퍼트리지 않았을까요?

란코프: 당연히 그렇습니다. 소련에서 공산주의체제가 무너진 이유중의 하나는 바로 해외생활에 대한 지식이 소련사회에 확산된 때문입니다. 해외로 파견된 사람들은 바로 이와 같은 위험한 지식을 소련 국내에 많이 알려 준 사람들입니다.

전: 란코프 교수님, 오늘도 말씀 감사합니다.

러시아 출신의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학교 교수와 함께 알아본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오늘 순서 여기서 마칩니다. 진행에 전수일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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