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살아야죠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2020-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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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남성에게 팔려와 랴오닝성에 살고 있는 북한 여성들.
중국 남성에게 팔려와 랴오닝성에 살고 있는 북한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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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상상하던 세상과 남한의 현실이 너무 달라 놀라는 탈북자들이 많습니다. 특히나 나라의 지원이 필요한 노인 복지 시설을 둘러보고는 북한에 있는 어머니가 생각났다면서 눈물을 흘린 여성이 있는데요. 오늘은 열심히 살겠다고 말하는 황해도 출신의 김성미(가명) 씨의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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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미: 자고 깨나면 수돗물이 찬물 더운물 나오고 아침부터 텔레비전 볼 수 있잖아요. 다 좋아요.

남한생활 중 아침 시간이 제일 좋다고 말하는 김 씨. 남한사람들에게는 더운물로 세수를 하고 밤새 전세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뉴스를 시청하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인데 김 씨는 그것마저도 좋다고 말합니다. 북한에서 그리고 탈북해 중국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짐작해 볼 수 있는데요. 그의 탈북은 준비되지 않은 사고였습니다.

김성미: 2004년에 중국에서 공업품을 같이 가지고 오면 자기 아는 사람이 있는데 오늘 저녁에 중국에 갔다 오는데 같이 따라 갔다 오면 북한 돈 만원을 주겠다고 하니까 갔다 오라고 해서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따라 나섰어요.

고향에는 김 씨가 행방불명으로 처리되고 이로 인해 가족이 피해를 볼 수도 있겠다는 걱정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안타까운 것은 팔려 다니는 신세로 전락하면서 자신의 건강도 지킬 수 없는 처지가 됐다는 겁니다.

김성미: 내가 팔리다 팔리다 농촌집에 거기 가니까 초갓집이더라고요. 못사는 집으로 제가 팔려온 거예요. 이 남자가 조금 부실한 사람이었어요. 약간 부족한 남자였어요. 제가 아파도 병원에 데려갈 형편도 못 되는 남자였어요. 너무나 스트레스를 받는 거예요. 자꾸 공안이 잡으러 오지 숨어 다니지 하다 보니 이도 아프고 원형탈모까지 왔어요. 아파도 병원에 가려면 신분증이 있어야 하잖아요.

당시 나이는 30대 후반이었지만 실제 몸 상태는 환갑을 바라보는 사람처럼 망가져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정말 생각하지 못했던 운명을 바꾸게 되는 일이 벌어지는 데요.

김성미: 누가 그러더라고요. 시내병원에 가면 조선족 의사가 있다고요. 그래서 그 조선족 의사를 찾아가서 저는 북한에서 왔습니다 하니까 의사가 나를 쳐다보더니 왜 여기 있습니까? 한국 가세요. 북한 사람들 한국가면 대접을 잘해주고 돈도 주고 집도 주는데 왜 아직까지 여기 살고 있는가 빨리 한국 들어 가세요. 그분이 그러는 거예요.

7년동안 아파도 병원조차 가지 못하고 숨죽이고 살아야 했는데 조선족 의사선생님의 말에 용기를 얻고 탈북할 때와 달리 이번에는 자신의 의지로 길을 떠나게 됩니다.

김성미: 가다가 잡히는 것이 무섭고 또 나 하나 죽으면 괜찮은데 형제들에게도 피해가 있으니까 결심을 못했어요. 그런데 너무 아프다 보니까 죽더라도 가야겠다고 결심을 한 거예요. 한국에 오는 것도 3년을 생각했어요. 내가 만약 잡히면 어떻게 할 것인가 마지막에 결심하고 떠날 때는 잡히면 쥐약을 먹고 죽겠다고 생각하고 쥐약을 가지고 떠났어요.

다행히 별 사고 없이 2011년 무사히 남한에 도착합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벅차 오릅니다.

김성미: 저는 울었어요. 고향이 생각나서요.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은 한국에 오니까 제일 생각 나는 것이 어머니한테 잘 대해 주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되더라고요. 한국이 이렇게 잘 먹고 잘산다는 것은 생각을 못한 거예요. 그런데 내가 한국에 와서 생활해 보니까 우선 자유가 있고 배불리 먹고요. 사람이 뭐니 뭐니 해도 배고픔만큼 고달픈 것이 없어요. 그런데 북한에서는 하루 세끼는커녕 두 끼를 먹기도 힘들었어요. 그런데 한국에 오니까 하얀 쌀밥에 고깃국을 먹는데 놀랐어요.

