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직업, 나의 미래] 봉제사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2010.08.17
MC: 안녕하세요 ‘나의 직업, 나의 미래’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최근 중국 기업들의 임금이 줄줄이 오르자 생산단가 면에서 남한 업체들의 경쟁력이 살아나면서 소량 단품 주문을 중심으로 봉제물량이 늘었다고 남한 언론이 보도했습니다. 오늘은 남한의 봉제산업 전반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고 현재 봉제 일을 하는 탈북여성의 이야기도 들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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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훈 서울시장이 은평구 응암동 중소형 의류봉제공장인 세영MNT를 방문해 서울시 일자리창출 지원사업을 점검하고 직원들을 격려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사진-연합뉴스 제공
서울에서 영세한 봉제업체가 많이 몰려 있는 종로구 창신동을 가보면 곳곳에 미싱사. 시다 구함 이라고 적힌 구인광고를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창을 열어 재낀 반지하 가정집에선 요란하게 돌아가는 전기 재봉틀 즉 미싱 소리가 끊이질 않습니다. 남한에 봉제업에 종사하는 사람의 규모는 얼마나 될까?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봉제산업 실태 조사를 하고 있는 봉제업종합지원센터 김왕식 씨의 말을 들어봅니다.

김왕식: 사실 국내 봉제업체 수나 또는 봉제업 종사자 수를 정확히 아는 곳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국내 봉제업이 중국이나 인도, 베트남 등 저임금 국가로 많이 빠져나가서 국내 업체가 10년, 20년 전에 비하면 굉장히 열악해지고 영세해졌습니다. 기존에 있던 공장도 부도를 맞으면 사업자 번호를 없애고 다시 해도 사업체 등록을 안 하는 경우도 있고요. 그래서 이런 경우는 통계가 잡히질 않는 겁니다.

이 단체는 제조업체 중 의복, 모피제품 제조업, 의복 장신구 업체 2만 4,000개의 자료를 통계청에서 받아 직접 전화를 해서 1만여 개 봉제업체가 답한 자료를 바탕으로 통계를 냈습니다. 2009년 통계를 보면 전체 봉제업 종사자 51,600여 명으로 연령대는 ‘40대’가 39%로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는 ‘50대’, ‘30대’순으로 나타났습니다. 다른 업종에 비해 봉제업 종사자의 연령대가 높은 것으로 집계됐습니다. 옷을 만드는 봉제업은 계절이나 유행에 따라 빠르게 유통이 되어야 하는 특성상 대도시 특히 서울을 중심으로 작업장이 있었습니다.

김왕시: 동대문, 남대문 시장이 기본적으로 받쳐주니까 거기는 전통적으로 봉제공장이 많았고 중량구 면목동 지역도 봉제공장 밀집지역이고 종로구는 종로 상가가 있어 많습니다. 서울이 봉제공장의 50%를 차지하고 부산이 10%, 경기도가 10% 그다음 대구가 7% 정도입니다.

미싱, 재봉틀, 본봉기 이 세 단어는 전부 같은 말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업계에서는 재봉틀이나 본봉기 보다는 미싱이란 말을 많이 씁니다. 미싱을 다루는 기술자를 미싱사 또는 봉제사라고 하는데 남한에서 나이가 40대 이상 된 사람들에겐 구로공단에서 열심히 미싱을 돌리는 여직공을 쉽게 떠올릴 수도 있겠습니다. 그만큼 봉제사는 힘든 일에 비해 보수는 별로 높지 않은 비인기 직종의 하나였습니다. 이러한 좋지 않은 인식은 현재 갑작스러운 물량증가를 처리해줄 봉제인력이 턱없이 부족한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요즘 봉제사의 임금 수준에 대해 김왕식 씨의 말을 다시 들어봅니다.

김왕식: 초보자는 80만 원에서 120만 원이라고 보면 되고 약간 경력이 있다고 해도 미싱사는 150만 원 넘기가 쉽진 않아요.

남한의 봉제인력은 10년 전만 해도 약 30만 명에 달했지만 지금은 10만 명 내외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형 봉제업체도 몸집을 줄여 이제는 소규모로 운영되는 곳이 대부분입니다. 동대문 의류봉제협회 나병태 회장입니다.

나병태: 전에는 한국도 대규모 공장이 많았는데 지금은 100명 이상 직원이 있는 공장은 변두리에 몇 개고 지금은 혼자나 둘이 집에서 하는 정도고 많아야 10여 명이 하는 공장이 태반이죠.

