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한국인] 원로 방송인 강석희 씨의 삶의 역정 ① 젊은 꿈은 희망을 낳는다

워싱턴-이현기 leeh@rfa.org
2011.12.16
kangsukhee-305.jpg 강석희 씨가 서재에서 지난 날을 회고하고 있다.
사진 제공: 강석희
한국 전쟁 당시 전투수행 중 부상당해 전역한 후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명예 표창장을 받은 재미동포가 있다. 그의 이름은 강석희 씨다. 그는 625 전쟁 혼란기에 서울 유엔방송의 라디오 방송요원으로 활동했는가 하면 1970년 미국 뉴욕에 이민 와 미국 ABC 방송에 근무하면서 월남전,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과 전두환 대통령을 시해하려고 북한이 저지른 버마 아웅산 폭파사건 같은 굵직굵직한 뉴스를 담당했다. 그리고 1988년에는 미국 NBC 방송에 채용되어 1988년 하계 서울 올림픽의 마라톤과 체조경기를 전 세계 수십 억 시청자에게 전했다.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다.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원로 방송인 강석희 씨의 삶의 역정 1부 ‘젊은 꿈은 희망을 낳는다.’를 함께 한다.

강석희 씨가 태어난 것은 일제 강점기 때다. 그는 아주 불행한 시기에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강석희: 1941년에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해 전운이 짙어져서 한국 국민이 강제 노동에 동원되고 징병 되어서 군대에 끌려가고 또 젊은 여자들이 정신대로 끌려가서 비극을 겪었습니다. 그때 우리도 어린 나이이지만, 피마자기름을 만들기 위해서 강제 동원되어 노역하는 등 그러한 전쟁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죠. 이제 일본이 패망하면서 해방을 맞게 되지요. 그 당시만 해도 우리는 일본 이름으로 창시해서 반은 일본사람이 되어서 일본 문화를 배워야 하는 어려움을 겪다가 또 해방되니까 우리 조국에 또 회오리 바람이 불었어요. 상해에서 돌아온 분들, 해외에서 돌아온 분들이 좌 우익으로 갈려서 사회 혼란기의 틈바구니에서 우리가 자라났거든요.

강석희 씨가 625전쟁에 참전한 이야기다.

강석희: 참 우리는 격동시기에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을 보내면서 그다음에 625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어요.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결국 전쟁에 말려든 사람들이 대부분 17살부터 22살 23살 대부분 어린 나이에 남북이 대치되어서 서로 죽이는 그런 아주 비참한, 유사 이래에 있어서는 안 될 동족상잔의 비극을 맞이하게 되지요. 그러니까 전쟁에 나가 죽은 시체를 보면 다 우리와 똑같은 나이 또래 16살 17살, 18살로 그 당시에는 남북이 다 총대만 한 키가 되면은 길에서도 잡아들였으니까요. 양쪽에서 다 이렇게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됐는데...

강석희 씨는 젊은 시절의 자신이 겪은 전쟁의 참상과 젊은 전우를 잃은 일로 항상 가슴 아프다고 증언한다.

강석희: 이 전쟁을 일으킨 장 본인이 김일성이거든요. 결국, 김일성이 전쟁을 일으켜서 그야말로 남침함으로 해서 전쟁에 말려들었지요. 저도 제1사단 수색대에 편입되어 전쟁에 참가하다가 1951년인가 중공군, 소위 인민 지원군이라고 해서 전쟁에 참가했는데, 그들 자체도 어린 사람들, 젊은 사람들이예요. 대치되어서 전투를 벌이다가 결국은 수류탄 공격을 받아 눈 하나를 실명했잖아요. 미국에 와서 이식 수술을 받아서 시력 반은 찾았어요. 그렇지만 그렇게 힘들게 정말 왜 태어났나! 그럴 정도로 그야말로 젊은 나이에 전쟁에 휘말려서, 같이 나갔던 전우들, 학생들이 대부분 다 돌아오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하는 그런 비극을 당했지요.

강석희 씨가 한국전쟁에 참가해 중상을 입은 이야기는 가슴 아프다.

강석희: 백병전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중공군이 인해전술, 즉 중공군이 물밀 듯이 밀고 오니까? 미군들의 화력이라는 것은 아주 가공할 만했어요. 그러나 중공군이 인명을 중요시하지 않고 사람을 바닷물같이 밀어붙였고, 미군의 155밀리 곡사포에 맞아서 산야가 시체로 덮었어요. 우리도 중공군하고 근접으로 사력을 다해(고지를 뺏어야 하니까) 싸우다가 수류탄이 앞에서 터져서 다 중상을 입었지요.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의 감사장하고 대통령 기장을 받았지요. 그다음에 부상당한 사람들은 대부분 상이기장을 받지요. 그래서 특별상의 군으로 결국 1951년 10월에 전역을 하게 됐지요.

강석희 씨는 전쟁 중에 서울에 있던 유엔방송의 라디오 방송요원으로 사회 첫발을 내 딛는다.

강석희: 제대하니까 그때만 해도 대한민국이 가난하고 일어서지 못하고 제자리걸음도 못할 때 전쟁이 일어나서 소위 자원이 없잖습니까 그러니까 상의 군인들이 사회에 나와도 먹을 게 없어서 정영원이라는 곳에서 수용했지만, 콩나물 국이나 근대국을 먹고 연명했거든요. 그래서 자급자족하는 뜻에서 미군들의 지원을 받기 위해서 접촉을 시작했어요. 접촉을 시작하다 보니까 그나마 그래도 저는 중학교 옛날에는 6년제 소위 중등학교 고등학교 분리되지 않고 6년을 공부했는데 6년을 마쳤기 때문에 영어 의사 소통할 수 있어서 미국 사람들과 접촉하는 가운데 유엔방송에 소속되어서 전선에 나가서 확성기 방송도 하지만, 방송했습니다. 방송은 오키나와에서도 하고 한국에서는 이태원의 논바닥에 안테나를 높이 세우고서 대북방송을 했고, 한편에는 잡지를 발간했습니다. 자유의 벗이라는 잡지와 농민의 벗이라는 잡지를 발간해 북한에 있는 인민군들은 투항하면 생명과 안전을 보장해 주겠다는 내용으로 잡지와 24시간 방송도 했지요.

유엔 방송에서 함께 일하던 분들이 지금도 기억난단다.

강석희
: 방송국에서 일할 때 기억나는 아나운서는 장리욱 씨, 고명한 분들이 많이 계셨는데 북한에서 내려오신 강창선 아나운서라든가, 양형문 아나운서 그 외 많은 분들이 애쓰면서 열심히 일들을 했지요.

목소리가 지금도 좋은데 언제부터 이런 좋은 목소리를 가졌는지 물었다.

강석희: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고요. 또 지금 나이가 내년이면 80살인데 아직도 목소리는 생생합니다. 타고난 것이겠지요.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원로 방송인 강석희 씨의 삶의 역정 1부 ‘젊은 꿈은 희망을 낳는다.’를 함께했다. 다음 시간에는 미국 ABC방송에서 활동한 이야기로 함께한다. 지금까지 세계의 한국인 기획,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댓글 달기

아래 양식으로 댓글을 작성해 주십시오. Comments are moder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