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 갈등과 분쟁 (5) – 미중 국교정상화

워싱턴-노정민 nohj@rfa.org
2019-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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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키신저 박사가 중국의 모택동 주석을 만나는 모습.
1971년 키신저 박사가 중국의 모택동 주석을 만나는 모습.
Photo courtesy of Wikipedia

'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하지만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이 시간은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와 함께 공산주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미래도 조명해봅니다.

대담에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입니다.

 

<중소 갈등과 분쟁 (5) – 미중 국교정상화>

- 소련과 갈등관계였던 미국과 중국의 관계정상화

- 중국의 모택동 주석과 미국의 닉슨 대통령의 정상회담

- 미국과 중국, 소련과 대립할 협력

- 1979년에 북경에 미국 대사관 설치, 중국의 승리

 

정치의 기본 원칙 중 하나가 ‘나의 적의 적은 친구’라고 합니다. 미국과 중국이 바로 그랬는데요. 소련이라는 공공의 적을 둔 두 나라는 관계를 개선하고 국교 정상화에 나섰습니다. 공산주의를 매우 싫어했던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중국의 모택동 주석과 정상회담을 한 것은 많은 사람에게 큰 충격을 줬는데요. 사상보다 국가의 이익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로 꼽힙니다.

- 교수님. 1969년에 소련과 중국은 국경에서 수백 명의 전사자가 발생한 소규모 전쟁을 했습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두 공산주의 국가의 군대가 서로 싸웠는데요. 이것은 원래 마르크스, 엥겔스와 같은 초기 공산주의 이론가들이 상상하지 못했던 일 아닙니까? 그런데 왜 이런 일들이 생겼을까요?

[란코프 교수] 마르크스는 수많은 사상가들처럼 환상이 많았습니다. 환상 중의 하나가 바로 사상이 개인의 이익뿐 아니라 국가 이익보다도 힘이 알았다는 겁니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사상을 믿는 나라들은 서로 대립할 이유가 없을 알았습니다. 당연히 이것은 착각입니다. 그러나 마르크스뿐 아니라 이렇게 착각하는 사람이 아주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사상이 아니더라도 같은 하나님을 믿는 나라들은 서로 싸우지 않는다는 주장을 세계 역사에서 많이 찾아볼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나 천주교, 이슬람교이든 같은 종교를 믿는 나라들 사이에 대립도 있고 가끔 전쟁까지 했습니다.

1969 소련과 중국의 전쟁, 그리고 1979 중국과 베트남(윁남) 전쟁은 이것을 보여주는 다른 사례입니다. 사상이 아무런 힘이 없다고 없지만, 사상의 힘이 국가의 이익만큼 강하지도 않습니다. 이것은 적대관계뿐 아니라 친선관계, 동맹 관계 등에도 영향을 미칠 있습니다. 바로 소련과 중국이 1960년대 서로 전쟁 준비를 열심히 하고 있었을 미국과 중국은 비밀회담을 많이 했고, 국교 정상화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 중국과 미국이 1970년대 초 관계 정상화에 나선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요. 하지만 중국은 그 전에 미국을 제국주의의 철천지원수라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1950년대 중국이 구소련을 때리기 시작한 이유는 소련이 미국과 열심히 대결할 자세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하셨는데요. 그렇다면 중국 측은 왜 미국과 관계를 개선할 뿐 아니라 사실상 가까운 관계를 맺기를 결정했나요?

[란코프 교수] 이것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나라의 이익보다 중요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중국은 소련과 관계가 매우 나빠졌을 동맹은 아니었지만, 당연히 소련을 주적이라고 생각한 미국과 손을 잡으면 좋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정치의 기본 원칙 하나는 무엇일까요? 바로 나의 적의 적은, 친구입니다. 때문에 1960년대 말부터 중국과 미국은 접촉을 시작했습니다.

- 교수님. 당시 중국과 미국은 아무런 관계가 없었습니다. 미국 대표자들은 북경이 아니라 대만에 있었고요. 그렇다면 이들은 어떻게 접촉했을까요?

