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보는 한반도 역사] ⑧안중근에 대한 남북의 평가

워싱턴-이규상 leek@rfa.org
2010.03.31
지난 3월 26일은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일본의 이등방문을 사살한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지 10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안중근 의사는 오늘날 까지도 남과 북에서 존경받는 민족 운동가로 평가받고 있지만 북한은 안중근 의사의 업적마저도 김일성 체재를 선전하는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바로 보는 한반도 역사. 오늘은 안중근 의사에 대한 남과 북의 시각을 살펴봅니다.

북한에서는 지난 70년대 말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라는 영화를 만들어 보급하고 또 2005년에는 안중근 의사의 친필이 들어간 기념주화까지 만들어 유통하면서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북한은 안중근 의사를 이렇게 애국자로 평가하면서도 그를 김일성과 같은 위대한 지도자를 만나지 못해 뜻을 이루지 못한 안타까운 인물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공부에 대한 관심보다는 사냥을 즐기며 장부로서 세상에 이름을 떨칠 뜻을 세웠는데 도산 안창호 선생의 연설을 듣고 문명개화와 국권회복의 필요성에 눈을 뜨게 되고 독립운동에 가담하게 됐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라며 조선침략의 원흉인 이등박문을 처단하기로 결정하고 만주를 순찰하러 나온 이등방문을 사살하는데 성공 했습니다.

오늘날 후손들은 안중근 의사를 독립투사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안중근 의사는 교육자이기도 했고 종교인이기도 했고 또 군인이자 사상가이기도 했습니다. 안중근 의사 기념 사업회의 윤원일 사무총장은 안중근 의사를 이렇게 평가합니다.

윤원일: 어릴 때부터 안 의사는 의협심이 강한 분이셨다. 누가 핍박받거나 억압을 받거나 권력으로 가난한 사람을 억압하면 쫓아가서 항의하고...

안중근 의사는 또 많은 교육을 받은 지식인이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안 의사가 직접 쓴 자서전을 보면 그의 교육배경을 알 수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유교적인 가정에서 태어나서 전통적인 교육을 받으며 논어나 맹자와 사서삼경을 공부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자서전을 보면 사서삼경에서 나왔던 내용을 많이 응용해서 썼는데 이 책들을 통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또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안 의사의 신앙은 그의 사상을 세우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윤원일 사무총장은 말합니다.

윤원일: 종교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 배경이 있다. 만인평등과 같은 신앙적 배경과 유교적인 가풍에 따른 우리의 전통 그리고 자기 나름대로의 평화사상을 융화시켜 어떻게 하면 동아시아 공동체를 만들어 평화를 정착 시킬 수 있는 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20세기 초였던 당시 안중근 의사는 ‘동양평화론’을 제안했습니다. 현대 역사학자들은 ‘동양평화론’이 최근 나오고 있는 동아시아 통합 논의에도 유효 할 정도로 현대적이라는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윤원일: 그 당시에는 아시아가 한국 중국 일본이었다. 지금은 동남아시아를 포함한 20여 개 국이지만... 안 의사는 동양평화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또 공존하는 방범이 무엇인가 하는 고민을 했다. 여기에 안중근 의사는 중국 쪽이 가지고 있던 생각이나 일본이 가지고 있던 타라 론을 중심으로 하는 대동아 공영권과는 아주 다른 방법으로 동양평화를 주창했다. 서로 공존하고 침략하지 않는 대안을 제시했다. 그 몇 가지 방법으로 은행을 공동으로 만들고 군대를 공동운영하고 교육기관을 같이 하는 등의 제안을 했다.

당시 안중근 의사는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이 군사 안보적 협력을 이루고 각 나라 젊은이들에게 2개 국어 이상의 어학을 배우게 해 서로 연대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자고 제안한 것입니다. 이러한 형태의 내부적 연대는 20세기 후반 유럽연합이 추구하는 통합구상과 유사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1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안중근 의사를 단순히 무력투쟁을 통해 항일 운동을 한 인물로 평가하고 있는데 이것은 안중근 의사의 업적을 평가 절하하는 것이라고 역사학자들은 지적합니다.

안중근 의사가 후손들에게 이러한 평가를 받게 된 배경에는 당시 동아시아에서 세력을 쥐고 있던 일본이 안중근 의사가 영웅화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안중근 의사에 대한 기록을 모두 폐기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해방이후 안중근 의사에 대한 모든 연구는 중국이나 러시아가 가지고 있는 자료에 바탕을 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국 외국어 대학교 이병조 교수의 말입니다.

이병조: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와 일본의 관계 그리고 일본의 눈치를 보면서 러시아 중앙정부가 취했던 한인 정책 이런 부분과 연결해 볼 수 있다. 안중근 의사의 거사가 있었던 당시 러시아의 극동지역 최고 책임자는 운테르베르게르 라는 인물이었는데 그는 특히 한인사회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은 안중근 의사가 죽어서라도 영웅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안 의사의 무덤에 대한 기록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남과 북은 몇 년 전 장관급 회담에서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공동 발굴하자는 협의를 했지만 실제로 남북의 협력이 이뤄지지는 않았습니다. 아직까지 안중근 의사가 어디에 묻혔는지에 대한 확신한 자료는 나오지 않고 있어서 앞으로도 유해 발굴을 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을 있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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