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살에 자격증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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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나이 때문에 할 수 없는 것과 하지 않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몸을 써서 하는 육체노동은 젊은이에 비해 체력이 딸려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겠지만 몸을 쓰지 않고 하는 배움에 있어서는 전혀 문제가 안 된다고 말하는 이가 있는데요. 오늘은 일흔 살이 넘었어도 자격증에 도전하는 최영순(가명) 할머니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최 씨가 고향인 함경북도를 떠난 것은 지난 2009년으로 마지막이자 처음으로 선택을 한 겁니다.

최영순: 죽어도 살아도 사회주의를 지키자고 했어요. 그런데 너무도 살기 힘들었어요. 전해에 농사도 안 됐고요. 너무나 힘들어서 거길 떠나지 않으면 안됐기에 떠난 겁니다.

최 씨는 먼저 남한으로 간 가족의 도움으로 브로커를 통해 탈북 했기에 중국생활을 거치지 않고 북한을 떠날 때부터 최종 목적지를 남한으로 잡습니다.

최영순: 중국을 거쳐 공명까지 가서 태국으로 가기까지 거의 한 달 걸렸어요. 태국에서 비행기 타고 한국 왔어요.

기자: 탈북해서 한 달 만에 한국 도착하신 겁니까?

최영순: 네, 우리가 빨리 왔어요. 브로커가 잘해줬어요.

기자: 남한에 도착하니 어떻던가요?

최영순: 북한에서 평생 살다가 왔는데 내가 너무 늦게 왔다고 했어요. 아버지 때문에 거기서 수모 받지 말고 벌써 젊은 나이에 한국에 와서 살았어야 했는데 이런 천국이 어디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기자: 왜 그런 생각이 드셨어요?

최영순: 국정원에 들어오니까 거기 선생님들이 좋게 대해주고 쌀밥을 못 먹던 사람이 매일 이밥에 고기에 고깃국 먹고 왜 이렇게 잘해줄까 했어요. 또 거기선 다 몰랐는데 하나원 오니까 여기가 바로 지상낙원 천국이구나 하고 느꼈어요. 그러나 마음은 정신적으로 편하지 않았어요. 우리는 죽을 때까지 탈북자니까 자기 고향에 살아야 편하지 지금도 그래요 잘 먹고 잘살아도 정신은 편하지 않아요.

기자: 왜 편하지 않을까요?

최영순: 불안해요. 왜 그런가? 남북이 너무 맞지 않으니까요. 남북이 그래도 풀리는 소리 들으면 기쁘고 남북이 으르렁 대면 마음이 불안해요. 육체는 좋은 데 정신은 아직 불안해요.

비록 몸은 남한에 있고 신분이 보장된 상태에서 큰 어려움 없이 지내고는 있지만 한평생 북한에서 산 사람이 문화가 틀린 자본주의 사회인 남한에서 살자니 마음이 불편한 것은 피할 수 없는 일, 남한에선 텔레비전을 통해 하루 종일 방송이 나오니까 자연스레 북한관련 뉴스도 자주 접하게 되는데 이를 통해 북한에서도 몰랐던 북한 사정을 알게 됩니다.

최영순: 보니까 북한에서 한 말은 전부 거짓말 이예요. 미국은 조선민족의 철천지원수라고 배웠는데 와보니까 사실은 그게 아니에요. 한국은 전쟁을 하려고 안 해요. 될 수 있는 대로 전쟁을 피하고 평화적으로 민족이 마주하자고 하는데 안 되는 거예요.

여러분은 60년 이상 북한에서 살고 남한에서 산 것은 5년이 안되는데 생각이 확 바뀔 수 있다고 보십니까?

최영순: 그렇게 되더라고요. 내가 북한에서도 평범하게 안 살았어요. 내가 여기 오기 전까지 여맹위원장 했거든요.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미제 침략자 때문에 우리가 경제봉쇄를 당하고 어려우니까 허리띠를 졸라매고 잘살아보자고 대중 선전을 하던 낸데 실제 한국 땅에 와보니 생각이 달라졌어요. 국정원에 가보니 황장엽 비서가 쓴 책이 있어서 봤어요. 그 책을 보니까 좀 거짓말 같았어요. 그런데 좀 이상한 것이 주체사상을 쓴 사람이 왜 생각이 바뀌었을까 생각했는데 하나원에서 김정일 생활 경로를 쓴 책을 보고 바로 북한이 썩은 곳이란 것을 절실히 알았어요. 너무 속아 살았다는 생각이 분통이 터졌어요.

