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공산국가의 여성 지도자들 (1)

워싱턴-한덕인 hand@rfa.org
2020-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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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택통 중국 주석의 부인 장칭이 1980년 베이징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모습.
모택통 중국 주석의 부인 장칭이 1980년 베이징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모습.
/AP

앵커: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기대와 좌절. '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매주 이 시간에는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Andrei Lankov) 국민대 교수와 함께 공산주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그 미래도 조명해봅니다. 진행에 한덕인 기자입니다.

기자: 란코프 교수님, 최근에 북한의 김여정 제1부부장은 남한을 심하게 비난하면서 심지어는 대남 군사행동을 예고하기도 했습니다. 과거 다른 공산주의 국가들에서는 여성 최고권력자나 많은 권력을 소유했던 여자 간부가 있었을까요?

란코프 교수: 없지 않았지만, 그리 많진 않았습니다. 이것은 슬픈 역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세기에 맑스를 비롯한 공산주의이론가들은 남녀평등을 많이 강조했습니다. 흥미롭게도 당시엔 공산주의만큼 남녀평등을 많이 강조하는 사상이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공산주의운동이 권력을 잡기 이전에, 여성 혁명가들이 많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물론 정확하게 말하긴 어렵습니다. 100여년 전에 공산주의 운동 지도자들 가운데 여성들은 아마 10%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공산당이 권력을 장악한 이후, 고급간부들 사이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많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기자: 공산주의자들은 처음엔 여성의 권리를 강조했습니다. 그들은 왜 권력을 장악한 다음에 마음이 바뀌었을까요?

란코프 교수: 공산주의자들은 여성문제 뿐만이 아니라 여러 문제에서 비슷한 태도였습니다. 그들은 정권을 장악한 다음에, 많은 부분에서 민중의 뜻을 따라갔습니다. 당시에 민중들은 여자가 지도자나 고급간부가 되는 것을 결코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고급 정치 지도자는 남자만 될 수 있다는 생각은 당시에 지배적이었습니다. 남자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여자들도 같은 생각이었다고 할 수 있었는데, 물론 공산주의자들은 가끔 민중의 뜻을 완전히 무시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면 거의 모든 공산국가들이 했던 종교파괴 정책은 좋은 사례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공산주의자라고 해도 모든 부분에서 민중의 뜻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공산주의자들도 민중을 완전히 무시한다면 오랫동안 권력을 지키기 어려웠습니다. 물론 공산정권은 남녀평등법을 만들었고, 일상생활에서 남녀평등을 많이 실현시키려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최고지도부에서 여성들은 완전히 없지 않았지만 극소수입니다.

기자: 그렇다면 최고지도부에 입성한 여성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란코프 교수: 대체로 말하면 두 가지 경우로 나눌 수 있는데, 우선 공산당이 권력을 장악하기 이전에 공산당에 입당하고 높은간부가 된 여성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공산국가의 역사가 시작된 첫 단계에서 힘이 많았습니다. 좋은 사례는 루마니아에서 1947년에 외무상이 된 안나 파우켈이라는 여자입니다. 그녀는 1920년대초 입당했고, 평생동안 혁명활동을 했습니다. 1940년대초 루마니아공산당의 사실상 최고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소련군대로 루마니아에 진출하고, 당시에 당원이 수백명밖에 없던 루마니아공산당을 집권당으로 만들었을 때, 소련군대는 안나 파우켈을 최고지도자로 임명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두 가지 있었습니다. 하나는 파우켈이 여성이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유대인이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소련당국은 공식적으로 여성에 대한 차별도, 유대인에 대한 차별도 반대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공산주의 역사를 보면 초기에 유대인 혁명가들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창시자 맑스도 유대인이었습니다.

기자: 진짜 그렇습니까? 맑스는 유대인이었나요?

