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 혜련이를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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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만날 기약 없이 헤어진 것을 두고 생이별이라고 합니다. 오늘 소해할 여성은 남한생활 6년차가 되는 탈북여성 김순희 씨입니다. 탈북 해 중국에서 헤어진 딸을 다시 만나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김 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김순희: 한국에 입국하니까 딸 생각이 더욱 간절해지더라고요. 중국에 있는 브로커를 통해 심양 쪽으로 딸을 찾아보려고 노력을 많이 했어요.

양강도 혜산 출신의 김순희 씨는 현재 남한에 함께 간 둘째 딸과 남한에서 만나 남한 남성 이렇게 세 식구가 새로운 가정을 꾸렸습니다. 이제는 식량걱정 없이 부족함 없는 생활이지만

텅 빈 마음 한구석을 채울 수 없답니다. 바로 생이별한 큰딸 때문입니다.

김순희: 2006년 12월 탈북 했고요. 너무 배고프고 힘들고 집도 다 팔아서 살기가 힘들어서 탈북 했거든요. 결심을 하고 보니 가족 셋이 모두 가면 위험하다고 맏딸이 자기가 힘들더라고 더 있다가 엄마가 동생을 데리고 먼저 가서 자리 잡고 연락하면 자기가 넘겠다고 했어요. 딸하고 한 달 뒤에 연락하기로 했었는데 한 달 반이 걸렸어요. 그러다 보니까 연락을 해보니 인신매매로 엄마가 딸을 찾는다고 다른 인신매매 범이 딸을 속여서 심양 쪽으로 넘겼더라고요. 그 이후로 연락이 끊겼거든요.

김 씨가 중국 생활을 거쳐 남한에 간 것은 지난 2009년. 남한에 간 많은 수의 탈북자가 북한에 있는 가족을 데려가기 위해 돈을 지불하고 브로커를 통하듯 김 씨도 헤어진 딸을 찾기 위해 열심히 일했습니다. 중국에 있는 사람을 움직이려면 경비가 만만치 않게 들기 때문이죠.

김순희: 아르바이트는 여러 가지로 했어요. 돈이 된다는 것은 많이 했어요. 식당일은 12시간씩 했고 봉제공장에서 옷 포장하는 일도 12시간씩 맞교대를 하면서 했어요. 남쪽은 자본주의라 자기가 움직이면 먹고 살수는 있거든요. 북한에선 아무리 일하고 등짐을 지고 다녀도 자기 앞에 차려지는 몫이 하루 죽 먹기도 힘들어요. 그래서 저는 여기 한국이 지상낙원으로 생각이 되요.

몸과 마음이 지친 상태에서 하루 12시간씩 쉬지 않고 일을 하다 보니 건강한 사람도 견디기 힘들 텐데 어땠겠습니까? 깊이 생각하지 않더라도 뻔 한 일인데요. 김순희 씨는 일터가 아닌 병원을 찾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그리고 일할 때 느끼지 못했던 남한생활에 대해 다시 놀라게 되는데요.

김순희: 처음 한국에 와서 발을 다쳐 병원에 갔는데 물리치료를 받으면서 그 치료기계를 보고 너무 놀랐어요. 이런 기계가 있구나 하고 체험하니까 그때는 정말 김일성 김정일 부럽지 않았어요.

기자: 어떤 기계를 사용했기에 그렇게 놀라셨습니까?

김순희: 발 안마 기계하고 찜질 기계 그리고 적외선 찜질기계 등 너무 환대스럽게 치료를 받았어요. 북한에서는 민간요법으로 침놓는 사람들이 발목에 침을 놓고 피를 뽑고 감자 갈아서 발목에 붙이면 그만인 줄 알았는데 남한에서 그런 물리치료를 받고 너무 상상 밖이어서 놀랐어요.

남한에는 탈북자가 모여 사는 곳엔 어김없이 그 지역 복지관이란 곳에서 이들을 위한 여러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취업을 알선하기도 일 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경제적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관계부처에 행정적 처리도 도와주고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제주도나 강원도 등 물 좋고 경치 좋은 곳으로 여행도 함께 갑니다.

하지만 김 씨는 다른 탈북자들처럼 주말이면 가족과 함께 휴식을 취하면서 여가를 즐긴다거나 이런 복지관을 찾아 자신의 시간을 투자할 생각을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은 딸을 찾은 다음으로 미루었기 때문입니다.

김순희: 저희 큰딸을 하루빨리 찾아서 14살에 헤어졌는데 지금까지 못해준 것을 이제 만나면 다 해주고 싶고 헤어질 때 밥한 그릇도 못해줬는데 하루 세끼 밥도 해주고 옷도 다른 아이들처럼 멋있는 것으로 사주고 해서 우리 같이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더 원하는 것이 없어요.

김순희씨가 올해 23살이 된 딸에게 보내는 당부의 말입니다.

김순희: 사랑하는 내 딸 혜련아 엄마는 너와 헤어진 날부터 오늘까지 어느 하루도 널 잊은 적이 없단다. 엄마는 믿는다. 사랑하는 내 딸 혜련이는 어디서 살든 굳세게 살고 있으리라 믿고 만나는 날까지 엄마가 찾을테니 기다려 다오 아프지 말고 살아다오. 혜련아 사랑한다.

딸을 생각하면 맥이 풀리고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데 그런 때마다 김 씨를 일으켜 세우는 사람은 바로 남편입니다. 남남북녀라고 북한여성과 남쪽의 남성이 만나 새로운 가정을 꾸민 것인데요. 김 씨의 남편도 비록 자신의 배로 낳은 자식은 아니지만 딸을 찾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다할 것이라고 합니다.

김순희 남편: 내가 낳은 자식은 아니지만 친자식 이상으로 생각하고 아이 생일이 1월 5일인데 그날만 되면 집사람이 슬픔에 젖어있고 아이를 추억할 때마다 옆에서 보는 저도 아이를 빨리 찾았으면 하는 바램이고. 아이가 심양이든 어디든 있다고만 한다면 당장이라도 비행기 타고 날아가서 데려오고픈 그런 심정입니다.

남한으로 간 2만 7천 여 명의 탈북자는 남쪽에서 다시 태어난 기분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이들은 목숨을 걸고 도강을 했고 살아서 남한에 갔기 때문에 제 2의 인생을 살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김순희 씨처럼 무사히 도강을 하고도 중국 땅에서 가족과 생이별하는 일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혜련 씨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을 듣고 계신다면 희망을 잃지 마시고 건강한 모습으로 꼭 엄마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딸 혜련이를 찾고 있는 탈북여성 김순희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