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한국인] 노르웨이 라면 왕 이철호씨 ② "라면하면 '미스터 리(Mr. Lee)'를 찾으세요"

워싱턴-이현기 leeh@rfa.org
2010.01.29
lee_chulho-305.jpg 이철호 씨가 노르웨이의 한 식품점에 진열된 Mr. Lee 상표의 라면을 보고 기뻐하고 있다.
사진제공-이철호 씨
노르웨이에서 라면을 먹고 싶다면 ‘미스터 리(Mr. Lee)’를 찾으세요. 노르웨이 라면계 전설 이철호 씨는 ‘미스터 리’가 노르웨이에서는 라면을 뜻하는 고유명사라고 자랑스러워한다. 그가 만든 라면 브랜드 ‘미스터 리’가 무려 20년 이상 노르웨이 라면 시장 점유율 80% 이상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그는 노르웨이에서 ‘라면 왕’으로 불리며 총리보다 더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자유아시아방송(RFA)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노르웨이에 라면을 보급하는 일과 노르웨이에 해산물 대학교를 추진하는 이철호 씨의 인간승리 2부를 함께한다.

이철호 씨의 성공신화의 한 토막이다. 2000년 11월 초 노르웨이의 북부, 인구만 8천 명의 작은 도시 나르빅의 지방 신문에는 그 전날 있었던 학생들의 무단결석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사연인즉, 그 지역에 새롭게 문을 여는 백화점의 개업 기념 라면 시식 행사에 참석한 ‘미스터 리’를 보기 위해 일련의 학생들이 결석했다는 것이다. 이날 미스터 리 라면을 맛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줄을 섰고 사인을 받는 진풍경이 펼쳐진 것이다. 이것이 한국의 작은 거인 이철호 씨의 성공신화의 첫 발자취이다.

이철호 씨가 한창 잘 나가던 시기에 한국의 라면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었을까? 그가 매니저로 있던 노르웨이의 공장이 덴마크에 팔리면서 시작한다.

이철호: 굉장히 잘 됐던 공장이에요. 그게 덴마크에 팔렸어요. 저보고 덴마크로 가라는데 전 덴마크 가기 싫고 노르웨이에서 살겠다. 그래서 그 직장을 그만뒀어요.


이철호 씨는 한국의 전쟁고아에서 노르웨이에서 호텔 학을 공부한 학사요. 요리 학을 공부한 유명한 요리사로 유명세를 받는 그에게 한국 전쟁 중에 한국에 설립된 을지로 6가에 있는 스칸디나비아 클럽에 가서 일할 것을 제의받게 된다. 바로 스칸디나비아 클럽의 요리사가 1968년에 한국을 떠나게 되어 요리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한국에 가게 된 이야기를 들어보자!

이철호: 스칸디나비아 클럽이 있었는데 거기서 요리를 못 만들더라고. 다 스칸디니비아에서 가져다가 운영을 했기 때문에, 이 사람들이 다 떠나고 나니까. 한국사람들이 그런 요리를 만들 사람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래서 스칸디나비아에서 저를 불러서 한국에 6개월 보낼 테니까 (좋은 집도 주고 월급도 주고 굉장한 대우로 차도 주고 기사도 주었다고.) 그래서 6개월 동안 한국사람들을 가르쳐주고 와라! 그래서 한국에 나갔어요.

이철호 씨는 어린 시절부터 발동한 아이디어와 순발력은 어디를 가나그 진가를 발휘한다. 고향의 나라 한국에 와서 라면이라는 새로운 음식을 먹어보고 그는 결심한다. 언젠가는 이 라면을 노르웨이에도 알리겠다. 당시 한국에 있을 때의 이철호 씨의 이야기다.

이철호: 그 뒷골목(을지로 6가)에서 라면을 한번 먹게 됐어요. 라면을 먹었는데 어찌나 맛이 있는지 입에 짝짝 달라붙더라고요. 그 라면을 몇 개를 사 가지고 잘 감춰 뒀다가 내가 한번은 이 라면도 유럽에다 알리겠다. 그런 정신을 가지고 한국의 요리사들을 교육한 다음에 다시 노르웨이에 들어와서 그 라면을 매일 쳐다보고 꿈을 꿨어요. 어떻게 해야 알릴 수 있는가. 바로 그때부터 라면을 시작한 거라고.

