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생각 평양생각] 고향에서 온 전화
김춘애∙ 탈북 방송인
2009.10.14
2009.10.14
추석이 지나면서 낮 기온도 많이 선선해졌습니다.
요즘은 가을 바람이 선들선들 불어와 볼에 닿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쓸쓸한 마음이 듭니다.
여느 날보다 조금 일찍 퇴근한 저는 쓸쓸한 마음을 달래 보려고
집안 가구 배치를 바꾸기로 했습니다. 혼자 땀을 흘리며 가구들을 옮기고 있는데
손전화기가 울렸습니다. 저는 손 전화기 벨 소리를 김용임의 노래 ‘내 사랑 그대여’로
바꿔 놓아서 전화가 올 때마다 노래를 듣습니다. 마음도 울적한 터라 한동안 그 노래를
흥얼흥얼 따라 부르다가 전화를 받았습니다. 기다리는 고향에서 오는 전화였습니다.
이런 저런 말로 서로의 안부를 묻다가 동생은 남한에서는 골동품을 많이 팔고 사는 곳이 있다는데 사실이냐고 뜬금없이 물었습니다. 저는 의아한 생각에 있기는 있지만 왜 묻느냐고 반문했습니다.
동생이 작은 도자기를 하나 갖고 있는데 그것을 팔아 볼까 하고 생각 중이라고 했습니다. 순간 저는 온몸이 감전된 것처럼 뭔가 몸에 흐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미 중국 국경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중국을 통해서 골동품 장사를 했습니다. 지난 날 한 때는 동생들도 골동품 장사로 큰돈도 벌기도 했지만, 국가 안전부에 걸려 법적 제제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저 역시 13차 청년 축전인 1989년에 평양에서 골동품을 만져 본 적이 있었습니다. 일본 돈과 청자기와 금강석분말과 금강석을 직접 만지기도 했고, 골동품을 중개하기 위해서 허황되게 뛰어보기도 했습니다. 손에 큰돈은 쥐어 보지 못했지만, 돈 몇 푼은 벌어봤습니다. 당시에 일본 돈인 엔화 3장을 손에 만져 본다는 것은 큰돈이었습니다. 또 국가에서 승인된 인민무력부 외화벌이 하는 사람들과 손을 잡고 하는 일이라 저는 법에 어긋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13차가 끝나고 총화사업이 끝나자 각 부분마다 비사회주의 그루빠들이 닥쳐 검열 사업이 시작됐습니다. 북한에서는 귀중품을 넣고 다니는 고급 가방으로 통하는 ‘묘향산 트렁크’를 가지고 다니던 제 위에 있던 사람이 당시 검열에 걸렸습니다. 너무 많은 돈을 탕진한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평양시의 선교구역과 사동구역 인접인 장진다리 동둑에서 공개 처형되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고 저는 너무 충격을 받아 그만 많은 인파 속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쓰러졌습니다.
그 때부터 저는 아무리 국가에서 승인된 외화벌이 기업소에 다닌다는 사람들이라도 해도 그 사람들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운명이라고 생각했고 비록 한 때는 잘살고 있지만 항상 사자 밥을 지고 산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동생이 고향에서 이곳 남한 사람들을 상대로 직접 골동품을 가지고 외화벌이를 하겠다는 제안을 받았으니 제가 얼마나 놀랬겠습니까? 저는 동생에게 그 자리에서 안된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누나인 제가 조금만 다리를 놓아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동생은 포기하지 않고 저를 설득했습니다. 동생은 다시 한 번 제게 부탁했고 저는 다시 생각해 보고 결정하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저는 집안 정리를 하다 말고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제가 중국에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소개해 줄 수도 있고 중국을 통해서 이곳 사람들과 연계를 해 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잘못돼 동생들이 위험에 처하면 그 때가서 제가 아무리 후회해도 때늦은 법이기에 이건 아니라고 결론을 냈습니다.
