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문 사건(6) - 이후 주요 관련자들의 행보

워싱턴-노정민 nohj@rfa.org
2019-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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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 총서기였으나 1989년 천안문 사태로 실각된 자오쯔양.
중국공산당 총서기였으나 1989년 천안문 사태로 실각된 자오쯔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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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하지만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이 시간은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와 함께 공산주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미래도 조명해봅니다. 대담에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입니다.

- 핵심 관련자의 세 부류: 강경파, 온건파, 시위 주도한 청년 학생들

- 강경파 등소평, 이붕 총리 등은 막대한 부 축적

- 온건파 조자양은 가택연금에 퇴직, 온가보는 총리까지 행보 엇갈려

- 시위 주도한 3명은 반공산당 민주화운동∙인권운동 전념


중국에서 발생한 민주화 시위를 중국 정부가 무력으로 진압한 천안문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으로 국민의 경제생활은 나아졌지만, 특권층의 부정부패와 빈부 격차에 불만을 가진 국민을 중심으로 정치 개혁을 요구하는 민주화 시위가 발생했습니다. 몇 차례에 걸쳐 천안문 사건의 발생 원인부터 내용, 의미를 살펴보고 있는데요. 오늘 여섯 번째 마지막 시간으로 천안문 사건 이후 당시 중국 공산당과 시위대의 핵심 관련자들의 행보를 살펴봅니다.

- 교수님. 지난 시간에 중국 공산당이 천안문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진압한 반면, 경제는 열심히 발전시켰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천안문 사건에 관련이 있던 많은 사람은 어떻게 됐는지 궁금합니다.

[란코프 교수] 우선 1989년에 발생한 천안문 사건과 관련이 있는 사람을 세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당시 승리자로 볼 수 있는 중국 공산당의 강경파입니다. 둘째, 대화와 타협을 주장했던 중국 공산당의 온건파입니다. 그들 대부분은 시위대에 어느 정도 공감대가 있었습니다. 셋째, 시위를 주도했던 청년 학생들과 노동자들입니다.
먼저 시위 진압을 명령했던 강경파 핵심 간부들의 운명을 보겠습니다. 핵심 인물은 중국의 개혁개방을 결정했던 최고 권력자 등소평(덩샤오핑)입니다. 그는 천안문 사건 이후에도 죽을 때까지 중국의 최고 통치자로 남아 있었습니다. 등소평은 공식적으로 아무런 중요 직위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공산당 총서기나 국가주석도 등소평 아래에 있었습니다. 그는 1997년 2월에 숨질 때까지 중국의 개혁개방을 주도했습니다.
등소평의 가족과 친족들은 중국에서 막대한 자산을 가진 부자입니다. 그들은 공식적인 사업을 통해 합법적으로 부자가 됐다고 주장하지만, 당연히 사실이 아닌 것 같습니다. 사업을 했을 수도 있지만, 그들이 등소평 일가족이 아니었다면 시골의 돈주 정도 되었을 겁니다. 등소평의 장남은 문화대혁명 때 고생을 많이 했고 장애인이 됐는데, 그도 역시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 강경파의 핵심 인물이었던 이붕은 어땠나요?

[란코프 교수] 천안문에 군대를 동원하는 명령서에 서명했던 이붕은 오랫동안 총리로 지냈고, 그 후에도 매우 늙은 나이까지 중요한 직위에 있었습니다. 지금은 나이가 거의 90세입니다. 그의 가족도 당연히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붕 일가는 중국 발전소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또 이붕의 딸은 중국 발전소의 여왕으로 불렸는데, 얼마 전에 부패가 너무 심해서 습근평(시진핑)국가주석에 의해 퇴직당했습니다.

- 그렇다면 당시 중국공산당 내부에서 시위진압을 반대했던 온건파는 어떻게 됐나요?

