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게 가장 슬픈 출산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2018-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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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명이 넘는 탈북자들이 지난 2006년 방콕의 한 수용소 안에서 한국으로 보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400명이 넘는 탈북자들이 지난 2006년 방콕의 한 수용소 안에서 한국으로 보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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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임신과 출산은 가정의 가장 큰 축복이자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갓난아이의 힘찬 울음소리에 웃음꽃이 피고 생기가 넘쳐 흐르게 됩니다. 이렇게 또 하나의 생명을 세상에 내놓은 출산은 가족과 친족 그리고 사회의 큰 관심을 집중 시킵니다. 하지만 때때로 세상에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하는 기구한 사연도 있는데요. 오늘은 출산에 관한 사연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함경북도 무산군이 고향인 최미라(가명) 씨의 이야기입니다.

최미라: 많이 꼬꾸라졌었어요. 제가 남들보다 자존심이 쎄요. 그래서 너무 힘들었었어요. 해를 안 보고 집에서 쓰러져서 일어나질 못했어요.

최 씨는 아들을 낳고 산후우울증을 겪습니다. 그 배경은 이렇습니다. 중국에서 살다가 만삭의 몸으로  2008년 남한행을 하는 도중 태국 이민국 수용소에서 아들을 낳은 겁니다. 일반적으로 출산 후 우울증이란 아이를 낳고 산모가 경험하는 몸의 호르몬 변화와 여러 가지 걱정 등이 주요 원인이 되는데요. 보통 아이를 낳을 때는 친정 엄마나 산파의 도움을 받게 되지만 최 씨는 혼자였습니다.

최미라: 제가 중국을 떠나 태국을 거쳐 왔는데 그 태국 이민국 감옥 안에서 애를 낳았어요. 저는 여자가 아니고 동물이라고 생각했어요. 스스로 바지를 벗고 혼자 애를 낳다 보니까 자존심이 다 무너졌던 거예요. 사람들이 나를 동물보듯 하는 눈빛 하나하나가 계속 떠오르는 거예요. 새벽 5시가 좀 안돼서 제가 아프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국정원 선생님께 전화를 했어요. 대사관 선생님에게 전화를 했더니 하는 말이 애는 양수 터지고 한 3-4시간은 있어야 애가 나온데요. 그런데 제가 애를 너무 빨리 낳았어요. 제가 애가 셋이거든요. 셋째는 바로 나오죠. 그때부터 자존심이 무너진거죠. 그때부터는 마음속에 조금 희망이 있었는데 그 희망이 다 무너졌어요.

배가 남산만하게 부른 만삭의 몸으로 산달에 남한행을 했다는 말인데요. 최 씨가 급한게 중국을 떠나 남한행을 한 이유가 있었죠.

최미라: 브러커가 하는 말이 애를 임신해서 태국까지 오면 대우를 잘받고 빨리 온데요. 그말 듣고  떠났어요. 그런데 중간에 애를 그렇게 허무하게 낳을줄은 몰랐어요.

1998년 많은 탈북민이 그랬듯 18살 꽃다운 나이에 최 씨는 기억하기조차 끔찍한 일을 당하게 됩니다. 정말 신이 존재 한다면 이런 운명을 자신에게 준 이유를 따져 묻고 싶은 심정입니다.

최미라: 오빠가 중국까지 데려다 줬어요. 작년까지만 해도 이런 생각을 했어요. 팔았어도 내 형제가 팔아 돈을 받았는데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하니까 아니 살아있으면 내가 덜 분하겠는데 오는 사람마다 오빠가 죽었데요. 동생 팔아먹었으면 그 돈으로 잘먹고 잘 살았어야지…

아이 둘은 중국에 있습니다. 최 씨가 남한 행을 했을 때 첫아가 9살 둘째가 6살 이었는데요. 최 씨의 시련은 그의 20대 시절을 기억에서 지우게 만들었습니다.

기자: 처음에 남한에 갔을 때 충격을 많이 받았었군요. 그래서 밖에를 못 나갔던 거군요?

최미라: 너무 힘들었어요. 제가 1998년에 고향을 떠나서 중국에 팔려가서 그집에서 7년을 살았어요. 그 집에서 살아보려고 온갖 애를 썼어요. 일이란 일은 다해봤고요. 벽돌공장에서도 일했고 지하공장에서도 일했고요. 저는 근육이 그때 생겼어요. 지금도 근육이 많아요. 남자 못지 않게 일을 잘해요.