이철호 씨가 노르웨이에는 없던 라면을 어떻게 보급했을까? 처음에는 한국에서 3박스씩 사다가 보급했는데, ‘Mr. Lee’ 라면으로 성공하기까지 그의 설명이다.

이철호: 여기저기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알려 줬어요. 그걸 알리는 데 한 3년이 걸리더라고. 3년 동안 열심히 다니면서 라면을 여기 저기 돌려주면서 먹어보라고 그랬더니 나중에 그것이 성공하더라고요. 꾸준히 내가 좋아하니까 다른 사람들도 좋아하게 만들겠다는 정신을 가지고 지금은 그 라면이 제 이름의 명사가 됐어요. 라면이라고 안 하고 Mr. Lee이라고 그런다고. Mr. Lee 라면이니까.


이철호 씨가 처음 라면을 소개하면서 힘들고 어려웠던 일은 라면을 먹어보라고 주면 ‘버리는 걸’ 보고 얼마나 안타까웠던지 그는 버린 라면을 다시 주워 먹었다고 한다. 이것이 이씨의 끈질긴 투혼과 개척정신이다.

이철호: 제가 딱딱한 과자 같은 것을 가지고 다니면서 먹어보라고 하니까 이게 벌레지 뭐 과자냐고 버리더라고요. 버린 걸 다시 주어다가 제가 먹어 버렸어요. 허 허 그 좋은 걸 버릴 수가 없어서.

이철호 씨는 한국 라면이 맵고 얼큰해 노르웨이사람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는 해결책을 찾으러 노르웨이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소스를 가지고 한국의 유명 라면회사 연구소를 방문한다. 연구진과 함께 노르웨이인 입맛을 사로잡을 수 있는 새로운 라면 수프를 개발하기 위해서이다. 소스를 개발하던 당시의 얘기다.

이철호: 한국 소스는 한국사람들이 좋아하고 중국사람들은 중국 소스를 좋아하고 그러잖아요. 노르웨이 사람들이 좋아하는 소스가 따로 있어요. 노르웨이 입맛에 맞도록 하기 위해 한국의 연구실에 자주 가서 가르쳐 줬어요. 이러 이러한 맛을 내자고 그래서 여기 노르웨이 소스를 가지고 가서 보여도 주고 거기에 비슷하게 맞춰 가지고 왔어요. 그래 지금도 자주 한국에 나가요. 소스 개발하러요. 그렇게 나갈 때는 노르웨이 기술자를 데리고 나가지요.

이철호 씨는 미스터 리 라면 매출 증가와 함께 그가 주력한 부분은 홍보였다. 벌어들인 수익 중 필요한 경비를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홍보에 투입했다. 그는 신문 방송 광고는 물론 한국 여행 경품까지 걸었다. 한국을 알리면 라면도 자연스럽게 알려지리라 판단한 것이다.

이철호: 처음에 한국말을 쓴 것은 제가 한국말을 못했기 때문에 말 연습하기 위해서 썼지만 쓰다 보니까 참 예쁘더라고요. 한글로 된 김치 맛, 닭고기 맛, 소고기 맛, 매운맛, 등 한국말이 참 예뻐요. 그러다 보니까 또 한국 선전도 되고 그래서 계속 제가 한국 글을 써요. 한국의 이미지를 남기기 위해서.