[란코프 교수] 대체로 그들은 고생을 많이 했는데, 조금 복잡합니다. 대표적인 희생자는 천안문사건 당시 총서기였던 조자양입니다. 그는 끝까지 시위 진압을 반대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퇴직당했고, 가택연금까지 당했습니다. 감옥에 가지 않았지만, 자유롭게 집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고 늘 감시원이 있었습니다. 그는 석방되거나 복권되지 못한 채 2005년에 숨졌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모든 직위에서 박탈당했지만, 당원 자격을 유지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좋은 연금을 받았고 북경의 호화로운 주택에서 잘 살았습니다. 회고록도 썼는데, 조자양은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고 주장했습니다.
조자양과 함께 시위 진압을 반대했던 온가보는 완전히 다른 모습입니다. 그는 한동안 여러 문제가 있었는데, 나중에 중국 총리가 됐고 그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한 적도 있습니다. 온가보 가족도 엄청난 부자가 됐습니다. 몇 년 전에 서방 언론은 온가보의 며느리가 중국에서 돈이 제일 많은 여자라고 소개했습니다. 온가보 일가의 재산이 30억 달러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 공산당 지도자들은 천안문 사건을 진압하면서 얻은 것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반면, 시위대는 어떻게 됐나요?

[란코프 교수] 그들의 행보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청취자 여러분이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 방려지라는 물리학 교수는 당시 중국의 민주화를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천안문사건의 사상적 지도자 중 한 명입니다. 그는 탱크가 천안문에 진입할 때, 재빨리 북경의 미국 대사관으로 들어갔습니다. 정치적 망명입니다. 그는 거의 1년 동안 대사관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대사관에서 살면서 연구논문을 썼습니다. 1990년 6월, 그는 미∙중 양국의 협상을 통해 미국으로 출국했습니다. 이후 숨질 때까지 미국의 지방 대학교에서 교수로 지내며 살았습니다. 연구를 아주 많이 했고, 정치적 발언을 종종 했는데 많이 하지는 않았습니다. 방려지는 몇 년 전에 숨졌는데, 그의 묘지는 현재 미국에 있습니다.

- 교수님. 방려지 교수는 나이도 조금 많고, 직접 시위를 주도한 사람도 아니잖아요. 시위를 주도했던 청년학생 지도자들의 행보가 궁금합니다.

[란코프 교수] 당시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청년 학생은 3명입니다. 1989년 당시 그들은 모두 스무 살 정도였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왕단, 차이링, 우얼카이시입니다. 왕단과 우얼카이시는 남자이고, 차이링은 여자입니다. 흥미롭게도 우얼카이시는 소수민족 출신입니다.
왕단부터 소개하면 그는 중국 최고 대학인 베이징대학 1학년 학생이었습니다. 그는 사건 직후 체포됐고, 몇 년 뒤 석방됐다가 다시 체포됐습니다. 결국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요청으로 석방돼 미국으로 사실상 망명했습니다. 왕단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하버드 대학에서 역사학 박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얼마 전까지 대만에서 교수로 지내다 다시 미국으로 갔습니다. 왕단은 요즘도 반공산당 민주화 운동을 열심히 하는 것 같습니다.

- 그럼 우얼카이시와 차이링은 어떻게 됐나요?

[란코프 교수] 두 사람 모두 사건 직후 홍콩으로 도망갔습니다. 당시에 홍콩은 영국 땅이었습니다. 그들은 홍콩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습니다. 우얼카이시도 하버드 대학에 다녔는데, 제대로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그도 왕단처럼 나중에 대만에 가서 반공산당 정치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중국 당국에 자수하겠다고 한 적도 있습니다. 당연히 그의 계획은 중국에서 공개재판을 받고, 공산당을 규탄하는 것이었습니다. 중국 측은 그의 목적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의 자수를 끝까지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가 중국 입국을 시도했을 때에도 중국 측은 그를 강제로 출국시켰습니다.
유일한 여자인 차이링도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사업은 참 잘 되었습니다. 그리고 미국 남자와 결혼했으며 반공산당 민주화 운동보다는 주로 여성 인권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 네, 오늘은 교수님과 함께 천안문사건 이후 이와 관련된 사람들의 행보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오늘까지 천안문사건에 대해 모두 살펴봤습니다. 교수님,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기대와 좌절>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학교 교수와 함께 했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노정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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