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자의 실체: 김부자 가계의 우상화 1


2007.05.14

매주 보내 드리는 주간 기획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실체’시간입니다. 북한에서 김일성.김정일 부자는 오랜 우상화 정책을 통해 마치 중세시대 왕처럼 신격화 됐습니다. 그들의 출생은 물론 가족 관계, 이들의 사생활은 철저히 비밀에 가려져 있습니다. 또한 이들의 권력 장악 과정도 북한에서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실정입니다. 오늘은 김일성 김정일 가계의 우상화에 대한 얘기를 드리겠습니다.

북한은 김일성 김정일을 신격화하기 위해 그들 집안사람들까지 모두 국가적으로 위대한 인물이라고 선전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현대 역사까지 왜곡해서 이들의 정통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김일성 가계의 우상화 작업은 김일성의 증조부 김응우 부터 시작됩니다. 북한 당국은 김일성의 증조부 김응우가 조선조 말기의 대원군 시절에 발생한 미국 상선 제너럴 셔어먼호 사건을 주도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셔어먼호 사건은 1866년 대동강 구역에 들어와 통상을 요구하며 횡포를 부리던 미국 선박 셔어먼호를 평양 주민들이 불태워 버린 사건입니다. 물론 김응우가 당시 평양에서 농사를 지으면 살기는 했지만 그가 실제 셔먼호 공격을 주도했는지는 사료에서 전혀 증명되지 않는 주장입니다.

북한은 또 김일성의 조부 김보현에 대해서 일제 침략자들과 지주들을 반대하여 싸웠던 항일운동의 선봉장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1994년 김보현의 이름을 기리기 위해 농업간부재교육대학을 '김보현 대학'이라고 개칭했습니다. 실제 김보현은 평양시 만경대에서 평생을 농사를 짓고 살다가 1955년 84세의 나이로 사망한 전형적인 촌로였습니다. 그가 평양에서 항일 운동의 선봉장이었다는 사실 역시 어느 역사 자료에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에 대한 우상화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 시피 북한에서 김형직은 항일독립투사이며 열렬한 애국자로 떠받들어지고 있습니다. 북한측 주장에 따르면 김형직은 1917년 항일독립운동단체인 조선국민회를 결성했고, 조선국민회 활동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뒤 만주로 가 독립운동을 계속했습니다.

김형직의 가장 큰 업적은 평양에서 3.1 봉기 투쟁을 일으킨 것입니다. 남한에서는 3.1운동이라고 부르는데요, 북한은 1919년 3월 1일 일제에 항거해 온 나라 국민이 일어난 3.1 운동이 평양 숭덕여학교에서 학생대표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면서 시작되었으며, 김형직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과 인민들이 주동이 되어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 7살 어린이에 지나지 않은 김일성도 3.1운동에 참가했다는 것입니다.

이와관련해 김형직 사범대학 역사학과 출신 탈북자 박광일씨는 북한에서 비공개로 보관하고 있는 역사 기록에 보면, 김형직이 독립운동에 약간 참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3.1운동을 주도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박광일: 김정일이가 자기 가계의 정통성을 위해서 3.1 만세 운동을 김형직이가 주도를 했다고 그렇게 교육을 해요. 북한에서 역사 자료가 가장 많은 곳인 인민대학서당에서 자료를 뒤져 보니까 김형직이는 그때 평양에 숭실 학교를 다녔는데 그냥 학생이었지 주도적인 역할은 아니였습니다.

한편, 남한에서 3.1운동은 민족대표 33인이 서울 종로 탑골 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것을 시작으로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된 범민족 항일 독립운동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남한 사료에서는 3.1 운동을 주도했던 역사적 인물 가운데 김형직이란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워싱턴-이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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