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전화를 받지 않는 것이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일이 바빠 전화를 받지 못하려니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30분쯤 지나, 아들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겨우 차를 운전해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했는데 너무 아파 집으로 올라올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정신없이 주차장으로 달려갔습니다. 차 안에서 얼굴이 벌게져서 와들와들 떠는 아들을 부축해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급한 대로 집에 있던 진통제와 해독제를 더운 물에 타서 먹였고 찬물 찜질도 해줬지만, 열은 40도에서 좀처럼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병원으로 가야 할 것 같아서 119에 전화를 했습니다. 남쪽에선 불이 나거나 도둑을 들었거나 병원에 급하게 호송해야 하는 환자가 생겼을 경우, 전화로 119를 누르면 항시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일단, 전화를 해서 구급차를 보내달라고 하자 5분도 안 돼 차가 도착해 아들을 싣고 목동에 있는 대학 병원으로 갔습니다. 구급실에 들어가자마자 의사와 간호사가 아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주사를 놓고 링거를 꽂았습니다. 열이 내려 잠깐 잠이 든 아들 곁에 앉아 저도 한숨 돌렸습니다.
저는 이상하게 병원에 오면 고향에 있을 때 생각이 많이 납니다. 평양에도 적십자 병원이나 김만유 병원, 평양 산원에 구급차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름 사정으로 구급차 한번 신세 지기가 하늘의 별 따기고, 구급차를 요구할 수 있는 연락 체계도 없답니다.
고향에서도 오늘처럼 아들이 많이 아픈 적이 있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쑤어 먹인 독물 죽에 아들은 온몸이 퉁퉁 부었습니다. 야밤에 죽어가는 아들을 등에 업고 구역 병원으로 달렸는데, 병원에선 의뢰서를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또 구역 병원에서 피부성 병원으로 후송돼 가면서도 구급차가 없어 잔등에 얘를 업고 버스를 타고 가야 했습니다. 우리 아들은 다행히 살았지만 병원에서 병원으로, 집에서 병원으로 오고 가고 하는 길거리에서 숨을 거두는 사람이 수없이 많습니다.
갑자기 장이 꼬여 병원으로 갔을 때 일입니다. 배가 아파 데굴데굴 구르는 저에게 진료소 담당 의사는 의뢰서 한 장 달랑 떼여 손에 쥐여 줬습니다. 남편이 저를 등에 업고 큰길로 나와 지나가는 차를 세워 구역 병원으로 좀 실어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어떤 고마운 사람이었는지 당시 저를 구역 병원까지 실어다 주었지만 저는 운이 좋은 경우였습니다. 웬만한 사람들은 차조차 세워 주지를 않았습니다. 구역 병원에서도 그저 췌장염이라는 진단을 내리고 수술할 때 맞는 마취제를 한 대 겨우 놓아 주고는 시장에 가서 페니실린과 마이신을 비롯한 항생제를 구해 먹으라는 처방을 내려줄 뿐이었습니다.
딸애가 발잔등에 고름이 생겼을 때는 안전부 병원에 아는 사람의 병력서를 가지고 치료를 받기도 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고향 사람이 겪었던, 또 겪는 일입니다.
일요일 아침, 좀 나아졌는지 아들은 집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며칠만이라도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으라는 엄마의 말에도 아들은 집에 가서도 얼마든지 치료를 받을 수 있다며 고집을 피웠습니다.
아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선 고향에 있는 시아주버니 생각이 났습니다. 시아주버니는 젊은 청춘 시절 군에서 달리던 차에서 뛰어내리고 달리는 차를 잡아타는 훈련 중에 허리를 다쳐 1989년 봄에 척수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평양에서는 이름난 적십자 병원에서 척추 수술을 받았는데, 수술이 잘못 됐는지 하반신 불구가 됐습니다. 시아주버니도 이곳에 올 수 있다면 병을 고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디 이런 사람이 시아주버니뿐 이겠습니까? 큰 병원에 한번 가보고 싶은 소원을 실현해 보지 못하고 숨을 거두는 지방 사람들. 너무도 열악한 환경 속에서 돈이 없어 약 한 첩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사랑하는 가족을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야만 하는 내 고향의 주민들. 병원에서 오는 길, 아파서 수축해진 아들의 얼굴 위로 그 사람들의 얼굴이 겹쳐집니다.
서울에서 김춘애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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