란코프 교수: 네 그렇습니다. 맑스의 아버지는 유대인 장사꾼이었는데, 출세를 위해 유대교를 버리고 도이췰란트(독일)의 기본종교인 개신교를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문에 원래 유대인으로 등록되었던 맑스일가는 도이췰란트인으로 재등록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이야기는 안나 파우켈이라는 루마니아 공산당 간부로 돌아갑니다. 파우켈은 정치국위원 겸 외무상으로 얼마동안 지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초기혁명가들처럼 1950년대 종파싸움에 참여했고, 숙청당했습니다. 그래도 당시에 루마니아는 꽤 온건한 나라입니다. 그녀는 처형당하지도 않았고, 감옥에서도 그리 오래 있지 않았습니다. 파우켈은 외국어를 잘 알았기 때문에 공산당의 작은 출판사에서 통역원으로 조용히 살았습니다.

기자: 교수님, 외무상까지 지냈던 인물이 나중엔 통역원으로 조용히 살았다고 하신 부분이 눈에 띄는데요.

란코프 교수: 그래도 이 경우는 운이 좋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50년대 사회주의 진영 국가들 대부분에서는 지도부 내부의 종파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좋은 사례는 청취자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신 북한의 1956년 8월 사건입니다. 이러한 개싸움에서 이긴 지도자들은 자신들과 싸웠던 패배자들에게 “반혁명분자”나 “종파분자”의 딱지를 붙이고, 감옥이나 사형장으로 많이 보냈습니다. 이것을 감안하면 자기 집에서 조용히 살면서 좋은 월급과 배급을 받은 안나 파우켈은 운이 좋았던 사람입니다. 그녀는 5명의 아들딸이 있었는데. 별 차별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파우켈은 늙은 나이까지 잘 살다가 죽었습니다.

기자: 공산국가에서 힘이 많은 여성들은 두 가지 경우로 나눠졌다고 하셨는데요. 하나는 파우켈과 같은 혁명가 출신 여성들입니다. 다른 경우는 어떤 사람들일까요?

란코프 교수: 바로 고급간부들의 친족들입니다. 사회주의국가에서 여성이라면 고급간부가 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가족관계 때문에 힘이 많은 여자들이 가끔 생겼습니다. 제일 잘 알려진 사례는 바로 중국 모택동의 부인 강청입니다.

기자: 교수님, 강청이라면 정말 악명높은 인물 아닌가요? 또 강청은 혁명에 참가한 적도 있지 않았습니까?

란코프 교수: 아닙니다. 강청은 혁명운동에 조금 참가한 적이 있지만, 혁명가 출신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주로 상해에서 배우 활동을 했습니다. 강청은 1960년대 중엽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열심히 참가했는데, 1960-70년대 중국에서 3-4번째로 중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독자적인 기반이 없었습니다. 결국 남편인 모주석이 사망하자, 거의 즉각적으로 숙청되고, 감옥으로 갔으며, 나중엔 자살했습니다.

기자: 다른 공산국가에서는 어떨까요? 지도자의 부인이나 여자 친척 들이 정치에 많이 참여한 적이 있을까요?

란코프 교수: 있지만 그리 많지 않습니다. 흥미롭게도 발칸반도, 즉 남유럽 국가들에선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루마니아에서 1970-80년대에 엘레냐 차우셰스쿠라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녀는 정치국위원 겸 부총리였습니다. 이유는 루마니아 최고지도자 니콜라이 차우셰스쿠의 부인이기 때문입니다. 엘레냐는 당시에 루마니아에서 두번째로 힘이 많은 권력자였습니다. 하지만 강청보다 조금 더 비참한 운명을 맞이했습니다. 차우셰스쿠 정권은 1989년 12월 민중혁명으로 타도되었습니다. 당연히 차우셰스쿠와 엘레냐는 체포되고 총살되었습니다. 알바니아의 독재자 엔베르 호자의 부인 네즈미야도 정치에 많이 참가했고 고급당학교 교장을 지냈습니다. 그녀는 알바니아에서 공산정권이 무너진 다음에 잠깐 감옥에 갔는데, 곧 석방되고 매우 늙은 나이까지 조용히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래도 기본적으로 말하면 공산체제에서 여성 지도자들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기자: 네 란코프 교수님, 오늘 말씀 감사드립니다.

러시아 출신의 안드레이 란코프 한국 국민대 교수와 함께 알아본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오늘 순서 여기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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