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하지만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이 시간은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와 함께 공산주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미래도 조명해봅니다.
대담에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입니다.
< 중소 갈등과 분쟁 (5) – 미중 국교정상화 >
- 소련과 갈등관계였던 미국과 중국의 관계정상화
- 중국의 모택동 주석과 미국의 닉슨 대통령의 정상회담
- 미국과 중국 , 소련과 대립할 때 협력
- 1979 년에 북경에 미국 대사관 설치 , 중국의 큰 승리
정치의 기본 원칙 중 하나가 '나의 적의 적은 친구'라고 합니다. 미국과 중국이 바로 그랬는데요. 소련이라는 공공의 적을 둔 두 나라는 관계를 개선하고 국교 정상화에 나섰습니다. 공산주의를 매우 싫어했던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중국의 모택동 주석과 정상회담을 한 것은 많은 사람에게 큰 충격을 줬는데요. 사상보다 국가의 이익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로 꼽힙니다.
- 교수님. 1969년에 소련과 중국은 국경에서 수백 명의 전사자가 발생한 소규모 전쟁을 했습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두 공산주의 국가의 군대가 서로 싸웠는데요. 이것은 원래 마르크스, 엥겔스와 같은 초기 공산주의 이론가들이 상상하지 못했던 일 아닙니까? 그런데 왜 이런 일들이 생겼을까요?
[ 란코프 교수 ] 마르크스는 수많은 사상가들처럼 환상이 많았습니다 . 그 환상 중의 하나가 바로 사상이 개인의 이익뿐 아니라 국가 이익보다도 힘이 셀 줄 알았다는 겁니다 .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사상을 믿는 나라들은 서로 대립할 이유가 없을 줄 알았습니다 . 당연히 이것은 착각입니다 . 그러나 마르크스뿐 아니라 이렇게 착각하는 사람이 아주 많았습니다 . 예를 들어 사상이 아니더라도 같은 하나님을 믿는 나라들은 서로 싸우지 않는다는 주장을 세계 역사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 하지만 기독교나 천주교 , 이슬람교이든 같은 종교를 믿는 나라들 사이에 대립도 있고 가끔 전쟁까지 했습니다 .
1969 년 소련과 중국의 전쟁 , 그리고 1979 년 중국과 베트남 ( 윁남 ) 의 전쟁은 이것을 잘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입니다 . 사상이 아무런 힘이 없다고 할 수 없지만 , 사상의 힘이 국가의 이익만큼 강하지도 않습니다 . 이것은 적대관계뿐 아니라 친선관계 , 동맹 관계 등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 바로 소련과 중국이 1960 년대 말 서로 전쟁 준비를 열심히 하고 있었을 때 미국과 중국은 비밀회담을 많이 했고 , 국교 정상화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
- 중국과 미국이 1970년대 초 관계 정상화에 나선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요. 하지만 중국은 그 전에 미국을 제국주의의 철천지원수라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1950년대 중국이 구소련을 때리기 시작한 이유는 소련이 미국과 열심히 대결할 자세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하셨는데요. 그렇다면 중국 측은 왜 미국과 관계를 개선할 뿐 아니라 사실상 가까운 관계를 맺기를 결정했나요?
[ 란코프 교수 ] 이것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 나라의 이익보다 중요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 중국은 소련과 관계가 매우 나빠졌을 때 동맹은 아니었지만 , 당연히 소련을 주적이라고 생각한 미국과 손을 잡으면 좋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 정치의 기본 원칙 중 하나는 무엇일까요 ? 바로 나의 적의 적은 , 친구입니다 . 이 때문에 1960 년대 말부터 중국과 미국은 접촉을 시작했습니다 .
- 교수님. 당시 중국과 미국은 아무런 관계가 없었습니다. 미국 대표자들은 북경이 아니라 대만에 있었고요. 그렇다면 이들은 어떻게 접촉했을까요?
