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자실체: 제자리 걸음 걸어 온 남북대화


2007.10.08

워싱턴-이수경 lees@rfa.org

그 동안 남북회담은 양측의 정치적 상황 변수에 따라 중단과 재개를 반복하며 제 자리 걸음을 해 왔습니다. 지나간 남북회담은 어땠었는지 이수경 기자가 정리해 드립니다.

6.25 전쟁 이후 단절됐던 남북한 대화의 문을 처음 연 것은 고 김일성 주석과 박정희 전 대통령시절. 1972년 합의된 '7.4 남북 공동성명'이었습니다. '7.4 남북 공동성명'은 당시 남측의 이후락 중앙정부부장과 북측의 박성철 북한 제2부수상이 평양과 서울을 비밀리에 오가며 접촉한 결과였습니다. 양측은 이 성명을 통해 통일원칙에 합의하고 이산가족 상봉 등 여러 방면에서 교류를 확대하기로 했습니다.

이후락: "중앙 정보부장 이후락입니다. 실은 제가 지난 5월 초 박 대통령 각하의 뜻을 받들어 평양에 갔다 왔습니다. 통일은 외세의 간섭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한다. 둘째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존하지 않고."

하지만 불과 석 달 후 남한에서는 유신이 단행되었고 북한에서도 주석제가 채택되었습니다. 이어 남한에서 김대중 납치 사건이 터지면서 북한은 이를 빌미로 1973년 8월 일방적으로 대화를 중단했습니다. 이후 1974년 조총련 문세광이 박정희 전 대통령 암살하려다 영부인 육영수 여사를 사살한 사건과 1976년 판문점에서 일어난 도끼 만행 사건이 연이어 터지면서 남북 관계는 다시 얼어붙었습니다. 아무런 후속 조치가 뒤따르지 않았던 '7.4 남북 공동성명'은 휴지 조각이 되고 만 것입니다. 세종연구소 정성장 연구위원의 말입니다.

정성장: 7.4 공동 성명은 남북한 최초의 합의 문건이라는 점에서 강조를 했었지만 너무 추상적이기 때문에 해석도 다르고 지금은 강조되고 있지 않습니다. 남북간의 합의가 구속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이행의지가 중요합니다.

남북간의 냉랭한 기운이 다시 녹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들어서입니다. 북방외교를 펼쳤던 노태우 전 대통령 시절, 8차례의 남북고위급 회담을 통해 1992년 9월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했습니다. 이 합의서에서 남북은 정치, 군사, 교류 협력을 확대하기로 하고, 핵 없는 한반도를 만들자는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도 발표했습니다. 당시 남한 정원식 전 총리의 기자회견입니다.

정원식: 북남 사이에 화해와 불가침 협력 교류에 대한 합의서가 최종 타결되고 서명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1993년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을 탈퇴한다고 선언하면서 무용지물이 되었습니다. 북한의 핵 위기로 전쟁 직전까지 간 상황에서 1994년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평양 방문이 이뤄졌습니다. 카터 전 대통령은 김일성 주석과의 두 차례 회담을 통해 핵동결 조치를 취하도록 설득했습니다. 이와 함께 남북정상회담 개최 약속도 받아 냈습니다. 그러나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면서 남북정상회담도 불발되고 맙니다.

김일성 주석은 사망했지만 미국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 포용 정책은 계속됐습니다. 1996년 4월 남한의 김영삼 전 대통령과 미국 클린턴 전 대통령은 제주도에서 열린 정상 회담에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기 위한 한반도 평화 체제 정착을 합의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6.25 전쟁 당사자인 남한과 북한, 전쟁 참여자인 미국과 중국이 함께하는 4자회담을 북측에 제의했습니다. 그러나 1997년부터 1999년까지 6차례에 걸쳐 열린 4자회담은 결국 평화체제 수립과 주한미군 문제에 관해 남북한의 이견으로 실제적인 성과 없이 끝났습니다.

김 대중 정부가 들어선 2000년대는 활발한 남북 회담이 진행됐습니다. 2000년 6월 13일부터 15일까지 평양에서 첫 번째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졌고 남북은 '6.15공동선언'을 통해 통일문제, 이산가족 교류, 경제협력, 그리고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 답방을 합의했습니다.

김정일: 과거 중국도 가고 인도네시아도 가고 외국도 비공개로 갔는데 나보고 은둔 생활을 한데, 김대중 대통령의 오셔서 나는 이제 은둔에서 해방됐다.

서울 평양 예술단 교환 방문과 이산가족 상봉도 이뤄졌고, 남북 철도 도로 연결 공사가 진행 되는 등 화해 분위기가 무르익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2002년 2차 북한 핵 위기로 남북 정세는 달라졌습니다. 북한 방문을 마친 미국 잭 프리처드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는 북한이 농축 우라늄 핵 개발을 시인하는 발언을 했다고 밝혔습니다. 이렇게 불거진 2차 북핵 위기는 '6.15 공동선언'을 실천하는데 있어서 내내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2007년 10월 2일부터 4일까지 평양에서 열린 2차 남북 정상회담.

백종현 청와대 안보실장: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 번영을 위한 선언 대한민국 노무현 대통령과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합의에 따라 평양을 방문했다.

김정일 위원장과 노무현 대통령이 합의한 '10.4 공동선언'이 이번에는 실질적인 실행으로 이어지게 될 지 주목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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