청진이 고향인 탈북여성 김승희(가명) 씨는 북한에서부터 봉제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남한에서도 기술을 살려 외국으로 수출되는 큰인형의 옷을 만들어 납품하고 있습니다. 김 씨는 미싱을 다루는 것은 북한에서와 큰 차이가 없는데 일에 사용하는 용어가 달라 처음엔 무척 애를 먹었다고 했습니다.

김승희: 다 다릅니다. 우리는 천이라고 하지만 여기는 원단이라고 하고 색도 우린 밤색, 노란색 이러는데 여긴 오렌지색, 핑크색 말을 못 알아듣겠어요. 여기선 지퍼라고 하는데 무슨 말인지 압니까? 지퍼 달아라 하는데 몰라서 그냥 앉아 있으니까 그것도 모르는가 하면서 무시하는 것 있잖아요.

업체 관계자의 말을 들어보면 봉제사의 임금 수준은 80만 원에서 부터 많게는 300백만 원까지. 미국 돈으로 하면 초임이 보통 월 700달러에서 숙련공이 되면 2,500달러까지 받는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현장에서 일하는 김 씨는 이보다 보수가 적고 인식 또한 그리 좋지 않다고 했습니다.

김승희: 남한 사람은 미싱하는 사람을 우습게 생각합니다. 우리 북조선에선 미싱하는 사람 높이 봅니다. 그런데 여기선 대우가 안 좋습니다. 식당가서 일하면 시간당 5천 원 계산해서 12시간 일하면 6만 원 받지만 봉제는 그렇게 못 받거든요. 근무시간은 9시부터 저녁 7시까지인데 급여가 쎈 사람은 140만 원 받고 처음 하는 사람은 90만 원도 받고.

봉제일은 옷을 만드는 공장 즉 작업장에 가서 할 수도 있고 주문을 받아 집에서 만들어 갖다 주는 식도 있습니다. 공장에 출퇴근하면 차를 타고 가야 하고 점심을 사 먹을 때도 있어서 호주머니 돈이 나가게 됩니다. 하지만 집에서 일감을 받아다 하면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고 출퇴근에 들어가는 교통비를 줄일 수 있다는 이점이 있습니다. 이 둘 중 김 씨는 가능하면 작업장에 가서 일하는 편이 낫다고 합니다.

김승희: 회사 나가서 급여 타는 것이 깨끗합니다. 왜냐하면 집에서 할 때는 자지도 못하고 화장실 가는 시간도 아까워서 하는데 회사 나가면 집에 들어오면 깨끗하단 말이에요. 집에서 할 땐 먼지가 나고 아이들 밥도 못해주고 씻지도 못하고 그런데 돈이 별로 안됩니다. 회사 나가 돈을 덜 받더라도 아침에 출근하고 깨끗한 집에 들어오는 것도 좋고…

보통 일감을 받아서 할 때는 일을 많이 해낼수록 수입이 늘기 때문에 밤낮없이 일에 매달리게 되고 특히 납품일을 맞춰야 하는 경우엔 집중해서 쉬지 않고 일해야 하기 때문에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너무 피곤하다는 겁니다. 김 씨의 계획도 들어봅니다.

김승희: 계획이야 방대한데… 남들이 3천 원 받을 때 2천 원 받고 하면 되는데 이런 것도 조건이 돼야 하는 거고 정착금 받은 것은 브로커에게 다 주고 지금은 돈 회전이 빠른 일 합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손바느질하고 그런 끼가 있었습니다. 난 이 직업을 돈 버는 것보다도 사람들에게 베풀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직업을 사랑합니다. 사람들이 천 가지고 와서 내가 옷을 해줄 땐 긍지를 느낍니다.

평생 직업으로 기술하나 익혀 놓는 것은 힘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남한에는 탈북자나 저소득층 실업자를 위해 무료로 직업훈련 교육을 하는 곳이 있습니다. 서울시에서 지원하는 서울시립 한남직업전문학교가 그중 하나입니다. 이의길 교육부장입니다.

이의길: 봉제 과정은 하루 6시간 수업합니다. 옷 만드는 과정의 이론과 실기를 동시에 하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학비는 물론 교재비, 재료비, 점심을 제공하고 자격증 취득 시 들어가는 비용도 제공합니다. 또 졸업 후 취업도 알선합니다.

모든 이의 선망의 직업이라고는 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자신의 적성을 살리고 일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다면 김승희 씨처럼 행복한 내일을 계획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나의 직업, 나의 미래’ 오늘은 봉제사란 직업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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