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문 시위 30주년을 맞으며

주성하-탈북자, 동아일보 기자
2019.06.07
Tiananmen_Square_protests_b 1989년 중국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에서 학생들이 붉은 깃발을 들고 민주화시위를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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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북녘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1980년대 등소평 호요방 이선념, 양상곤, 조자양과 같은 중국 지도자들이 북한에 많이 왔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이 이들이 평양에 오면 시민들이 대규모 연도환영을 했습니다. “환영환영 호요방, 환영환영 호요방” 이렇게 외치며 꽃다발을 흔들었죠.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인 1989년 4월 24일에 중국 공산당 총서기 조자양이 평양에 왔는데 저는 이게 지금도 기억납니다. “환영환영 조자양” 이랬거든요.

그런데 조자양은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간 뒤 한 달 만에 사라졌습니다. 당연히 북한 사람들은 대다수가 그 내막을 알 수가 없죠. 아니, 사라진 것도 몰랐습니다. 조자양이 평양에 왔을 때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선 베이징대 청화대 등 명문대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중국의 민주화와 부패청산 등을 외쳤습니다. 광장에 모인 사람은 한때 100만이 넘었습니다. 그냥 인산인해였죠.

조자양이 평양을 방문한 사이 중국 지도자들 속에선 이 시위를 강제로 진압할지 대화로 해결할지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조자양은 대화파였습니다. 하지만 조자양이 평양에 간 사이에 강경파인 당시 총리 리붕이 무력진압을 주장했고, 결국 당시 중국에서 최고 실권자였던 등소평이 이에 동의했습니다.

계엄령이 선포되기 하루 전인 18일 저녁~19일 새벽 사이 조자양과 리붕은 천안문 광장에서 단식 농성 중이던 학생들을 찾아갔습니다. 인민복 차림의 중국 공산당 총서기는 거의 눈물을 흘릴 듯한 모습으로 학생들의 단식 중단과 학교 복귀를 간청했습니다. 이들이 버티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뻔히 알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은 해산을 거부했습니다. 조자양은 돌아가 사표를 냈고, 그날 밤을 마지막으로 공식석상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이후 16년에 걸친 장기 연금 상태에 들어갔고 마침내 2005년 1월 17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중국 공산당 총비서마저 사표를 받아내고 가택 연금 시킬 정도로 그때 등소평의 위세가 대단했습니다. 당시 등소평은 “20만 명이 죽는다 해도 국면을 통제하고 20년의 안녕을 쟁취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5월 20일 드디어 계엄령이 선포된 뒤 5만 명의 중국 군인들이 베이징에 투입됐습니다. 그러나 시민들과 학생들의 완강한 저항으로 광장에 들어가지 못하고 빙 둘러 포위하고 대치했습니다. 이때 시위대는 병사들이 수고한다고 물과 음식을 가져다 주었고 군인들도 학생들이 단식으로 탈진해 쓰러지면 군의관이 가서 치료를 해주었습니다. 서로 마주 보고 앉아서 각자 혁명가요를 부르며 누구 목소리가 더 크냐 이런 경쟁도 했습니다. 이때는 말 그대로 중국인민해방군 즉 명칭 그대로 인민의 군대였죠.

하지만 정권의 권력을 쥔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은 6월 3일 최종 진압 명령을 내렸습니다. 군인인 이상 명령을 위반할 수는 없었겠죠. 물론 이 명령을 거부한 사람도 있습니다. 베이징에 진입한 3개의 주요 부대 중 하나인 38집단군 서근선 사령관은 “인민해방군은 인민에게 총부리를 돌릴 수 없다”라며 강제 진압을 거부했습니다. 그는 군법에 의해 직위 해제됐고, 5년 동안 감옥 생활을 한 뒤 죽을 때까지 가택 연금에 처해졌습니다. 약 20여년 뒤에 홍콩의 한 언론이 그를 찾아가니 군인연금도 끊기는 등 상당히 어렵게 살고 있었음에도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다시 그 때로 되돌아가도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더랍니다.

아무튼 반대하는 사령관은 해임하면서 군이 3일 밤 시위대의 강력한 저항을 뚫고 광장에 진입합니다. 시위대가 만들어 놓은 바리케이드가 나타날 때마다 장갑차로 뭉개고 총을 쏴서 뚫고 밀고 들어갔습니다. 시위대는 화염병을 탱크와 장갑차에 던지며 저항을 했습니다만 총을 쏘면서 들어가는 군인들을 막아낼 수 없었습니다. 총탄에 쓰러지고 흩어지는 사람들 속에 진입한 중국 군인들은 나무 곤봉을 무지막지하게 휘두르며 피를 쏟게 했습니다. 군인들이 결국 광장에 도착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총탄을 피해 숨었고, 텅 빈 광장의 중심인 인민영웅기념비 주변에 시위대의 핵심인 수백 명이 마지막까지 남았습니다.

총탄이 장전된 수천 개의 총구 앞에 섰던 이 학생들은 어떤 생각이었을까요? 이들은 직면한 상황 앞에서 급히 내부 회의를 했습니다. 해산하자, 아니다 끝까지 싸우자 이렇게 논쟁을 했습니다만 결국 군과 담판을 지어 나중에 처벌을 하지 않기로 약속을 받고 광장을 떠났습니다. 물론 이후 중국 당국은 요시찰 인물들을 찾아 감옥에 넣는 등 탄압을 했습니다.

천안문 사건은 지금까지 사망자가 몇 명인지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중국 군인들이 광장에 진압하기 전에 광장 주변의 전기를 차단했습니다. 칠흑같은 암흑 속에서 대량 살육이 일어났습니다. 새벽에 군인들이 시신들을 담아 어디론가 가져갔습니다. 불도저가 와서 광장에 어지럽게 흩어진 모든 것들을 모아 가져갔습니다.

중국은 이 사건 진압으로 민간인 875명이 사망, 부상 1만 4550명이 발생했고, 군인과 전경은 56명이 사망, 7525명이 부상당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런데 중국 발표를 어떻게 믿겠습니까? 국제적십자협회는 사망자 숫자를 2600명으로 발표했고, 한편에서는 5000명이다, 1만 명이다 이런 주장도 있습니다만, 다 확인할 수 없습니다. 중국이 흔적을 지웠는데 어떻게 압니까?

이후 중국에선 1989년 6월 4일에 대해, 천안문 시위에 대해 말하는 것은 금기어가 됐습니다. 그렇게 중국의 젊은 피들이 붉은 피로 천안문광장을 적신지 벌써 30년이 흘렀습니다. 여전히 중국은 공산당이 통치하고 있고, 민주화는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중국은 시도라도 했지만 북한과 같은 독재체제에선 애초에 그런 저항 자체가 없습니다. 어두운 저 하늘을 쳐다보며 북한 민주화에 대한 소망을 떠올리는 이 밤입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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