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남포 체육학원 수영학부를 다녔고 함흥 국방학원에서 권총선수로 졸업한 후 인민군대 선수로 군단 체육단에서 생활을 했지만 고난의 행군 시절 군에서 강제제대를 당해서 남한으로 간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은 남한생활 7년차가 되는 강춘화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올해 서른일곱 살이 된 강춘화 씨는 함경북도 출신으로 남한생활이 그리 길지 않지만 북한에서의 생활을 묻자 이렇게 답변을 합니다.
강춘화: 아니 모르겠어요. 그리 오래된 것 같지는 않은데 일단 여기서 살고 현실에 맞춰 사니까 기존에 있던 안 좋은 기억은 서서히 지워지죠. 내 마음에 간직할 수 있는 것이 있고 지울 수 있는 것은 지워버리고 싶어요.
기자: 북한 하면 제일 기억 남는 것은 뭔가요?
강춘화: 저희는 어릴 때 아빠가 잘나가는 사람이라 고생은 안 했는데 나라가 한때 고비였던 때가 있었는데 그때 모두가 많이 힘들었어요. 내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들었고 군 제대하면서도 충격이 많았고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좀 상처로 남죠.
워낙 강한 성격의 사람이고 열심히 했기 때문에 군생활도 남쪽과 제일 가까운 최전방에서 근무했습니다. 그렇게 6년을 복무하다 어느 날 갑자기 가족이 간첩죄로 몰리면서 제대를 당합니다. 어쩌면 그것도 미리 예정됐던 운명이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강춘화: 저는 최전방에서 근무해서 남한에 대해서 많이 알았어요. 북한에서는 남한에 가면 지하감방에 간다고 세뇌교육을 했는데 저희가 눈으로 보고 남한 방송을 듣고 한 번씩 산에 삐라가 뿌려지고 쌀도 한 번씩 (하늘서)떨어지는 데 보면 아는 거죠. 겉으로는 세뇌교육을 받는 척 하지만 남한이란 곳이 여기보다는 잘사는 구나 하는 것을 아는 거죠. 중국에서 살면서 남한 가겠다 하기 보다는 북송이 많이 되니까 아빠가 남한으로 가자고 많이 노력을 했어요. 가족이 다 가다가 죽으면 어쩔까 걱정이 돼서 부모님하고 언니, 동생은 몽골을 통해 남한으로 들어오고 저는 그 다음해 저는 남한으로 왔죠.
북한에서는 자기만 잘한다고 출세가 보장되고 잘살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런 것이 남 얘기일 때는 몰랐지만 정작 자신이 당하고 나니 아무런 희망도 북한 땅에선 찾을 수가 없었던 겁니다. 중국에서는 한 번 잡혀 북한으로 강제북송 된 적이 있기 때문에 두 번째 탈북할 때는 다신 북한 땅을 밟지 않기를 기도 했습니다.
보통 탈북자들이 남한으로 갈 때는 과연 남쪽 사회에서 적응하고 잘 살 수 있을까 이런 걱정도 하게 되는데요. 강 씨는 달랐습니다.
강춘화: 저는 그런 마음은 없었어요. 그런 마음은 없고 북한과 남한 사회를 비교해 봤을 때 북한은 제가 열심히 해도 저 앞에 차려지는 것이 없어요. 그런데 남한은 새벽잠을 안자고 노력하면 그만큼 대가가 차려지거든요. 처음 회사는 주야간 일하는 회사였어요. 일주일은 주간 하고 일주일은 야간 하는 그런 직장이었는데 처음에는 육체적으로 힘들었지만 3개월 지나니까 적응이 되는 거예요. 처음엔 사람들 눈총이 거슬렸지만 일을 잘하니까 그런 것이 없어지더라고요. 또 내가 모르는 것이 있으면 알고 싶어서 먼저 한걸음 더 다가가서 물어보고요. 못살 때는 아버지 어머니 보고 원망도 많이 했죠. 왜 저를 낳았냐고 원망도 했는데 지금은 저를 낳아주셔서 고맙고 키워주셔서 감사 합니다 그런 마음이에요.
남쪽 사회에 적응을 잘하면서 살고 있는데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되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바로 말투인데요. 운동선수생활에 군복무까지 해서일까? 노력만으로 잘 안 되는가 봅니다.
강춘화 : 여기서 살면서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이 언어가 부드러운데 저희는 음톤도 높고 부드럽지 않고 하니까 저 같은 경우는 언어 학원을 다니고 싶은데 시간이 안 되는 거예요. 부산말투는 좀 거친데 서울 사람말씨는 너무 부드러워요.
강 씨는 남한으로 간지 1년 만에 남한 사람을 만나 지금은 슬하에 아들을 하나 두고 있습니다. 이렇게 남편과 아들 세 식구가 살고 있습니다.
강춘화: 아들은 제가 하나를 낳은 이유가 있어요. 신랑도 형제가 많은데 장남이라 고생을 많이 했어요. 저의 역시 형제가 딸만 4명인데 한명이 죽었고 아버지 형제도 많았어요. 그런 것을 봤을 때는 자식을 많이 놓는 것보다 하나만 낳아 투자를 해서 잘됐으면 하는 거죠. 이왕이면 부모 마음은 같잖아요. 내 자식 잘되고 해주고 싶은 것 다해주고 싶고 그렇잖아요. 아이는 자기가 공부를 하겠다고 하면 뒷바라지를 해주겠지만 아들이 원하는 것을 해주겠다는 마음이 들어요. 지금 내가 준비할 수 있는 것은 다하면서 키우거든요.
아들 이야기를 길게 해서 대학에 진학하는 아이가 있는가? 했지만 올해 6살로 유치원에 다니고 있다고 했습니다. 자녀 교육은 아무리 빨리 해도 이르지 않다는 말인데요. 그는 지금 이순간이 제일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강춘화: 행복한 삶이 라는 것이 저를 믿어주고 아껴주는 배우자를 만난 것이고 이런 행복을 지키고 싶은 것이 첫째예요. 그리고 두 번째는 돈과 재산인데 저는 돈 욕심은 있지만 재산 욕심은 없어요. 돈은 벌어야 내가 살 수 있으니까요. 지금 남들처럼 크진 않지만 작은 집은 있어요. 크지는 않지만 아파트에 살고 차도 이번에 하나 뽑았어요. 남들이 하는 것은 다 하고 있으니까 그것으로 만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탈북여성 강춘화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