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공산권은 지금: 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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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공산체제를 버리고 자유민주체제로 돌아선 이들 나라의 개혁, 개방의 현주소를 짚어보는 ‘구공산권은 지금’ 늘은 구소련 위성국 가운데 가장 개혁에 성공했다는 평가를 듣고 있는 체코에 대해 살펴봅니다.

체코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지난 89년 공산통치를 무너뜨린 ‘벨벳 혁명’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체코가 오늘날 경제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초석을 놓았던 게 바로 ‘벨벳 혁명’이었죠. 벨벳 혁명이란 지난 89년 11월16일부터 12월29일까지 계속됐던 평화적인 시위를 통해 당시 공산 정부가 무너진 것을 일컫는데요. 이를 계기로 체코에 민주정부가 들어서고 시장 개혁의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습니다.

벨벳이란 말은 부드러운 우단을 말하는데 당시 시위를 지켜본 한 언론인이 비폭력, 평화적 시위를 가리켜 ‘벨벳 혁명’이라고 이름을 붙였고 이 말은 인터넷을 통해 순식간에 퍼지게 된 것이죠. 아무튼 벨벳 혁명을 통해 그해 12월 시인이자 민주주의 운동가인 바클라브 하벨이 대통령에 올랐습니다.

혁명 전 당시 상황은 어땠습니까?

체코는 2차대전 뒤인 1948년 공산정부가 들어섰습니다. 당연히 야당도 반체제 인사도 있을 수가 없었죠. 이런 공산 통치체제는 지난 85년 구소련에서 실권을 잡은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개혁을 추진하면서 변화가 일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체코 공산정부도 말로는 개혁을 떠들었지만 실제론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러다 89년 들어 독일을 포함한 주변국에서 변화가 일기 시작하면서 체코에도 그 해 처음으로 반정부 시위가 발생했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것을 본 체코 국민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이것은 그해 11월 학생들의 평화적 반정부 시위로 이어졌고, 시위가 시작된 지 한 달 보름만에 못가 공산정부는 두 손을 들게 된 것이죠.

체코도 개혁, 개방 초기에는 어려움이 많았죠?

사실 체코는 같은 위성국이었던 헝가리나 폴란드 등 다른 나라들에 비해 훨씬 더 발달한 산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도 많았으며 사회간접 시설도 크게 발달해 있었지요. 그러나 당시 체코 산업 시설은 공산주의 모국인 소련과 그 위성국끼리 연계돼있었기 때문에 공산권이 무너진 뒤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체코는 주 수출시장이던 공산권이 무너지면서 산업이 피폐해진 것이죠. 결국 개혁, 개방이 본격화되던 90년대부터 체코는 마이너스 성장을 거듭했습니다. 특히 지난 90년엔 체코 정부가 기존의 화폐 가치를 종전에 비해 50% 낮추는 평가절하 조치를 취해 국민들의 민생고가 말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견디다 못한 체코가 지난 91년 국제통화기금의 경제회생 처방을 받았죠?

맞습니다. 국제통화기금은 지난 97년 아시아 금융위기 때도 남한에 경제 처방을 해준 적이 있는데요. 국제통화기금은 우선 당시까지도 철저한 국가통제아래 놓여있었던 가격 제한을 거의 다 풀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연간 물가 인상율이 10%를 넘나들어 국민들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또 적자를 줄이기 위해 중앙정부의 예산을 대폭 깍았죠. 또 경제 활로를 찾기 위해 공산권 시장 대신 서유럽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아울러 외국인들이 체코에 투자하기 쉽도록 투자와 관련한 법제도를 모두 정비했습니다.

허리띠를 졸라 맨 덕에 체코가 93년부터 회복세로 돌아섰지 않았습니까?

말씀하신대로 재정긴축과 외국인 투자확대, 민영화 작업에 박차를 가한 덕분에 체코 경제가 93년부터는 회복세로 돌아섰습니다. 이듬해 경제성장률이 2.4%를 기록했고 95년부터는 58개 주요 국영회사들에 대한 민영화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그러나 97년 들어 민영화 사업이 부진하고 자본시장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면서 통화위기가 발생해 큰 경제위기를 겪어야 했죠. 이에 체코 정부는 민영화 작업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외국인 투자유치에도 온힘을 기울였습니다. 그 덕분에 89년 이후 2000년까지 외국인 투자 유치액이 238억 달러나 됐습니다.

워싱턴-변창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