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 갈등과 분쟁 (4) – 중소 무력충돌

워싱턴-노정민 nohj@rfa.org
2019-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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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모택동 중국 주석과 후르쇼프 소련 총비서.
1958년 모택동 중국 주석과 후르쇼프 소련 총비서.
Photo courtesy of Wikipedia

'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하지만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이 시간은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와 함께 공산주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미래도 조명해봅니다. 대담에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입니다.

 

<중소 갈등과 분쟁 (4) – 중소 무력충돌>

- 후루쇼프 총비서 실각 이후에도 중소관계 갈등

- 소련: 모택동의 중국은 비합리적이고 위험

- 중국: 북경 소련대사관 포위, 남방 시베리아 영유권 주장도

- 1969년에는 무력충돌 발생, 이후에도 전쟁분위기 고조

 

후르쇼프 총비서의 소련과 모택동 주석의 중국 간 갈등이 계속되던 때에 후르쇼프 총비서가 실각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중소관계의 갈등이 해소될 줄 기대했지만, 오히려 갈등은 더 깊어졌고 끝내 무력충돌까지 발생했습니다. 서로를 공격할 뜻은 없었지만, 공격을 당할까 두려워했던 중소관계의 갈등을 살펴보겠습니다.

- 교수님. 지난 시간에 1960년대 중국은 소련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소련에 맞서 중국을 전 세계 사회주의 진영의 지도자로 만들려 노력했다고 하셨는데요. 하지만 결국 실패로 끝났습니다. 당시 모택동 주석은 소련의 최고지도자였던 흐루쇼프 총비서를 현대 수정주의의 우두머리라며 아주 심하게 비난했는데요. 그 후 1964년 10월에 흐루쇼프는 실각했죠. 이후 중소관계는 어떻게 되었나요?

[란코프 교수] 1964년 10월, 소련 공산당 정치국은 긴급회의를 열고 총비서인 흐루쇼프의 지위를 해제했습니다. 1956년 8월 북한에서 발생했던 사건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 주석이 반대파를 숙청했지만, 소련에서는 흐루쇼프 총비서가 어쩔 수 없이 실각했습니다. 모택동과 그 측근들은 이를 환영했습니다. 이들은 배신자, 수정주의자로 생각했던 흐루쇼프 총비서의 실각으로 소련 지도자들이 자원해 모택동의 지도를 받고, 중국 공산당의 노선을 따라갈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큰 착각이었습니다. 흐루쇼프를 지지했던 사람이든, 흐루쇼프에 반대했던 고급 간부들이든 모두 모택동식 중국 노선은 매우 비합리적이고 위험하며 나라를 파괴하는 정치 노선으로 생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중국을 무시했고, 소련 공산당의 우월한 지위를 당연한 일로 생각했습니다. 소련의 고급 간부들에게 모택동 주석은 누구였을까요? 사회주의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무식하고 뚱뚱하며 멀고 먼 동양 나라의 독재자일 뿐이었습니다. 당시 소련의 지도자들은 흐루쇼프의 실각 이후 중국과 관계가 좋아질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희망과 달리 모택동은 중국이 소련 공산당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습니다.

- 네. 양측 모두 기대하는 것이 달랐지만, 그래도 흐루쇼프가 실각한 이후 양측 모두 상황이 좋아질 줄 기대하지 않았습니까?

[란코프 교수] 네. 그랬습니다. 양측은 착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약 1년 반 정도는 호상 비판이 별로 없었지만, 1966년 5월, 중국에서 악명높았던 문화대혁명이 시작했을 때부터, 다시 비판이 시작됐습니다. 이번 비판은 1963년보다 훨씬 더 심했습니다.

- 교수님. 문화대혁명은 악명이 참 높은데요.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나요?

