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상화를 품고 죽은 선원들의 운명

주성하∙ 탈북자, 동아일보 기자
2013.07.12
changjeon_home_portrait-305.jpg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방문한 창전거리 살림집에 김일성, 김정일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사랑하는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남쪽의 많은 사람들은 북한 사람들이 김일성-김정일 초상화를 보위하면서 죽어가는 현상을 매우 괴이하게 생각합니다. 이런 일이 언제부터 시작됐나 생각해보면 아마 최초의 사례가 박영덕이란 선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박영덕 선장은 1970년대 서해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배가 가라앉게 되자 초상화를 비닐에 정성껏 싸서 몸에 품었습니다. 그리고 몸에 무거운 연추를 매단 뒤 선원들 앞에서 평양을 바라보며 김일성장군 노래를 목청껏 부른 뒤 바다에 뛰어 들었다 합니다. 연추를 단 것은 혹시 시체가 남조선에 떠내려가면 원수들에게 초상화가 모욕을 당할까봐 그랬다는 겁니다. 나중에 박 선장의 시체가 중국에서 발견됐는데, 그때 중국 사람들이 초상화를 보고 북한에 통보해주면서 박영덕의 영웅적 소행이 널리 알려지게 됐다, 제가 교과서에서 배운 내용은 이랬습니다.

1970년대면 한창 유일사상체계를 확립하기 위한 선전을 대대적으로 할 땐데 마침 북한 당국에 정말 모범적인 사례가 생긴 것입니다. 박영덕은 순식간에 전 국민이 따라 배울 모범이 됐고, 그를 따라 배우지 못한 사람은 처벌을 받았습니다.

사실 초상화라는 것이 평양인쇄공장에서 하루에 수십만 장을 인쇄할 수 있는 종이에 불과한데 이것을 위해 하나뿐인 생명을 내댄다는 것은 미친 짓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까짓 거 타면 다시 찍어서 걸면 될 거 아닙니까.

그런데도 이런 종이에 무슨 권위니 최고 존엄이니 온갖 의미를 잔뜩 붙여선 사람들에게 목숨을 바치게 만드니 정말 말로 설명을 할 수 없는 악독한 정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제 때 일본인들은 우리나라 곳곳에 나무 기둥 몇 개 세워놓고 신이 사는 사당이란 의미에서 신사라고 이름 붙여 놓은 뒤 이곳에 시간 맞추어 계속 절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도 그런 신사가 불에 탄다고 사람들이 타죽으면서 껐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신정군국주의 일제 때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21세기 북한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북한 사람들이 초상화를 꺼내는 이유는 단순히 충성심 때문만은 아닙니다. 불났을 때 맨 먼저 초상화를 꺼내지 못하면 처벌되고, 꺼내면 높은 평가와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이유가 아주 중요하게 작용하죠.

바다에 빠져 죽은 북한 사람들의 품에서 비닐로 꽁꽁 싼 초상화가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차피 빠져 죽는 거 이왕이면 초상화를 품고 죽었다는 것이 알려지면 남은 가족은 영웅 가족으로 좋은 대우를 받고, 자녀들은 만경대혁명학원에 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연추를 달고 죽으면 시체가 발견되기 어렵겠죠. 사람들이 바보는 아니니까 빠져 죽을 상황이 오면 초상화는 품고 죽되, 연추는 안 매다는 것입니다. 시체가 발견돼야 북한 가족이 덕을 볼 수 있으니 말입니다. 초상화를 품고 죽는 것은 이들에겐 가족을 위한 마지막 보험인 셈이었는데 그나마 운이 좋아야 시체가 발견될 수 있었죠.

북한도 이런 사례가 보고되면 어김없이 공화국 영웅을 주던 노력영웅을 주던 해서 크게 보상을 해주었습니다. 평가와 보상을 주지 않으면 정말 미친 사람이 아니고선 초상화를 위해 목숨은 내걸지 않겠죠. 1998년에 함남 무재봉에서 산불이 났을 때 병사 17명이 구호나무를 지키기 위해 나무를 안고 타죽었다면서 이들 모두 영웅칭호를 준 일도 있죠. 물론 그건 그냥 질식해 죽은 병사들을 선전용으로 삼기 위해 엄청 부풀린 거짓말이긴 합니다.

이랬던 북한인데 최근에 보니 좀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지난해 12월에 동해 북부에서 무역선 대각봉호가 침몰됐습니다. 대각봉호는 저도 여러 번 본 친근한 배인데 침몰했다니 씁쓸합니다.

참고로 북한의 대다수 무역선들은 경제사정이 좋을 때인 1970~80년대 건조됐습니다. 대각봉호도 1983년에 건조돼 30년을 사용했습니다. 세계 해운업계에선 25년쯤 지나면 배의 수명이 다 해서 사고가 쉽게 난다고 보고 퇴역시킵니다.

그런데 북에선 1980년대 중반 이후 돈이 없어 사실상 새 배를 건조하지 못하다 보니 낡은 무역선을 퇴역시키지 않고 계속 혹사시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배를 보고 혁명정신으로 버티라고 할 수는 없는 법이죠. 낡으면 가라앉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 최근 5~6년 사이에 폭풍 만나 침몰한 북한 무역선들이 꽤 됩니다.

대각봉호도 그런 신세였는데, 이해 안 되는 것은 조난신호를 보고 러시아 배가 구조하려 갔는데도, 이를 뿌리치고 선원 24명이 구명보트에 탔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구명보트는 태풍을 이기지 못하고 침몰하고, 이중 6명의 시신이 올해 2월과 5월 사이에 일본 바다에서 발견됐습니다.

이 선원들의 시신에서 빨간통이 나왔습니다. 침몰될 경우 초상화를 넣기 위해 북한 모든 배가 비상용으로 구비하고 있는 그 빨간 통 안에서 비닐로 꽁꽁 싸 물이 안 들어간 초상화가 발견됐습니다.

그러면 북에서 시신을 찾아가고 영웅칭호를 주는 것이 지금까지 관례입니다. 그들이 죽을 때 바로 그것을 원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문제는 이번엔 놀랍게도 북에서 시체를 찾아가지 않을 뿐더러 입을 딱 씻고 모르는 체 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입니까.

김정은이 올라서서 이제는 초상화를 구하다 죽는 일이 너무 식상해졌다고 생각한 걸까요. 설마 그건 아니겠지만 죽은 선원들은 정말 억울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도 이제는 초상화를 위해 목숨 내걸 필요가 없겠습니다. 불이 나면 일단 목숨부터 챙기십시오. 아마 나중에 북한에 새 정권이 들어서면 초상화를 구하다 죽은 사람들은 바보 중의 바보로 취급될 것입니다. 그리고 초상화를 품고 죽고도 시신조차 조국에 돌아가지 못하는 이번 선원들은 바보 중 특등 바보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한번 곰곰이 생각해 판단해 보십시오.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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