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호 칼럼: 6.25 납북 민간인 생사확인을


2006.06.26

6월25일은 북한의 남침으로 6.25전쟁이 일어난 지 56년이 되는 날이었다. 동족끼리 총칼을 겨누고 싸운 그 끔직하고 참혹했던 비극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던 필자에게도 그날의 광경이 생생히 떠오른다. 마침 휴가 나왔던 남한의 국군 장병들에게 소속 부대로 즉시 복귀하라는 긴급 명령이 떨어져 역전은 전선으로 달려가는 장병들로 북적였다. 시민들은 38선에서 북한의 전면 공격으로 전쟁이 일어 난 것을 방송 등을 통해 알고 있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전선으로 싸우러 나가는 장병들의 모습이 조금도 두려운 기색 없이 하나같이 씩씩해 보인 것이다. 대한 부인회의 어머니들은 역전으로 나가 전선으로 떠나는 장병들에게 주먹밥들을 쥐어 주었다. 먼 친척으로 고등학교 3학년이던 형과 친구도 그 얼마 후 자원해 씩씩한 모습으로 전선으로 나갔다. 중공군의 참전과 함께 일선에선 치열한 공방전이 매일같이 계속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던 1953년 7월, 마침내 정전과 함께 총성은 멎고 남북간 포로 교환이 시작됐다.

필자는 중학교 수업이 끝나자마자, 학교에서 가까운 광화문 네거리로 달려갔다. 거기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자리쯤에 판문점으로부터 교환되어 오는 아마도 서울 지역 국군 포로들과 부상병들이 실려 왔었다. 필자가 눈을 크게 뜨고 찾은 사람은 친척되는 국군이었다. 그러나 몇날 며칠을 광화문으로 달려 나가 찾아보았으나 끝내 친척은 보이지 않았다.

25일 서울 장축체육관에선 6.25 전쟁 56주년 기념식이 국군노병들과 미국 벨기에 터키 태국등 유엔 참전국 용사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이날 기념식에서 남한의 한명숙 국무총리는 기념사를 통해 “북한은 미사일문제에 대해 국제사회의 우려를 충분히 인식하고 이를 해결해야 한다”고 촉구했으며 재향군인회의 박세직 회장은 대회사를 통해 “국군포로와 납북자의 조기 송환”을 북한에 강력히 촉구했다.

6.25 전쟁 때 북으로 끌려 간 사람들은 신원이 확인된 사람들만 8만 2천 959명이다. 6.25납북인사가족협의회는 전쟁 중 납북자들을 10만여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중 언론계를 보면 225명이 북으로 끌려 간 것으로 대한언론인회는 밝히고 있다. 납북 언론인들 가운데는 유명 인사로 정인보, 정지용, 백관수 씨 등이 있다. 대한언론인회는 지난해 대한적십자사에 납북언론인의 생사확인과 송환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전했지만 지금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다.

1953년 휴전협정 이후 지난해까지 신원이 확인 된 납북자는 489명으로 이중 생사가 확인된 사람은 103명으로 남한당국은 파악하고 있다. 전쟁 중 억류된 국군 포로는 약 5만여 명, 이들 중 탈북자들을 통해 신원 확인된 국군포로는 총1,743으로 이중 생존자는 548명, 사망자 885명, 행방불명자 301명으로 남한당국은 파악하고 있다.

지금 남·북간엔 극히 일부의 이산가족 상봉 행사와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사업 등 대화와 교류, 경제협력이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전쟁 중 또는 전쟁 이후 피랍자들에 대한 생사확인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는 6.25 전쟁의 상처와 비극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음을 뜻한다. 이 상처와 비극을 마무리 하려면, 그래서 남·북간에 진정한 대화와 교류가 계속되게 하려면 국군 포로들과 피랍 민간인들에 대한 생사확인과 송환이 하루 빨리 이루어 져야 한다.

이들이나 남쪽의 가족들은 이미 고령의 나이들이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대화와 교류는 의미가 없다. 남·북한 당국은 이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6·25전쟁 56주년을 맞은 일요일, 서울의 한 교회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다 “6·25는 확실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 역사적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하면 우리 민족의 살아 있는 역사가 되고 ,그 역사의 교훈이 우리나라를 전쟁 없는 평화의 나라로 이끌어 나갈 것입니다. 6·25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북한의 남침을 용서는 하되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2006. 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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