[란코프 교수] 문화대혁명은 지금 중국에서도 혼란의 10년이라고 평가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모택동이 홍위병으로 알려진 젊은 사람들을 대규모로 조직하고, 폭력집단을 만들었습니다. 이 집단이 당과 국가 간부들, 지식인들과 학교 교원들을 공격하고, 마구 때리고, 모욕을 주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또 이들은 오래된 건물과 예술품들을 마구 파괴했습니다. 당시 모택동의 주장은 이 혼란과 만행이 옳다는 겁니다. 혁명정신을 잃은 간부들을 없애버리고, 그들을 대체할 수 있는 세력을 키우는 방법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당연히 제국주의와 수정주의를 없애버리기 위한 투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 교수님, 수정주의라는 말은 북한이나 중국에서도 소련을 의미하는 말이 됐는데요. 문화대혁명은 중소관계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란코프 교수] 사실상 1966년 이후 거의 20년 동안 중소관계는 완전히 중단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역도 경제교류도 사라졌습니다. 북경에 있는 소련대사관은 흥분한 홍위병들에게 포위됐습니다. 홍위병들은 소련 지도자들의 인형을 불태우면서 소련을 마구 욕했습니다. 당시 대사관 안에 있던 소련 외교관들은 수도 공급이 차단될 것을 걱정해 물을 많이 저장해 두기까지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중국 정부는 소련의 남방 시베리아에 대해 영유권 주장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본적으로 옛날에 청나라가 통치했던 지역이지만, 지금 다른 나라가 통치하고 있다면 모두 빼앗긴 땅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이 모택동 시대의 기본 원칙이었습니다. 1963년부터 중국 측은 소련이 중국 땅을 빼앗아갔다고 비난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국경지대에서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었습니다.

- 교수님. 다른 나라 대사관을 공격하다니 정말 큰 도발인데요. 소련의 태도는 어땠나요?

[란코프 교수] 우려가 커지고 있었습니다. 객관적으로 말하면 당시 중국은 소련을 공격할 능력이 거의 없었습니다. 중국이 얼마 전에 핵을 개발했지만, 소련에 비하면 소규모입니다. 당시 소련 지도부는 모택동을 비롯한 중국 지도부가 매우 비합리적이고 모험적이며 예측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1960년대 말에 양측은 전쟁 준비를 열심히 하기 시작했습니다. 양측 모두 공격할 생각이 별로 없었지만, 공격당할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중국은 소련이 공격할 것을 무서워했고, 소련은 중국의 비합리주의적인 정책을 무섭게 생각했습니다.

- 그렇다면 무력 충돌은 있었나요?

[란코프 교수] 당연히 있었습니다. 1969 3, 소련과 중국군대는 하바롭스크에서 멀지 않은 작은 섬에서 싸웠습니다. 중국말로 진보도, 보물섬이라는 뜻입니다. 소련에서 다만스키라고 불렀습니다. 양측은 섬이 자신의 땅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처음에 주먹다짐으로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탱크와 중무기까지 사용했습니다. 소련 쪽에서 58명이 사망했고, 중국 측은 68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중국 측의 사망자는 훨씬 많았습니다. 그래도 양측은 규모가 커지지 않도록 노력했습니다.

- 교수님. 그렇다면 진보도 교전(혹은 다만스키 교전)의 승리자는 누구인가요?

[란코프 교수] 승리자가 있었다고 없습니다. 양측 모두 섬에서 철수했습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1990년대에 소련이 붕괴한 이후 러시아와 중국이 국경에 관해 합의했을 , 작은 섬은 중국 땅이 되었습니다.

- 교수님. 작은 섬에서의 전투 이후에 양측은 어떤 대책을 준비했나요?

[란코프 교수] 양측 모두 전쟁 준비를 열심히 했습니다. 때문에 전쟁 분위기가 많이 고조됐습니다.

- 네. 오늘은 란코프 교수님과 함께 후르쇼프 총비서가 실각한 이후 소련과 중국의 갈등 관계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교수님. 오늘 말씀도 잘 들었습니다.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기대와 좌절>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학교 교수와 함께 했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노정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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