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우] 럼스펠드 전 미국 국방장관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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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이든 서민이든 누구나 한번은 맞이해야 하는 것이 죽음입니다. 미국의 도널드 럼스펠드(Donald Rumsfeld) 전 국방장관이 지난 6월 29일 향년 88세로 별세했습니다. 그는 사상 최초로 국방장관을 두 번이나 지낼 만큼 관운이 좋았던 인사인데다, 강경한 대외정책을 주도했던 네오콘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의 명복을 빌면서 그가 걸어온 인생을 반추해보려고 합니다.

럼스펠드는 1932년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태어나 프린스턴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해군 조종장교로 입대하여 중위로 전역했습니다. 30세였던 1962년에 연방하원의원에 당선되어 내리 4선을 했고, 이후 네 명의 공화당 대통령을 모시면서 유능한 정부관료로 정착했습니다. 닉슨 행정부에서 경제기회국장과 대통령 자문역을, 레이건 시절에는 중동 특사를 그리고 포드 정부에서는 43세 최연소 나이로 제13대 국방장관이 됩니다. 2001년 조지 부시 행정부에서는 69세 최고령으로 제21대 국방장관에 취임합니다.

럼스펠드는 한국과도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1975년에서 1977년까지 첫번째로 국방장관에 재임하는데, 그때는 박정희 대통령의 핵개발 문제로 양국이 갈등을 겪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당시는 북한군이 124군 부대의 청와대 기습사건을 포함하여 끊임없이 군사도발을 감행하던 시기였습니다. 게다가 닉슨 대통령은 1969년 아시아의 방위는 아시안인들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고 한국에 주둔하던 제7사단을 철수해버렸습니다. 이에 충격을 받은 박정희 대통령이 자주국방을 위해 핵무기를 개발하기로 결심하고 프랑스와 재처리공장 건설 계약을 맺었지만 핵확산을 우려하는 미국의 반대에 부딪친 것입니다. 그 시절 럼스펠드 장관이 미국을 방문한 서종철 한국 국방장관에게 “한국이 핵개발을 강행하면 모든 한미관계가 끝장날 것”이라고 했던 일화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습니다. 물론, 미국이 제2사단 철수 계획을 백지화하고 한미연합사를 창설함으로써 대한 방위공약을 강화하고 한국이 핵개발을 포기함으로써 갈등은 일단락되었으며, 결과적으로 한미동맹은 럼스펠드 장관 재직 동안 한 단계 더 공고해졌습니다. 럼스펠드는 대북 강경파이기도 했는데, 1998년에 북한, 이라크 등의 미사일 위협에 맞서 미사일방어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럼스펠드 보고서’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럼스펠드는 두 번째로 국방장관에 취임한 2001년 이후 안보전략가로서 부시 행정부의 신안보전략을 구축하는데 크게 기여합니다. 부시 정부는 2001년 8월 새로운 국방전략검토서(DSR)와 4년주기국방태세검토서(QDR)를 발표했는데, 종전에 비해 적극적이고 공세적인 신전략들이 많이 포함되었습니다. 미 본토 방위의 중요성과 중국 위협론이 강조되었고, 위협위주 군사전략을 능력위주 전략으로 바꾸었습니다. 2001년 9·11 테러 후에는 공세지향적 핵전략을 담은 새로운 핵태세검토서(NPR)를 발표하고 대미 테러에 대비하여 국토안보부를 신설했습니다. 이런 일들을 주도하면서 럼스펠드는 일약 네오콘의 상징으로 부상했습니다.

9·11 테러 직후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의 알카에다를 배후로 지목하고 알카에다를 비호하는 탈레반 세력을 무너뜨렸고, 이어서 2003년에는 대량살상무기를 만들고 있다는 의혹을 받던 이라크의 독재자 후세인을 공격했습니다. 이 아프간 전쟁과 이라크 전쟁의 지휘자는 럼스펠드 장관이었습니다. 그는 미군을 과학화∙정예화된 기동부대로 변모시켜 적은 병력으로 넓은 전장을 통제할 수 있게 하면서도 예산을 절감하는 개혁을 추진했고, 해공군의 역할을 중시했습니다. 전투력과 직접 연관되지 않는 분야들을 민영화하여 아웃소싱하는 체계도 구축했습니다. 그 결과 미군은 2003년 이라크 전쟁에서 첨단 기술과 장비를 이용하는 ‘정밀타격(Precision Strike),’ 초기에 적 지휘부를 초토화시키는 ‘조준 폭격(Target of Opportunity),’ 불필요한 지상전을 건너뛰면서 신속하게 적의 전략중심지를 점령하여 전쟁 의지를 파괴하는 ‘효과중심 작전(Effect-Based Operation)’과 ‘개구리 뛰기(Leapfrogging) 작전,’ 공중강습으로 적군을 심리적으로 압도하는 ‘충격과 공포(Shock and Awe) 작전’ 등 새로운 군사작전들을 선보이면서 전쟁 개시 45일만에 바그다드를 함락하고 후세인 정권을 붕괴시켰습니다. 정확도를 자랑하는 토마호크 미사일, 레이더에 잡히지 않는 F-117 스텔스기, JDAM 공대지 정밀폭탄, 지하침투용 벙크버스타 폭탄, 후세인의 전자무기들을 무력화시킨 e-bomb 등 미군의 과학병기들 앞에 이라크군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럼스펠드를 비난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가 예상한대로 이라크군의 항복을 받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이후 점령지역을 안정화시키는 데에는 많은 병력이 필요했고, 미군의 첨단무기들은 도심지역과 산악지역에서 출몰하는 게릴라들을 상대하는데 효과가 없었습니다. 이후 미국은 8년동안 이라크에 군대를 주둔시켜야 했고 전쟁비용도 눈덩이처럼 불어났습니다. 이런 이유로 럼스펠드가 비난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렇듯 럼스펠드 장관은 한 시대를 풍미하면서 미국을 움직였던 정치가이자 대테러 전쟁을 지휘한 장수 겸 미국의 군사 패러다임에 큰 변화를 주도한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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