이철호 씨가 한국의 매운맛을 빼고 기름진 맛을 더했더니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그는 ‘처음에 한국 라면을 그대로 도입했다가 노르웨이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바꿔서 출시한 이후 매출이 급격히 늘었다.’고 회고한다. 당시에 한국에서 노르웨이로 라면을 컨테이너 단위로 주문하는 사람은 자신이 처음이었다고 이야기한다. 사업이 계속 승승장구하던 89년 어느 날 이씨는 갑자기 자신의 라면회사를 노르웨이 최대 식품회사에 넘겨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팔아치우자 주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이씨는 자신이 100살도 못살 텐데 내가 없어도 ‘미스터 리’ 라면이 영원히 지속하도록 하기 위해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이철호: 나중에 컨테이너로 주문이 들어오니까 제가 혼자서 하기가 어렵더라고요. 그런데 여기에서 제일 큰 식품회사가 찾아와 자기 회사에 달라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줘 버렸어요. 너의 회사가 하되 꼭 한국서만 가져와야 한다는 약속받고 (한국을 알리려고 하는 거지 돈 욕심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 사람들에게 맹세를 받은 것은 이 라면은 한국에서만 가져다 써야 된다고 해서 한국의 라면 공장이 좋아해요.) 한국서 포장도 하고요.

이씨에게 노르웨이에서 어떻게 해야 사업에 성공할 수 있는지를 물어봤다. 그에 대답은 간단하다 ‘정직이다’.

이철호: 노르웨이에서 사업하려면 사람이 정직해야 되요. 절대 거짓말이라는 것은 통하지 않기 때문에 (한번 먹고 실패한 사람은 다시 먹지 않아요) 의심이 많은 나라이기 때문에 항상 밝게 정직하게 일을 해 나가면 노르웨이에서 성공할 수 있어요. 절대 허풍떨지 말고 그대로 그게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이철호 씨가 성공에 이르기까지는 3시간만 자고 꿈을 이뤄나갔다고 한다. 한국인의 긍지라고 말한다.

이철호: 한국사람은 하겠다고 하면 할 수 있거든요.


이철호 씨에게 김치에 대해서 물어봤다. 손자들이 김치 아주 잘 먹는다고 말한다. 이철호:한국사람이 김치를 먹는 것은 옛날 중국사람이 아편을 하듯이 그런 ‘인’이 있나 봐요. 노르웨이 사람들도 김치 한번 먹어보면 환장해요. 내 손자들 있는데 여기 와서 김치 달라고 해요. 하하.

이철호 씨는 올해 72세의 황혼기를 달려가지만, 그는 지금도 미래를 개척해 가고 있다. 노르웨이 해산물 대학교 추진하고 있단다.

이철호: 리옹에서 요리 시합이 매년 시합이 있어요. 그런데 리옹 요리 시합에 수만 명이 요리 시합을 할 때 다 몰려요. 관광객뿐만 아니라 음식 문화를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다 모여요. 리옹에 있는 사람들이 그걸로 먹고살아요. 그런데 원료는 다 노르웨이에서 온다고요. 노르웨이 수산물 원료가 많이 들어가서 제가 몇 년을 그것 때문에 정치하는 사람들한테 화를 냈는데 왜 노르웨이 물건을 가지고 노르웨이 사람들이 만들어서 노르웨이 선전하지, 왜 프랑스를 선전해 주느냐. 그게 저의 원망이에요. 그래서 지금 노르웨이 정부에서도 조금씩 알게 됐어요. 몇 년 동안 이야기 했기 때문에 조금씩 생각을 하고 앞으로 그런 학교를 중간 노르웨이에 만들어 줄 테니까 저보다 시작할 수 있느냐고 묻더라고 그래서 제가 YES 했죠. 그래 그 전문요리학교를 노르웨이에다 만들고 싶은 마음인데 나이가 많아서 성공할지 모르겠어요. 제가 못하더라도 제 후배들을 시키겠지요.

이철호 씨가 북한 주민들과 전 세계 한국인에게 주는 통일에 대한 충언이다.

이철호: 제가 베를린 탑 무너지는 것을 봤어요. 20년 전에 무너졌던 것, 참 그걸 보고 울었다고. 한국도 한번 삼팔선이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서로 가난하면 가난한 데로 살고 잘 살면 잘사는 데로 나누어 먹고 살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제가 울었어요.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노르웨이에 라면을 보급하는 일과 노르웨이에 해산물 대학교를 추진하는 이철호 씨의 인간승리 2부를 함께했다. 지금까지 세계의 한국인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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