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의 아내

김태희-탈북자 xallsl@rfa.org
2021/11/30 09:58:20.753544 US/Easte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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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의 아내 한국인 선교사가 개척한 레소토 수도 마세루 인근 국경도시의 한 교회에 예배를 드리러 온 아이들.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
/연합뉴스

청취자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김태희의 여성시대. 오늘은 선교사의 아내로 살아가는 한 여성과 그 가족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북한에서 공부할 때 도적이라는 제목의 미국 선교사에 대한 이야기를 배웠죠. 거기에는 과수원을 가꾸는 선교사가 바람에 떨어져 굴러온 사과 한 알을 주어먹은 소년을 세빠드를 풀어서 물게 하고 또 나무에 묶어놓고 이마에 청강수로 도적이라고 새겨놓았다고 배워주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선교사 하면 살짝 두려운 마음조차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선교사들이야말로 세계 각국에서 선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특히 그 선교사를 내조해서 묵묵히 돕는 사모의 역할이 크다고 볼 수가 있지요. 제가 만난 선교사는 동남아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분인데 한국으로 오셨다가 저랑 만나서 교제하고 또 탈북민들을 위해 봉사도 같이 하게 된 분이랍니다.

어느 날 문뜩 걸려온 모르는 전화, 여보세요? 하니 김태희 씨인가요? 알고보니 해외 파송되어 사역을 하다가 국내에 들어와서 탈북민을 만나고 싶어 저의 연락처를 찾아 전화를 했다고 하시더군요. 선교도 북한을 접경으로 한 중국으로 가고 싶었지만 파송 기관의 결정으로 동남아로 가게 되셨다는 그분은 한국에 있는 짧은 기간만큼이라도 탈북동포를 위해 기도하고 섬기고 교제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저의 집에 방문하여 차도 마시면서 이야기 나누고 또 선교사님 집에도 초대되어 맛있는 저녁 식사도 대접받았죠. 얼마 전에는 미군으로 복무중인 아들 내외가 왔다고 저녁에 차 한잔 마시자고 해서 갔는데 키도 훤칠하고 잘 생긴 맏아들과 이쁘고 착하고 또 친절하기까지 한 며느리를 보고 그만 예쁜 나머지 제 주머니를 다 털어서 용돈을 주고 말았네요.

그분들은 처음에는 아프리카 오지의 앙골라를 선교지로 받아서 나갔다는군요. 맏아들이 갓 초등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는데 학교를 떼고 한국 사람이 아무도 없는 그리고 신변안전을 보장 받을 수 없는 곳에서 선교활동을 했답니다.

위험한 상황이 얼마나 많았는지 헤아릴 수조차 없지만 아이를 키우면서 젊은 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다고 했습니다. 한국생활에 익숙해진 여성으로 그 험지에서 오로지 기독교 선교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기엔 너무나도 현실이 가혹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처음으로 접하는 생소한 언어를 배워야만 했고 자녀의 교육문제도 심각하지 않았을까? 그러다가 현재 선교를 하고 있는 동남아로 갔는데 한국에서 4시간 거리를 그곳에서는 십여시간 걸리것이 보통이고 또 비가 오면 하룻밤을 길에서 자고 다음날 출발해야 할 정도로 교통 형편이 심각한 곳이라는군요.

선교사님 댁에서 얘기를 나누며 앉아서 차를 마시는데 저의 남편이 갑자기 여기는 모두 다문화라고 해서 눈이 동그래졌다가 그만 모두 웃음을 터뜨렸는데요. 이유인즉 선교사님 맏아들은 영어도 잘하고 미국인이나 마찬가지이고, 선교사님 부부와 중학교 2학년인 막내 아들은 동남아 언어를 잘 구사하고 저희는 한국 태생이니 다문화라고 말했던 것이죠.

그날 서로 기분 좋게 웃기는 했지만 그만큼 선교사님 가정 모두가 선교사라는 것입니다. 한국 국적은 가졌지만 한국이 아닌 동남아에서 태어난 막내 아들은 한국의 아이들이 하는 사춘기도 없이 밝고 맑은 얼굴로 너무나도 예쁘기까지 하답니다.

그 아이가 동남아의 한 국제학교를 다니는데 한국에 와서 학교를 가서 처음으로 놀란 것이 학교에서 점심식사를 주는 것이었답니다. 두 번째로는 해외에서는 먹기 힘든 김치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동남아에서 학교를 다닐 때 선교사님 막내 아들은 늘 도시락을 가지고 다녔 다고 하네요. 어쩌면 우리가 어릴 때 늘 도시락을 싸가지고 가서 점심 시간이면 둘러앉아 먹던 그런 모습이겠지만 처음에 한국 아이들은 식사를 할 때 같이 끼어 먹을 수도 없었다는 군요.

동남아에서 생활을 하면 현지인들하고 살아야 하는데 보통 사옥에 20여명이 함께 살아간다는군요. 그런데 그들하고 같이 생활하면 현대문명에 취약해서 웃지도, 울지도 못할 일들이 많답니다. 좌식변기를 사용할 줄 몰라서 물을 내리지 않고 배설물이 쌓여가는 일, 사모님의 속옷이 신기해서 일일이 뒤져보고 들고 가는 일이 빈번해도 선교사의 아내이기에 그럴 수 있다고 참고 보듬어주어야 하는 그 심정인들 여자로서 할 수 있을까 생각이 드는 것이죠.

한국에서 갓 한글을 뗀 아들이 앙골라로 가서 포루투갈어를 배워야 했고, 시험마다 빵점 시험지를 가져왔을 때 엄마로서 어땠을까? 그러다가 동남아로 가니 또 새로운 언어를 배워야 했고 그러다가 미국으로 가서 대학을 나오고 미군이 되었으니 부모의 마음으로 너무나도 장하고 대견할 것 같다는 생각이죠.

이제 다시 동남아로 돌아가서 복지부분에 좀 더 관심을 가져보고 싶으신 두 분은 사회복지사 공부와 요양보호사 자격증도 함께 취득하였답니다. 한국에서 생활하다보면 민간단체나 기관들에서 여러 가지 활동을 진행하기에 보통은 보고 “아, 이런 것도 하네.” 이렇게 넘어가는데 20년 넘게 해외에서 생활하다 오신 사모님에게는 모든 것이 새롭고 배우고 싶고 접하고 싶은 것들뿐입니다.

한 번씩 웃느라고 놀려먹기는 하지만 어쩌면 선교라는 하나의 목적으로 자신들의 행복과 편함을 다 내려놓고 머나먼 해외에서 소명을 가지고 최선을 다 하시는 분들이 이제는 자신들의 사역지에 과일나무도 심었고 맛있는 과일이 주렁주렁 열리면 그때 놀러오라고 해맑게 웃으면서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북한에서 배워서 알던 선교사의 얼굴이 이렇게 맑고 평안한 줄을 새삼 느꼈습니다. 그리고 선교사의 아내로 살면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로지 선교사님만을 내조할 수 있는 여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믿음이 어디에서 올 수 있는 것인지 다시금 생각해보게 됩니다.

각국에 이런 선교사들이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고 복음전하고 또 대한민국을 세계에 알리는 일을 합니다. 그들 뒤에는 묵묵히 남편의 뒤를 돌보는 그들의 아내와 가족이 있습니다.

진행 김태희, 에디터 이진서, 웹팀 김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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