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의 서울살이] 김일성은 창성에 왜 100번 갔을까

주성하-탈북자, 동아일보 기자
2024.09.13
[주성하의 서울살이] 김일성은 창성에 왜 100번 갔을까 평안북도 창성군,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별장 인근에 만들어진 전용활주로. 약 550m 길이의 잘 포장된 활주로, 격납고 등이 보인다. (2017년 촬영 사진)
사진-구글 어스 캡쳐/커티스 멜빈 제공

사랑하는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쯤 김정은의 9 9일 연설을 학습하느라 모두들 머리를 싸매고 있겠네요. 김 씨 일가 3대째 연설은 셀 수 없이 많이 했고, 학습도 쉴 새 없이 했습니다.

 

그런데 북한이 달라졌습니까. 이번 연설에서 저는 김정은이 말한지방의 낙후성을 털어버리기 위한 사업이 70여년, 80년에 달하는 기간 해내지 못했던 사업이라는 고백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혁명을 80년 동안 했다는데 지방은 왜 그리 낙후돼 있을까요.

 

예전에는 지방 발전 정책을 실행하지 않았을까요. 아니죠. 해도 엄청 했죠.

 

대표적 사례로 지금으로부터 62년 전인 1962년에 김일성은 평안북도 창성에서 중앙과 지방당 간부 및 경제일꾼 연석회의를 열고군의 역할을 강화하며 지방공업과 농촌경리를 더욱 발전시켜 인민생활을 훨씬 높이자는 연설을 했습니다. 이 연설을 요약하면 산을 낀 곳에서는 산을 이용하고, 바다를 낀 곳에서는 바다를 뜯어 먹고 살아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북한 선전매체들은 김일성이 궁벽한 산골로 버림받던 창성 땅을 전국의 본보기로 꾸리실 뜻을 지니시고 생애 전 기간 무려 100여 차례나 방문했다고 합니다. 김일성이 100번이나 방문했다는 창성이 지금 전국의 본보기가 맞습니까. 고난의 행군 시기에 창성에선 굶어 죽지 않았을까요. 김일성이 100번 넘게 가서 참견을 해봐야 조그마한 군 하나도 바꿀 수 없었습니다. 그건 바로 사회주의 계획경제라는 말도 되지 않는 방식의 한계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김일성은 왜 하필 창성을 지방 발전의 본보기로 정하고 100번 넘게 갔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 비밀은 바로 창성에 김일성의 최대 특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창성은 김일성, 김정일에 이어 김정은의 특각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창성초대소는 풍치가 수려한 수풍호를 배경으로 주변 경관도 아름답고, 외부에 노출도 되지 않습니다. 이곳이 북한 초대소 중에 최대 규모라고 한 것은 무려 3천 명의 974부대원들이 경비를 서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가 원산초대소로 974부대 8개 중대 25백 명이 경비를 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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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씨 일가의 향락을 위해 수많은 출신성분 좋은 젊은이들이 외부 사람 구경도 못한 채 10년을 심심산골에서 썩고 있는 겁니다.

 

이걸 제가 잘 아는 이유는 974부대 13년 근무 중에 무려 9년을 창성초대소에서 경비를 선 사람이 탈북해 서울에 왔기 때문입니다.

 

그가 있던 시기가 1994년부터 2003년 사이였는데, 인민들이 굶어죽는 와중에 김정일은 여기서 여자들을 끼고 방탕하게 놀았습니다.

 

이때 김정일의 팔짱을 끼고 다니는 김옥을 셀 수 없이 많이 봐서 그가 첩인 김옥이 본처인 줄 알았답니다. 김정은의 모친은 고용희지만, 김정일은 고용희는 원산에 박아두고 김옥과는 창성에서 놀았죠.

 

창성초대소는 10호 동까지 있었는데 중간에 센터 건물이 있고 본각은 따로 있습니다. 김정일이 센터에서 연회를 하면 가족은 들여다보지 못하게 본각에서 머물게 했다고 합니다.

 

정세가 긴장되면 김정일은 가족을 데리고 무조건 창성에 왔습니다. 유사시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도주하려고 그런 겁니다.

 

김일성이 창성에 초대소를 만든 이유가 바로 숨을 곳과 도망치기 좋은 곳을 여기로 정했기 때문입니다. 김일성이 창성에 놀려올 때마다 주변을 한번 들려본 것이 북한이 말하는 역사적 창성 방문입니다.

 

고난의 행군 시기 김정일은 이곳에서 자주 새벽 2시까지 연회를 열었습니다. 술을 마시다 김정일이 바람 쐬려 나오면 수십 명의 간부들도 따라 나오는데, 산골짜기라 김정일이 담배를 피우며, 아무개 노래 잘 하더라”, “아무개 춤 잘 추더라고 하는 말소리가 보초병들에게도 잘 들렸다고 합니다.

 

창성엔 눈도 많이 왔는데, 그럼 젊은 여성들이 특각 건물에서 우르르 나와 눈싸움을 했답니다. 보천보, 왕재산 가수도 있고 아닌 여인들도 있었는데 모두 미모가 뛰어났다고 합니다.

 

가끔 김정일도 여인들과 함께 마당에 같이 나와 눈싸움도 하며 놀기도 했는데, 이럴 때는 경비병들을 철수시킵니다. 그래도장군님, 장군님하며 아양을 떠는 여인들의 목소리는 보초 서는 곳까지 잘 들렸다고 합니다.

 

김정일 특각마다 5과로 뽑힌 여성 관리원들도 많이 있었는데, 이들 역시 미모가 출중한 젊은 여성들이었습니다. 여성 관리원은 5년만 근무하면 대위 계급을 주었는데, 이들 중 김정일의 눈에 든 여성은 관리원을 그만두고 기쁨조로 옮겨갑니다.

 

여름이면 수풍호에 수상스키를 띄워놓고 노는데, 김정은이 수상스키로 외국인을 이겼다는 위대성 선전 내용이 바로 이곳에서 벌어진 일일 겁니다.

 

창성 특각에서 1년 넘게 머무는 외국인들도 있었는데, 이들에겐 5과에서 선발해 붙여준 미모의 젊은 북한 여성이 있었다고 합니다.

 

인민이 고난의 행군으로 굶어 죽어갈 때 김정일은 이렇게 놀았습니다. 그리곤 말로는 쪽잠에 줴기밥타령을 하는 겁니다.

 

김정은도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도 계속 삼지연에만 가서 건설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것도 백두산 초대소에 놀려갔다가 심심하면 한번씩 나와 참견하는 겁니다. 이러고 늘 인민을 위한 여정이라고 거짓말을 합니다.

 

여러분, 이번에 김정은이 제시한 과제는 62년 전 창성연석회의 때의 과제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10년 안에 지방의 특수성을 반영한 공장 200개를 세우겠다는 것도 김일성이 62년 전에 했던 말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공장들이 10년 안에 건설될 지는 모르겠지만, 된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10년 과제의 최대 목적은 여러분들을 10년 속이기 위한 데 있기 때문입니다. 10년 지나서 속았다고 해봐야 소용없습니다. 그때는 또 다른 과제를 내걸겠죠.

 

80년을 변하지 않는 이런 수법에 여러분들이 더 이상 속지 않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 이 칼럼 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에디터 이현주, 웹편집 김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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