한참 동안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들이 퇴근해서 돌아왔습니다. 엉망이 된 집안을 보고 눈을 크게 뜨고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는 아들에게 전화 받은 내용을 얘기해줬습니다. 아들은 삼촌이 미련을 갖지 않도록 안되는 것은 똑똑하게 안된다고 말해 주라고 했습니다.
남한은 해마다 쌀이 남아돌고 있는데 내 동생을 비롯한 북한 주민들은 먹고 살기 힘들다 보니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돈 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하려고 하는 현실에 화가 납니다.
이런 저런 말로 서로의 안부를 묻다가 동생은 남한에서는 골동품을 많이 팔고 사는 곳이 있다는데 사실이냐고 뜬금없이 물었습니다. 저는 의아한 생각에 있기는 있지만 왜 묻느냐고 반문했습니다.
동생이 작은 도자기를 하나 갖고 있는데 그것을 팔아 볼까 하고 생각 중이라고 했습니다. 순간 저는 온몸이 감전된 것처럼 뭔가 몸에 흐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미 중국 국경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중국을 통해서 골동품 장사를 했습니다. 지난 날 한 때는 동생들도 골동품 장사로 큰돈도 벌기도 했지만, 국가 안전부에 걸려 법적 제제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저 역시 13차 청년 축전인 1989년에 평양에서 골동품을 만져 본 적이 있었습니다. 일본 돈과 청자기와 금강석분말과 금강석을 직접 만지기도 했고, 골동품을 중개하기 위해서 허황되게 뛰어보기도 했습니다. 손에 큰돈은 쥐어 보지 못했지만, 돈 몇 푼은 벌어봤습니다. 당시에 일본 돈인 엔화 3장을 손에 만져 본다는 것은 큰돈이었습니다. 또 국가에서 승인된 인민무력부 외화벌이 하는 사람들과 손을 잡고 하는 일이라 저는 법에 어긋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13차가 끝나고 총화사업이 끝나자 각 부분마다 비사회주의 그루빠들이 닥쳐 검열 사업이 시작됐습니다. 북한에서는 귀중품을 넣고 다니는 고급 가방으로 통하는 ‘묘향산 트렁크’를 가지고 다니던 제 위에 있던 사람이 당시 검열에 걸렸습니다. 너무 많은 돈을 탕진한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평양시의 선교구역과 사동구역 인접인 장진다리 동둑에서 공개 처형되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고 저는 너무 충격을 받아 그만 많은 인파 속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쓰러졌습니다.
그 때부터 저는 아무리 국가에서 승인된 외화벌이 기업소에 다닌다는 사람들이라도 해도 그 사람들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운명이라고 생각했고 비록 한 때는 잘살고 있지만 항상 사자 밥을 지고 산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동생이 고향에서 이곳 남한 사람들을 상대로 직접 골동품을 가지고 외화벌이를 하겠다는 제안을 받았으니 제가 얼마나 놀랬겠습니까? 저는 동생에게 그 자리에서 안된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누나인 제가 조금만 다리를 놓아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동생은 포기하지 않고 저를 설득했습니다. 동생은 다시 한 번 제게 부탁했고 저는 다시 생각해 보고 결정하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저는 집안 정리를 하다 말고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제가 중국에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소개해 줄 수도 있고 중국을 통해서 이곳 사람들과 연계를 해 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잘못돼 동생들이 위험에 처하면 그 때가서 제가 아무리 후회해도 때늦은 법이기에 이건 아니라고 결론을 냈습니다.
한참 동안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들이 퇴근해서 돌아왔습니다. 엉망이 된 집안을 보고 눈을 크게 뜨고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는 아들에게 전화 받은 내용을 얘기해줬습니다. 아들은 삼촌이 미련을 갖지 않도록 안되는 것은 똑똑하게 안된다고 말해 주라고 했습니다.
남한은 해마다 쌀이 남아돌고 있는데 내 동생을 비롯한 북한 주민들은 먹고 살기 힘들다 보니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돈 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하려고 하는 현실에 화가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