[ 란코프 교수 ] 늘 그랬듯이 공식적으로 수교하지 않은 나라들은 주로 양측 모두의 대사관이
있는 제 3 국에서 회담을 했습니다 . 미 ∙ 중 양국은 회담을 폴란드 ( 뽈스카 ) 의 수도인 바르샤바에서 했습니다 . 이것이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1971 년에 미국 외교를 관리한 사람인 키신저 박사는 파키스탄으로 간다고 발표했습니다 . 하지만 그는 파키스탄에서 비밀리에 북경으로 갔습니다 . 그때부터 지금까지 파키스탄과 중국은 동맹 관계인데 , 두 나라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습니다 . 그래도 두 나라 모두 인도를 매우 싫어해서 동맹 관계가 되었습니다 . 1971 년에 키신저 박사는 북경에 도착해 당시 중국 총리였던 주은래와 회담을 했습니다 . 미국 대통령이던 닉슨도 얼마 후 중국에 가겠다고 했습니다 . 이것은 당시 전 세계에 매우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
- 교수님. 왜 그랬을까요? 중국과 미국의 대립이 너무 심해서 그런 겁니까?
[ 란코프 교수 ] 20 년 동안 서로 열심히 비난했던 두 나라가 갑자기 정상회담을 한다고 하면 이는 매우 놀라운 소식입니다 .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 바로 닉슨 대통령입니다 . 그런데 노 기자님은 1950 년대 닉슨 대통령의 별명이 뭔지 아십니까 ?
-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제가 알기에 닉슨 대통령은 현실주의자였고 공화당 대통령 아닙니까? 또 공산주의를 싫어했던 인물로 기억하는데요.
[ 란코프 교수 ] 물론 그렇습니다 . 그런데 닉슨 대통령은 그냥 공산주의를 싫어한 것이 아닙니다 . 1950 년대에 반공주의자로 가장 유명했던 사람입니다 . 그는 1950 년대에 공산주의 사상의 영향을 막기 위해 아주 열심히 싸웠고 명성도 얻었습니다 . 그래서 닉슨 대통령이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과 갑자기 회담하고 관계를 개선한다고 하자 수많은 사람이 깜짝 놀랐던 겁니다 .
- 교수님. 그렇다면 닉슨 대통령은 어떻게 중국으로 갔나요?
[ 란코프 교수 ] 1972 년 2 월 21 일부터 28 일까지 닉슨 대통령이 북경을 방문했습니다 . 중국 측에서 미국과 회담을 관리한 사람은 주로 주은래 총리였습니다 . 모택동 주석은 당시에 이미 나이가 많았고 , 닉슨 대통령이 오기 직전까지 병원에 누워 있었습니다 . 그래도 모택동 주석은 닉슨 대통령과 잘 회담했습니다 .
- 모택동 주석은 닉슨 대통령과 무슨 이야기를 했나요?
[ 란코프 교수 ] 모택동 주석은 미국과 중국이 교류를 많이 하고 , 미국이 중국에 투자를 많이 하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 뿐만 아니라 둘 사람 모두 소련을 포함한 친소 사회주의 국가와 대립하는 방안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했습니다 . 형식적으로 군사동맹은 아니지만 , 사실상 1970 년대 초부터 80 년대 말까지 미국과 중국은 소련과 대립할 때 많이 협력했습니다 . 뿐만 아니라 공식적인 수교 문제도 중요했습니다 .
- 당시 미∙중 양국은 아직 수교하지 않았습니다. 미국 대사관은 중화민국, 즉 대만에 있었고요. 북경에서 미국대사관이 없었잖아요.
[ 란코프 교수 ] 정확하게 말하면 중국은 한국처럼 분단국가라 할 수 있습니다 . 남북한의 경우 원래 그렇지 않았지만 , 1970 년을 전후해 서방 나라들이 서울과 평양에 동시에 대사관을 설치할 수 있게 됐습니다 . 하지만 중국은 그렇지 않습니다 . 예를 들어 어느 나라가 중화민국 , 즉 대만과 수교하면 곧바로 중화인민공화국 , 즉 북경과는 단교하게 됩니다 . 다시 말해 대만의 수도인 대북에 대사관이 있다면 , 북경에는 대사관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 1979 년까지 미국 대사관은 대만에 있었습니다 . 그런데 1972 년에 아직 수교도 하지 않은 중국으로 닉슨 대통령이 갔던 겁니다 .
- 그럼 1979년에는 어떻게 됐나요?
[ 란코프 교수 ] 미국은 1979 년에 대만에 있던 대사관을 폐쇄하고 , 북경에 대사관을 설치했습니다 . 이것은 중국의 큰 승리였습니다 .
- 중국의 승리라고 하셨는데, 왜 그런가요?
[ 란코프 교수 ] 이에 대한 설명은 다음 시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
- 네. 오늘은 란코프 교수님과 함께 1970년대 미국과 중국의 관계 개선 움직임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란코프 교수님,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