어찌 보면 고향 떠난 사람의 타향살이를 하고 있는데 청취자 여러분은 최영순 할머니가 남한에서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다고 보십니까?

최영순: 너무 너무 좋아요. 오늘도 비가 온다고 하는데 또 생각했어요. 비가 온다고 해도 무슨 걱정이 있나? 북한에선 날만 흐려도 불쏘시개도 없어서 밥할 걱정하고 여기 올 때만 해도 우리는 전기를 보지도 못 했어요.

기자: 남한 생활은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최영순: 완전 180도 바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걱정이 없어요. 아파트에서 비 맞을 걱정 없지 아무 걱정이 없는데 단지 빨리 죽을까 걱정이죠. 오래 살았으면 좋겠는데.

기자: 북한에선 장마당에 가서 먹을 것을 사고 밭일하고 했을 텐데...

최영순: 그렇죠. 아침 먹으면 점심 걱정 점심 먹으면 저녁 걱정 장마당에 뭘 가지고 나가 팔아서 한 끼분을 사오겠는가 이렇게 걱정을 했는데 지금은 정부에서 쌀을 싼 값으로 주지 생계비 주지 이런 천국이 어디 있단 말이 예요.

기자: 북한에서와 달리 남한에서 처음 보는 것이 많았을 텐데요.

최영순: 그런 일이 너무 많았어요. 말투가 틀리니까 그런데 애로가 되진 않았어요. 주인이 못 알아들으면 설명을 해주고 그러면 너무 인자하고 정답게 답을 해줘요. 너무 좋아요. 우리는 20-30킬로를 50리 70리를 걸어 다녔어요. 안 그러면 죽으니까요. 그런데 여기 와서는 배낭을 짊어질 일이 없어요. 버스 전철을 타는데 또 전철은 우리 나이에는 무료예요.

남한에서도 대략 정년인 60살이 넘으면 그동안 다니던 직장에서 나와 갑자기 자기 시간이 많아져 오히려 혼란스러워 하는 분들이 많은데 최 할머니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최영순: 지금도 심심하지 않아요. 독산 서강전문학교에 가서 공부해요.

기자: 무슨 공부를 하세요?

최영순: 내가 70살이 되도 어린이는 봐줄 수는 있잖아요. 그러자면 자격증을 따야죠. 어린이 엄마들이 자격증 있는 사람에게 맡기지 없는 사람에겐 아이를 맡기질 않지요.

그래서 어린이 교육 보육 그리고 난 아직 건강하기 때문에 노인도 봐 줄 수 있잖아요. 그래서 요양보호사 자격증도 땄어요. 요즘은 또 노인 정신건강 문제를 공부하고 있어요. 집에 가만히 있지를 않아요.

기자: 주말과 평일이 다릅니까?

최영순: 다르죠. 평일에는 모두 돈 버느라고 한국에서도 젊은이들이 얼마나 열심히 일하고 있어요. 그리고 주말은 내가 학원을 안 가니까 하루 휴식하고 일요일은 교회에 가요.

기자: 5년이란 시간이 빨리 갔습니까?

최영순: 너무 빨리 갔어요. 이제 내년 5월이면 5년이 지나는데 너무 아쉬워요.

남한생활 5년여 동안 최 할머니는 공부해서 자격증 따고 학원 다니면서 수료증 받은 것이 10개는 넘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남한정착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는 건데요. 지금도 목표를 세우고 배우기를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최영순: 내가 앞으로 계획은 나이 70살이 돼서 어디가 취직은 어려우니까 내가 어린이 보육교육 자격증을 따면 여기 아파트 단지 내에서 아이 때문에 일 못하는 엄마들 그 아이들을 몇 명 봐줄까 목표로 하고 있어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한 삶이 딱히 정해진 것도 없고 정답이 있을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 바탕에는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기본이 있는데요. 희망을 잃지 않고 목표를 가진 그런 삶을 살고 있다면 된 것 아닐까 싶습니다.

최영순: 난 지금 만족해요. 나는 이것으로 인생말년 만족이에요. 병나지 말고 한 100살 살았으면 좋겠어요. 한국에 와서 새로운 인생을 산다고 생각하고 큰아들이 100살까지 살라고 하는데 그렇게 까진 못 살아도 80-90살 까지는 살 것 같아요.

제2의 고향 오늘은 탈북여성 최영순(가명) 할머니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