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겁고 보람된 남한생활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2019.04.23
defector_pusan_b 지난 2010년 부산동주대학 잔디구장에서 열린 새터민들의 체육행사 모습.
연합뉴스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많은 탈북자분들이 남한에 가서는 외로움을 많이 느낍니다. 그래서 같은 고향사람들로 구성된  친목단체를 조직해 즐거운 시간도 갖고 의미 있는 봉사활동도 함께 하는데요. 오늘은 이북도민 친목회 박신혁 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박신혁: 여기서 사니까 사는 보람이 있잖아요. 자기가 일하면 좋은 차도 사서 타고 다닐 수 있고 저축을 해서 국내 뿐만 아니라 해외여행도 마음대로 할 수 있고 정말 자유가 얼마나 넘쳐나는지 모르죠.

황해도 출신의 박 씨는 이제 남한생활이 11년째 됩니다. 매일 긍정적인 마음으로 신나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끔씩은 눈물나게 고향이 그리워 서로 아픔을 함께한 사람들끼리 모임을 조직했습니다.

박신혁: 우리가 여기 친척이 있습니까 가족이 있습니까. 갑자기 아파도 누가 찾아봐 주는 사람도 없고요. 그래서 내가 생각하다가 이북도민 친목회를 조직했어요. 지금은 조직된 지 1년이 넘었는데 300명이 넘는 회원이 있습니다. 서로 날짜를 정해서 여기 경치 좋은 곳이 많잖아요. 1박2일 거기 가서 모든 스트레스 풀면서 고향음식 먹고 즐기고 오면 마음이 자기 친척집에 놀러갔다 오는 기분이고 해서 자주 같이 놀러다니고 있어요.

봄에 정기모임을 갖고 여름에는 바닷가에서 가을에는 단풍놀이 또 겨울에 한해를 보내는 송년모임을 갖습니다. 물론 사이사이에 소규모가 모여 즐거운 시간을 갖기도 하지만 단순히 놀자고 모이는 것은 아닙니다.

박신혁: 이제 꿈이 다른 것이 있겠습니까. 우리 모임이 맹목적으로 만나서 먹고 노는 것이 아니라 봉사단체로 한달에 한번씩 부모없는 아이들 데려가 키우는 복지센터에 가서 봉사를 합니다. 앞으로 더 많은 봉사를 할 수 있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일을 하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어려운 사람들의 손과발이 되주고 부모없는 아이들의 버팀목이 돼주려고 생각을 하고 있어요.

박신혁 씨는 지난 2008년 둥근달이 뜬 단오날 밤에 쪽배를 타고 서해바다 백령도를 통해 남한에 입국합니다. 대부분 남한에 사는 탈북자들이 두만강을 건너 중국을 경유해 제3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남한에 가는 것과는 다른 방법을 이용했는데요. 탈북한 다음날 남한에 도착한 겁니다.

박 씨는 75마력짜리 기계선이 쪽배 열척을 묶어 서해바다인 황해남도 장산곶 앞바다에서 꽃게잡이를 하는 데 단오날 밤에 동료들이 술에 취해 잠이든 틈을 타서 쪽배를 타고 남한땅인 백령도로 탈출했습니다.

박신혁: 바다가 정말 해상탈북이 제일 빠릅니다. 위험하고 모험적이긴 한데 시간상으로 보면 제일 빠른 길이 해상탈북이죠. 저같이 기계배를 타면 제일 좋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여름이면 바다라도 그렇게 춥지 않으니까 노를 저어서 백령도 쪽으로 썰물을 타고 탈북하면 해상탈북이 언제든지 가능하죠.

당원이었던 박 씨는 탈북을 10년동안 준비했다고 하는데요. 이렇게 치밀하게 준비하지 않으면 아무리 가까운 거리라도 바다를 통한 탈북은 성공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

박신혁: 사람이 무슨 목적을 실현하자면 우연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난 28시간 하룻동안인데 그 하루를 위해서 10년을 준비했어요. 선택을 잘못하면 인생이 바뀔 수 있기 때문에 나도 선택을 쉽게 하지 않았어요. 여러 가지 객관적인 요인을 놓고 생각을 하고 경로도 연구하고 실행해서 성공한 것이죠. 내가 아무리 이렇게 설명을 해도 본인이 단호한 의지가 없으면 탈북을 결심할 수 없어요. 여기도 보면 탈북민이 북한 가족에게 돈을 보내주고 가끔씩 통화를 한다고 해요. 그런데 돈을 보내줘서 달러를 가지고 있으면 도당 책임비서보다 잘사니까 그런분은 오라고 해도 안오죠. 경제적 정치적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겠다 하는 것이 없으면 안되요. 나는 솔직히 북한에서 지지리 못살고 궁핍한 생활은 안했지만 정치적인 자유를 누리기 위해 탈북했어요. 나는 당원이었으니까 한주일에 한번씩 계속 생활총화를 하고 조직에 보고하고 또 일을 해도 그에대한 보수도 차려지지 않고…

이제 강산도 한 번 변한다는 10년 세월을 남한에서 살았습니다. 신분과 토대가 인생을 좌우하는 곳이 아닌 순수한 경쟁으로 헤쳐나가야 하는 자본주의 생활. 가끔씩 자신의 능력에 한계를 느낄 때도 있지만 힘들때마다 지금은 어려워도 해는 반드시 뜬다는 남한노래 가사말 처럼 극복하면서 현실을 맞고 있습니다.

박신혁: 이제 어느 때는 조금 회의심도 들때가 있어요. 내가 북한에서 이렇게 일했으면 아마 노력영웅도 됐을 것이다. 이런 생각도 들고요. 북한에서는 날이 밝아야 일나가고 일도 하는둥 마는둥 하다가 들어오고요. 솔직히 육체적으로 한국보다 일은 힘이 들지는 않아요. 사람이 사는 곳이라 여기도 다 좋은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예요. 우리 회사에 탈북자는 나 혼자인데 그렇다고 해서 누가 나한테 스트레스를 주고 하지 못해요. 그런 사람있으면 정정당당하게 얘기를 하고 또 나는 그 사람들만큼 수준을 능가해서  일하기 때문에 그사람들이 감히 나보고 이래라 저래라 하질 못해요. 사람이 살다보면 좋은 사람도 있고 성격이 꽁한 사람도 있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하기 나름이예요. 사람들과 어울리고 사람들과 농담도 하고 휴식할 때는 자기가 먼저 커피도 한잔 뽑아서 주고 하면 사람이 다 좋아한다는 거죠.

세상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더불어 사는 것이다. 주위를 돌아보면서 뜻이맞는 친구와 함께 가는 것이 행복한 것이라고 믿고 있는 박신혁 씨. 불평불만을 늘어놓기 보다는 현실에 적응하고 더 나은 길을 향해 노을 저어 나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박신혁: 저는 그런 생각을 매일 하고 있어요. 매일 저녁때나 아침에 일어나서 감사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북한에 비교하면 하늘과 땅차이로 훨씬 발전됐고 생활도 편리하고 내가 정말 선택을 잘했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어요.

제2의 고향 오늘은 황해도 출신의 박신혁 씨의 이야기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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