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은 나의 꿈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2020-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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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내 학원 밀집가에 특수목적고 입시전문을 알리는 학원 간판이 붙어 있다.
서울 시내 학원 밀집가에 특수목적고 입시전문을 알리는 학원 간판이 붙어 있다.
/연합뉴스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옛 문헌에 보면 맹모삼천지교란 것이 있습니다. 맹자 어머니가 아들에게 좋은 교육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 세 번 이사 한 것을 빗대서 자녀교육에 열성인 어머니를 얘기할 때 자주 인용하는 말입니다. 남한이나 북한이나 자녀교육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은 평양 출신의 40대 초반 여성 김미교 씨의 이야기 입니다.

김미교: 내 아들이지만 대단하다 하는 것이 북한에서 두 살 반에 나와서 중국에서 유치원을 다니다 보니까 한국에 들어올 때는 8살인데 한국어를 한마디도 못했어요.

김 씨는 지난2006년 고향을 떠났습니다. 사실 탈북이라기 보다는 돈을 벌어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자는 단순한 생각이었는데요. 그때 아들은 겨우 걸음마를 떼고 아장아장 걸어다닐 나이었습니다.

김미교: 시댁에서는 저를 엄청 안 좋게 보고 하니까 제가 삼촌 집으로 잠시 피신을 갔어요. 그때 거기에 이모 할머니가 나와 계셨는데 하시는 말씀이 그때 북경에서 식당일을 해도 중국 돈으로 천200원에서 천500원을 월급을 받을 수 있데요. 계산을 해보니까 그때 북한이 어려울 때라 평양 시에서는 한집에서 돈을 내기 어려우니까 세 집에서 돈을 모아 세 칸짜리 집을 사는 거예요. 화장실은 공동으로 쓰고요. 각각 한방에 한 세대가 들어가 사는 거죠. 그렇게 많이 사고팔고 했어요. 사실 다 나라집이었는데 고난의 행군을 겪으면서 시장이 생기고 집도 사유화가 되기 시작한 거예요. 저는 시댁하고 너무 힘드니까 중국에 와서 단 한 칸짜리 집을 살 돈을 벌고 나가겠다는 생각을 하고 중국으로 오게 된 거죠.

평양에서 태어나 대학생활을 한 김 씨는 정말 남부럽지 않은 부유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는 갖은 것을 다 잃게 됩니다. 항상 남에게 베풀면서 살다가 남한테 신세를 지고 친구들한테 도움을 받아야 할 형편이 되고선 자존심이 상하고 너무 비참했다고 했습니다.

김미교: 갑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제 생활은 아무것도 갖은 게 없어진 거예요. 그 다음에 나라가 고난의 행군을 하는데 과학자들은 굶기면 안 된다고 밥을 주는데 딱 세 숟가락이었어요. 그게 전부였어요. 처음에는 방학기간에 어머니 병원에 갔어요. 그 병동에서 간부들하고 앉아서 식사하고 했는데 나중에는 제가 알던 분들이 전부 바뀌고 해서 그 병원에 가는 것이 너무 생소한 거예요. 어머니 자리에는 또 새로 후임으로 오시는 분들이 계시니까요. 그런데 또 내 물건들은 보초를 서는 군인 아저씨들이 다 창문을 뜯고 훔쳐다가 제 물건을 장마당에 내다 판거죠. 그러니까 저는 돈도 없고 팔 물건도 없고 대학생활 할 때 치약이 없어서 지금 말하긴 부끄럽지만 친구 치약을 훔쳐서 이빨을 닦고 한 적도 있어요. 그만큼 어려웠어요.

어머니 돌아가시고는 탈북 전까지 10년동안 눈물만 흘리며 살았다는 김씨는 아들을 데리고 다시 남한 행을 결심하게 됩니다. 맹자 어머니가 아들에게 더 좋은 교육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 세 번이나 이사를 한 그런 심정으로 말입니다.

김미교: 저희 동생이 한국에 가겠다고 하니까 그러더라고요. 금뎅이는 어디가도 금뎅이고 돌뎅이는 어디가도 돌뎅인데 중국에서도 이렇게 사는데 굳이 한국에 갈 필요가 있는가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아니다. 아이는 북한 아이니까 한국어를 배워서 나중에 아빠를 만나더라도 한국어로 얘기를 해야지 중국말만 하면 안되잖냐. 아들이 공부를 잘했으니까 중국어도 하고 한국어도 하면 아들은 제가 못 이룬 것을 다 이뤄줄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한국으로 아들을 데리고 온 거죠.