정착초기에는 사람이 사는데 필요한 아주 기본적인 것만 충족되면 바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저 모든 것이 감사하고 이런 세상도 있구나 싶었는데요. 북한에서부터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도 현실이 너무 다른 것에 놀랐습니다.

김성미: 처음에 와서는 농촌일 나갔어요. 해보니까 재미있더라고요. 북한하고 한국하고 너무 차이가 나는 거예요. 제가 북한에서 아무리 장사를 해도 쌀을 두 킬로를 사놓고 살아 본적이 없어요. 그런데 한국에서 그때 하루 일당이 5만원이었는데 쌀 한 마대는 살수 있더라고요. 그리고 제가 한국에 와서 제일 충격 받은 것이 주민등록증 받을 때 그때만큼 행복했던 순간이 없었던 것 같아요. 중국에서 살 때는 버스를 타도 가슴이 후들후들 떨렸는데 한국에 와서 2년만에 여권을 만들어서 중국에 갔는데 그때 여권이 얼마나 소중하고 좋은지 모르겠더라고요.

황해남도 연안에서 살다가 양강도로 시집을 갔던 김 씨. 압록강을 건너고 제3국을 경유해 지금은 남한에 살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농촌일을 3년정도 했고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고는 복지시설에서도 일했습니다. 김 씨는 좋은 것을 볼 때마다 북한에 있는 가족생각에 눈물이 터지고 맙니다.

김성미: 요양원에 가서도 진짜 많이 울었어요. 어머니 생각이 나는 거예요. 정부에서 다 돌봐주잖아요. 하루 세끼 꼬박꼬박 죽 먹을 사람은 죽을 해주고 밥 먹을 사람은 밥을 주고 거동이 불편한 사람은 먹여주고 그런데 북한에는 복지시설이 돼있지 않잖아요. 여기는 늙어도 나라에서 다 돌봐주는 구나 하는 생각에 어머니 생각이 나서 너무나도 눈물이 나는 거예요. 우리 어머니는 어떻게 돌아가셨을까 그래도 쌀밥이라도 한 숟갈 드시고 돌아가셨을까 싶은 생각에 너무 눈물이 나는 거예요.

기자: 요양보호사 일은 얼마나 하셨습니까?

김성미: 1년 했어요.

기자: 지금도 그 일을 하십니까?

김성미: 지금은 대학 다니고 있어요.

기자: 대학에서는 어떤 공부를 하시나요?

김성미: 사회복지사요. 사회복지에 대해 더 알고 싶어서 더 나이 먹기 전에 공부 해보자 해서 공부를 시작했어요.

기자: 대학공부는 할만 하십니까?

김성미: 좀 힘들어요. 외래어를 많이 쓰니까 몰라서 한국사람에게 물어보는 거예요. 그 말이 무슨 말인가 그러면 그 사람이 설명해 주는 거예요. 그러면서 차차 알아가는 거죠.

기자: 학교는 매일 가십니까?

김성미: 주말 토요일 하루 가는데 아침 9시반부터 저녁 6시까지 공부 하죠. 그리고 온라인으로 공부하고요.

남한생활 쉬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처음부터 어린 아이처럼 하나하나 배워 가자니 영 만만치 않은데요.

김성미: 그래도 이겨 내야죠. 열심히 살면 되지 않을까요? 한국에 오니까 여자들이 제일 살기 좋은 곳이 한국이라고 봐요. 북한에선 여성들이 뗄 나무도 걱정해야지 물 길어 먹어야지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런 걱정 안 하잖아요.

훗날 탈북자를 위한 요양보호시설을 만드는 것이 꿈이라고 말하는 김성미 씨. 오늘도 용기를 잃지 말자며 마음 속으로 자신에게 파이팅을 외쳐봅니다.

김성미: 더 열심히 살아야죠. 내가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는 것도 있어요. 자격증 땄다고 해서 전부 취업이 되는 거는 아니잖아요.  그래도 이겨 내야죠. 항상 그 생각해요. 북한보다는 행복하다 오직 그 생각 하고 살아요.

제 2의 고향 오늘은 탈북여성 김성미(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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