기자: 그때 아들을 낳은 거군요

최미라: 네, 그때 낳아서 살면서 돈을 조금씩 모아서 아이 호적을 만들어 줬어요. 그때 큰 아이가 7살이었는데 애들 공부만 시킬 수 있다면 좋겠다 생각했어요. 호적이 없는 아이들은 8배 돈을 더 내야했어요. 시내에 살았는데 호적이 없으면 돈을 더내야 아이를 봐주는 거예요. 그래서 조금 모은 돈으로 애들 호적을 만들어 줬어요. 호적 만드는 데 3만 6천원이었어요. 중국에서 집 한채를 짓고도 남는 돈이었었어요. 그 돈을 모으자고 갖은 일을 다했어요. 애 아빠가 일을 잘했어요. 너무 착하다 못해 모자라 보였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에게 배고프고 못 배운 설움을 대물림 할 수는 없었습니다. 7년 동안 부부가 모은 돈이 2만 6천원 아이들 호적을 만들기 위해 조금씩 모았던 돈의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1만원 부족했고 모자라는 돈은 남에게 빌려 어렵게 원하는 것을 손에 쥘 수가 있었습니다.

최미라: 3만6천 써서 호적을 만들고서는 제가 호적을 올리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아이들 큰아빠한테 저 호적 좀 올려주세요. 가짜라도 괜찮아요 그랬더니 절대 안 된데요. 공안도 너가 어디서 왔는지 다 아는데  금방 들통이 난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마음을 내려놓으려고 하는데 자꾸 생각이 나는 거예요.  아이들이 나중에 공부를 잘하면 북경이라도 따라가보고 싶은데 안 된다니까 저도 반항심이 생긴거예요. 진짜 한 번도 아이들 아빠 떠날 생각을 안해봤는데 돈도 1만원 빌렸겠다 외지에 가서 식당일을 열심히 2년 해서 돈을 갚게 되더라고요.

빌린 돈을 갚기 위해 일했던 식당에서 운명의 만남이 있었는데요. 바로 셋째 아이의 아빠를 만난 겁니다.

최미라: 바로 뒷집에 사는 분인데 매일 밥먹으로 오더라고요. 오는데 그냥 보면 씩 웃고 지나가고 지나가고 저도 어딘가 모르게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나만 보면 웃고 가지 했어요. 그런데 6개월 정도 지났을 대 갑자기 한 보름 정도 안오는거예요. 그리고 다시 보니까 저 사람 내가 잡아야겠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기자: 그런데 갑자기 왜 안왔답니까?

최미라: 보름동안 어디 출장을 갔다 왔다 하더라고요.

기자: 알고 보니까 식당 뒤에 살았군요.

최미라: 네, 그때부터 그 사람에게 대해 알고 싶더라고요. 그 사람이 어디 살고 뭘 하는 사람인지요. 그리고 어떻게 자주 오는지요. 실은 내 얼굴을 보려고 없는 돈에 매일 밥 사먹으로 왔다고 하더라고요.

그 남성은 최 씨가 간절히 원했던 호구를 만들어 줬습니다. 자기집을 팔아 당시 만 원을 써서 가짜 호구를 만들어 줬는데요. 최 씨는 그렇게 간절히 원하던 것을 얻게 됐지만 미련없이 찢어 버리고 남한행을 선택합니다.

기자: 돈을 들여서 신분증까지 만들어 줬는데 갑자기 한국간다고 했을 때 가서 나를 불러 이랬나요?

최미라: 아니요. 그 사람은 내가 하도 고향을 그리워 하고 형제 만나고 싶어 하고 하니까 그 모습이  슬퍼보인 거예요.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네가 성공해서 살아 이러면서 처음에는 무조건 자기를 데려가라고 했어요. 그런데 내가 생각하니까 그래요. 내가 이 사람을 보내줘야겠다 그렇게 갖고 싶어하는 신분, 자기 고국에 가고 싶어하는데 보내줘야겠다. 이런 생각을 한 것 같아요. 그래서 전 이 사람은 정말 양심있는 사람이다 생각하고 제가 떠났어요. 그리도 와서 3개월만에 이 사람을 데려왔어요.

기자: 한국은 고향이 아니잖아요?

최미라: 고향이 아니라고 해도 가면 신분도 준다고 하고 정착도 하게 작은 집이라도 주고 하니까 선뜻 떠났어요.

새로 만난 남성이 진심으로 자신을 위해줬지만 최 씨는 마음 속 깊은 곳에 진정 원하는 것을 찾아 만삭의 몸으로 험한 길에 올랐던 겁니다.

최미라: 저는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호적을 준다기에 떠났어요. 내 고국의 신분이 좋은 거예요. 그게 좋은 거예요. 생각을 해도 내가 북한에 다시 돌아가면 죽을 것이고 저는 중국에서 힘들게 살았잖아요. 저는 생각보다 강해요. 그런데 부러졌어요. 부러진 것이 힘들게 애를 낳다 보니까 제 자신을 못 이긴거죠.

중국에서 남한을 향해 오던 중 경유지인 태국 이민국 수용소 안에서 출산을 했고 그로인해 위기의 순간을 맞았던 최 씨의 사연이었는데요. 다음 시간에는 산후우을증을 극복하고 도라지판매 무역회사 사장으로 거듭난 이야기 전해드리겠습니다.

제2의 고향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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