한국말을 한마디도 못하는 아들을 초등학교 나이에 맞는 4학년에 입학시킵니다. 그것도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고 했다고 고집스럽게 탈북 청소년이 다니는 대안학교가 아닌 남한아이들만 다니는 공립학교에 말입니다.

김미교: 제가 한국에 와서 제일 감동을 받았던 것이 북한에서는 감사합니다. 사랑 한다. 이런 말을 잘 안 해요. 나도 내 아들이 나한테 소중하다, 귀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그랬는데 아들을 데리고 입학을 하려고 초등학교에 가서 수속을 하고 선생님한테 갔는데 김혜경 선생님이라고 나이가 좀 있으신 분이었는데 제 손을 잡으시더니 문준이 어머니 이렇게 귀한 문준이를 저희 반에 데려다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하는 거예요. 이 말에 제가 펑펑 울었어요. 저도 한번도 우리 아들이 귀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그 선생님이 그렇게 말하니까 그 말이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는 거예요.

초등학교는 매일 일기를 쓰는 숙제가 있는데 한국말을 모르는 아들이 자기 마음을 말하면 김 씨는 아들 손을 잡고 한국어로 일기를 써야 했습니다.

김미교: 아들이 하는 말이 엄마 중국에는 친구가 많았는데 한국에 오니까 말도 안 통하고 친구가 없어서 너무 슬프다고 해서 그것을 써서 제출을 했는데 담임 선생님이 그 일기를 보고 나중에 그러더라고요. 다음 날 학교에서 선생님이 문준이를 친구로 생각하는 사람은 손을 들어라 했더니 다 손을 들더래요. 너를 다 친구로 생각하는데 너는 왜 친구가 없다고 생각하니 이 친구들 이름을 선생님이 다 칠판에 쓰시면서 하루에 5명씨만 친구들 이름을 외우자 그리고 너는 친구들에게 중국어를 가르쳐 주고 친구들은 너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주면 되잖아. 그런 말을 듣고 이렇게 위대한 선생님이 다 있나 하고 무척 고마웠어요.

남한생활 7년 이제 아들은 고등학생이 됐습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수재들이 다니는 특수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는데요.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도 고맙지만 무엇보다 건강하게 잘 성장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랍니다. 얘기를 듣다 보니 아들 얘기만 했는데요. 김 씨도 아들 못지 않게 열심히 살았습니다.

김미교: 하나원에서 교육을 하는데 재봉, 요리, 세무회계를 가르쳐 줬는데 저한테 맞는 것은 세무회계라고 생각하고 강의를 열심히 들었어요. 나와서는 세무학원 두 달 공부하니까 자격증을 따겠더라고요. 3월에 나와서 9월에 취업을 했어요.

36살에 시작한 남한생활 정말 조금 빨리 남한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현재 생활에 만족합니다.

김미교: 여기 와서 식당에도 가보면 한국 이모들도 식당에서 일하는 분들 많잖아요. 한국에서 태어난 분들도 이런 막일을 하는데 난 그래도 햇빛 안보고 사무실에 앉아서 그것도 한국에서 3번째 가는 회계법인 1,500명 직원 중 탈북자는 나 하난데. 탈북자라고 하면 탈북자가 어떻게 이런 회사에 들어올 수 있느냐고 그러거든요.

누구나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회계법인에서 인정받으며 일하고 수입도 적지 않지만 자신을 위한 투자는 최대한 자제하고 있습니다.

김미교: 제가 혼자였더라면 그냥 벌어서 진짜 한번 가보고 싶은 외국도 갔을 건데 …일본을 가고 싶은데 가질 못했어요. 여행을 가보질 못했어요.

기자: 경제적으로 없어서 못 하신 건 아니죠?

김미교: 할 수는 있는데 여건이 그렇지 않네요. 왜 그런가 하면 200만원 좀 넘게 받아서 아이 학원비로 150만원을 쓰고 있어요. 제 생활을 다 아이에게 초점을 맞추는 거예요. 아들이 저 같은 인생을 안 살았으면 좋겠어요. 한국아이들하고 경쟁해서 이겨서 잘 살자면 공부시키는 방법밖에는 없는데…

평양 출신으로 북한에서 소위 말하는 일류대학을 다녔고 부족함을 못 느끼는 생활을 하다가 한 순간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했던 김 씨는 남한에서는 자신의 실력으로 당당히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김미교: 대학원에 들어갔거든요. 욕심 같아서는 박사까지 하고 싶어요. 제가 열심히 살아서 아들이 본받는 엄마가 되고 싶어요.

제 2의 고향 오늘은 평양 출신의 김미교 씨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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