[란코프 교수] 그랬듯이 공식적으로 수교하지 않은 나라들은 주로 양측 모두의 대사관이

있는 3국에서 회담을 했습니다. 양국은 회담을 폴란드(뽈스카) 수도인 바르샤바에서 했습니다. 이것이 첫걸음이라고 있습니다. 1971년에 미국 외교를 관리한 사람인 키신저 박사는 파키스탄으로 간다고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파키스탄에서 비밀리에 북경으로 갔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파키스탄과 중국은 동맹 관계인데, 나라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습니다. 그래도 나라 모두 인도를 매우 싫어해서 동맹 관계가 되었습니다. 1971년에 키신저 박사는 북경에 도착해 당시 중국 총리였던 주은래와 회담을 했습니다. 미국 대통령이던 닉슨도 얼마 중국에 가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당시 세계에 매우 충격을 주었습니다.

- 교수님. 왜 그랬을까요? 중국과 미국의 대립이 너무 심해서 그런 겁니까?

[란코프 교수] 20 동안 서로 열심히 비난했던 나라가 갑자기 정상회담을 한다고 하면 이는 매우 놀라운 소식입니다. 하지만 이보다 중요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로 닉슨 대통령입니다. 그런데 기자님은 1950년대 닉슨 대통령의 별명이 뭔지 아십니까?

-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제가 알기에 닉슨 대통령은 현실주의자였고 공화당 대통령 아닙니까? 또 공산주의를 싫어했던 인물로 기억하는데요.

[란코프 교수] 물론 그렇습니다. 그런데 닉슨 대통령은 그냥 공산주의를 싫어한 것이 아닙니다. 1950년대에 반공주의자로 가장 유명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1950년대에 공산주의 사상의 영향을 막기 위해 아주 열심히 싸웠고 명성도 얻었습니다. 그래서 닉슨 대통령이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과 갑자기 회담하고 관계를 개선한다고 하자 수많은 사람이 깜짝 놀랐던 겁니다.

- 교수님. 그렇다면 닉슨 대통령은 어떻게 중국으로 갔나요?

[란코프 교수] 1972 2 21일부터 28일까지 닉슨 대통령이 북경을 방문했습니다. 중국 측에서 미국과 회담을 관리한 사람은 주로 주은래 총리였습니다. 모택동 주석은 당시에 이미 나이가 많았고, 닉슨 대통령이 오기 직전까지 병원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래도 모택동 주석은 닉슨 대통령과 회담했습니다.

- 모택동 주석은 닉슨 대통령과 무슨 이야기를 했나요?

[란코프 교수] 모택동 주석은 미국과 중국이 교류를 많이 하고, 미국이 중국에 투자를 많이 하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 모두 소련을 포함한 친소 사회주의 국가와 대립하는 방안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했습니다. 형식적으로 군사동맹은 아니지만, 사실상 1970년대 초부터 80년대 말까지 미국과 중국은 소련과 대립할 많이 협력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공식적인 수교 문제도 중요했습니다.

- 당시 미∙중 양국은 아직 수교하지 않았습니다. 미국 대사관은 중화민국, 즉 대만에 있었고요. 북경에서 미국대사관이 없었잖아요.

[란코프 교수] 정확하게 말하면 중국은 한국처럼 분단국가라 있습니다. 남북한의 경우 원래 그렇지 않았지만, 1970년을 전후해 서방 나라들이 서울과 평양에 동시에 대사관을 설치할 있게 됐습니다. 하지만 중국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어느 나라가 중화민국, 대만과 수교하면 곧바로 중화인민공화국, 북경과는 단교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대만의 수도인 대북에 대사관이 있다면, 북경에는 대사관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1979년까지 미국 대사관은 대만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1972년에 아직 수교도 하지 않은 중국으로 닉슨 대통령이 갔던 겁니다.

- 그럼 1979년에는 어떻게 됐나요?

[란코프 교수] 미국은 1979년에 대만에 있던 대사관을 폐쇄하고, 북경에 대사관을 설치했습니다. 이것은 중국의 승리였습니다.

- 중국의 승리라고 하셨는데, 왜 그런가요?

[란코프 교수] 이에 대한 설명은 다음 시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 네. 오늘은 란코프 교수님과 함께 1970년대 미국과 중국의 관계 개선 움직임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란코프 교수님,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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